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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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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프락치’ 폭로 잘한 거겠죠?”

김 대표가 털어놓은 국정원과의 악연
등록 2019-12-17 02:14 수정 2020-05-07 04:45
12월9일 국가정보원 프락치 사건을 폭로한 ‘김 대표’가 <한겨레21>과 만나 자신의 삶을 되짚고 있다. 류우종 기자

12월9일 국가정보원 프락치 사건을 폭로한 ‘김 대표’가 <한겨레21>과 만나 자신의 삶을 되짚고 있다. 류우종 기자

멀찍이 보면 우스꽝스러운, 갇혀 있으면 한없이 두려운 울타리. 그 주변을 맴돌며 ‘김 대표’(가명)는 17년을 지냈다. 울타리에는 주사파, 아르오(RO·지하혁명조직), 경기 동부 같은 이름이 붙곤 했다. ‘북한 주체사상과 대남혁명론을 추종하는 지하혁명조직’ ‘1999년 터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의 잔존 세력’이라고 했다. 세계를 무대로 질주하고, 선진국 수식이 자연스러운 2000년대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숙제에 넣기는 민망하다. “폭동이 발생하더라도… 국헌 문란의 사태가 발생한다고 보기도 어렵다.”(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 대법원 판결문 소수 의견 가운데)

그래도 종북 울타리를 둘러싼 막연한 공포는 종종 세상을 휘감았다. 특히 예상 못한 대상과 붙을 때 파괴력이 컸다. 원내 정당이 대상이 된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정점이었다. 바람이 훑고 가면 대개는 무관심하거나 기피했다. 오로지 “그런 걸 자부심으로 생각”(김 대표)하며 불분명한 지하 잔당을 쫓는 국가정보원과 거기 지목돼 삶이 파탄 난 피해자만 울타리 안에 남아 절체절명인 2000년대를 보냈다.

학생운동 했다고 자수한 것에 발목 잡혀

12월9일 <한겨레21>과 마주 앉아, 지난 삶을 묻는 말에 김 대표가 입을 뗀다. “기구했다.” 21세기 공안몰이와 개인적 비극이 얽혔다. “(국정원 민간 정보원 생활을 했던) 지옥 같은 5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경험과 불법성을 폭로했다. 사찰하고 조작하며, ‘암약하는 지하혁명조직’ 딱지를 이번에는 ‘명문대 출신·전문직·유명 사회단체에 광범위하게 붙이려 했다’고 했다. “이제는 정말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다. 그의 힘만으로 될 일은 아닌데, 세상이 생각보다 잠잠하다.

문득 감아 보인 김 대표 오른쪽 눈꺼풀이 다 감기지 못한 채 흰자위를 드러낸다. 안면마비가 온 지 다섯 달쯤 됐다. “병원비가 아까워 병원에 가지 않는다.” 죄책감, 서운함, 두려움, 고단함이 뒤범벅인 얼굴로 김 대표가 지나온 삶을 되짚는다.

2002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있었다.” 혼자 조용히 앉아 수학문제 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별로 체질에 맞지 않았지만 “나름의 정의감, 선배 제안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민중승리’라는 진영에 속했다. 국정원의 그림 속에서 민혁당 사건과 연관된 조직이다. “교육운동을 하고 싶었다. 관점이 다를 수는 있어도 무슨 대단한 간첩들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2006년 어머니가 사고를 겪었다. 눈에 파이프가 꽂혀 실명했다. “그런 채로 어머니는 학생운동을 정리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정리하러 군대에 갔다. 학생운동 전력을 알고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지속해서 찾아왔다. 관심병사였고, 부적응이 두려운 이등병이었다. 기무사가 알려준 국정원 전화번호로 연락해, “민중승리 안에서 주체사상 공부를 했다”고 자수했다. 군대에서 한 자수는 국정원이 지금도 모든 일이 김 대표의 ‘자발적인 협조’였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깔끔하게 터는 건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시작이었다.”

2년 만에 다시 찾아온 국정원 직원

2008년 제대했다. 이번에는 본인이 큰 교통사고를 겪었다.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1년 반 병원에 머물렀다. 그동안에도 국정원 직원은 6개월에 한 번꼴로 찾아왔다. 퇴원한 뒤에도 꽤 오래, 드문드문 찾아왔다. 다만 “민간정보원 삼지는 않았고 본인들이 수사한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2012년쯤 “(제보) 사건은 잘 안 될 것 같다. 앞으로 형 못 볼 거다. 학생운동 하지 말고 잘 살아라”, 말하고 국정원 직원이 사라졌다. “이걸로 국정원과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2013년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아는 이름이 스쳤지만 관심 두지 않았다. 더는 얽히기 싫었다. 사고와 학원 사업 실패가 겹쳤다. 빚이 많았다. 아버지와 다시 서기 위해 시작한 캠핑장 일만 했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세상하고 인연을 끊고 바닷가에서 개 산책시키고 캠핑장 예약 들어오면 청소하고 살았다.”

2014년 새로운 국정원 직원이 다시 찾아왔다. “예전에 만난 직원들과 급이 다른, RO 사건 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만날 때마다 돈을 건넸다. 머뭇댔다. “협조하기 싫었다. 다 끊긴 인연을 사찰하러 다시 만나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경제적 어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만삭인 아내가 카드빚 때문에 울었다. “돈이 약점이었다.” 결국 국정원 직원이 제안한 첫 번째 공작을 하기로 했다. 가장 소중한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 몰래 그의 말을 바닷가 방파제 근처에서 녹음했다. 잘 들리지 않는 친구 음성 녹음을 조작해, ‘친구 소개로 제3의 선배를 만나 지하조직에 가입하는 상황’인 양 진술서를 썼다. ‘있지도 않은 지하조직에 들어가 상황을 국정원에 보고하는 민간협조자’라는 기획된 정체성으로 살게 됐다. 국정원 직원은 “(지하조직 가입 조작은) 너랑 나랑 무덤까지 가지고 갈 일”이라고 했다.

죄책감은 때로 고개 들고 때로 합리화됐다. 국정원 연락 안 받고 잠수 타다가, 다그침과 돈 때문에 다시 협력하는 일이 반복됐다. 국정원 직원들은 “대상자를 조롱하며 활동에 정당성을 주입했다”. 십수억원대 성공 보수를 챙기고 안정된 삶을 사는 이전 프락치 사례를 들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다. 지시에 따라 사찰하고, 새로 나온 이름을 쫓아 그와 그의 단체에 접근하고, 거짓 진술서를 쓰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림 그리는 걸 도왔다”. 그사이 한 사람으로서 그의 존재는 훼손됐다. “그 시간은 제 인생에 없는 거죠. 제 생각이 없고 도구로만 쓰이던 시간인 거죠.”

무관심한 세상, 생각보다 더 엉망인 삶

현실과 동떨어져 헤매던 그 시간을 그치기로 마음먹었다. 5년 동안 국정원에서 겪은 일을 2019년 8월 폭로했다. 3개월여 흘렀다. 각오했지만 아직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다. 돈은 여전히 없다. “경제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다시 조금씩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과외라도 시작해보려”고 마음먹는다. 웅크린 몸을 펼라치면 “너는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라고 했던 국정원 직원의 마지막 말이 머리를 맴돈다. 사람 관계는 거의 끊겼다. 주변 사람에게 지난 5년 자신과 얽힌 시간은 “되짚어볼수록 이상하고 소름 돋는 일일 게 당연하다”.

세상 관심도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다. 국정원 공작 대상으로 지목된 진보 진영조차 난감하리라는 데도 생각이 미친다. 2000년대 공안 사건을 이뤄온 RO니 주사파니 하는 단어는, 생각의 다양성을 지지하고 국가보안법의 폭력성에 저항해온 이들에게조차, “막상 자신이 의심받았다는 지목만으로도 흠칫할 수밖에 없는” 낙인이 돼 있다.

그리하여 “폭로는 정말 잘한 일이었는지” 여전히 김 대표는 묻는다. 애써 “정의로운 사람들이 돕고 있고, 그래서 희망을 가져봐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이기도 한다. 혼란스럽다. 17년 그의 삶과 21세기 종북 논란을 둘러친 울타리는 여전히 우습고, 한없이 무섭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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