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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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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말은 안 듣고 폐교했나요”

공진중 폐교 결정 이후, 성재중·경서중으로 ‘강제 전학’ 간 37명의 학생들이 보낸 1년
등록 2020-03-21 14:47 수정 2022-12-10 02:04
올해 3월 문을 닫은 공진중학교.

올해 3월 문을 닫은 공진중학교.

영구임대아파트. 살고 싶을 때까지 저렴한 임대료만 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작은 집이지만 아이들이 대학 갈 때까지는 걱정이 없겠다 싶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가 작아졌다. 이윽고 문을 닫았다. 아이는 조금 더 먼 학교로 걸어다녔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갔다. 학교가 작아졌다. 또 문을 닫았다. 아이는 조금 더 먼 학교로 걸어다녔다. 15살, 16살 아이는 두 번의 폐교를 겪었다. 두 번의 강제 전학을 당했다. 저소득층에 가장 안정적이라는 보금자리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래도 영구임대아파트를 떠날 수 없는 부모들은 아이에게 미안하다.
‘초등학교 폐교 1교(염강초)’ ‘중학교 폐교 1교(공진중)’. 올해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2020~2024학년도 학생배치계획’에 등장하는 두 폐교 학교는 공교롭게도 영구임대아파트·공공임대아파트를 곁에 두고 있다. ‘개교-과대-축소-폐교 위기’의 경로를 거쳐온 수많은 ‘임대아파트 옆 과소학교’의 미래로 불리는 학교들이다.
초등학교 전교생 240명 이하 또는 중·고등학교 300명 이하 소규모 학교. 1개교 신설을 위한 2개교 폐지. 어른들의 숫자에 맞추느라 정든 학교와 이별하고 낯선 학교로 가야 했던 아이들의 시간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폐교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폐교를 앞두고, 지난해 성재중으로 옮겨가 1년간 지낸 공진중 아이들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적응했으나, 그 과정은 힘들고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영구임대아파트 옆 과소학교의 다른 미래도 상상해봤다. 작은 학교가 학생 수를 한 번에 늘릴 수 있는 법, 작으면 작은 대로 잘 사는 법을 찾았다. 애초에 작은 학교를 만들지 않는 법도 고민했다. 앞으로도 교육과 부동산 투자를 향한 욕망과 비례해 영구임대아파트 옆 학교는 작아지겠지만, 그래도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하기에.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방준호기자 whorun@hani.co.kr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이번에도 소문으로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좀 있으면 공진중 폐교한다.’ 입학할 때부터 들어왔던 말.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거짓말 같았던 말. 불안할 때면 선배들을 떠올렸다. 설마설마하던 선배도, 그들의 선배도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2년 안에는 ‘좀 있으면’이 찾아오지 않기를, 완전히 학교에서 떠나기를 공진중 1학년 진영은 소원했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았다. 2018년 가을, 학교에 다녀온 엄마는 말했다. “공진중에는 학생 수가 너무 적잖아. 성재중은 학생 수도 많고 시험(공부하는 분위기)도 낫다고 하니까, 거기 가는 건 어때?” 그냥 멍했다. “생각해볼게요.” 고민할 새도 없이 얼마 뒤 엄마는 가정통신문을 내밀었다. 성재중과 경서중. 전학 갈 학교를 선택하라는 ‘최후통첩’과도 같았다. 갑작스러웠으나, 돌이켜보면 학교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진영과 함께 입학한 친구들은 41명밖에 안 됐다. 선배들 때보다 십수 명은 적었다. 13명, 14명, 14명. 겨우 꾸린 작디작은 3개 반에서도 친구들이 하나둘 떠났다. 진영은 남고 싶었다. 햄버거, 크림스파게티, 초코우유…. 유난히 맛있는 급식을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막 정이 들기 시작한 선생님들과 재밌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2020년 3월16일, 공진중학교 정문에 ‘폐쇄 안내문’이 붙어 있다.

2020년 3월16일, 공진중학교 정문에 ‘폐쇄 안내문’이 붙어 있다.

2019년 2월 거짓말 같았던 말이 현실로

10월6일 늦은 밤, 진영은 휴대전화로 청와대 누리집에 있는 ‘국민청원’ 게시판에 들어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청와대 청원으로 올라오는 이런저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저는 1학년이고 2020년에는 3학년입니다. 만약 공진중이 폐교하게 된다면, 전 3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합니다. 제 모교가 없어진다는 것이 슬픕니다. 공진중 폐교를 막아주세요.”

“잘했어.” 우연히 청원 글을 본 사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진영을 칭찬했다. 다른 친구들의 마음도 같으면 청원에 힘을 보태라며 참여 방법을 알려줬다. 곧이어 다른 반 친구도 진영처럼 청와대에 새로운 청원을 올렸다. 아이들 목소리는 울려퍼지기도 전에 묻혀버렸다.

2019년 2월, 서울시 강서양천교육지원청은 ‘공진중 폐지 후 성재중 및 경서중으로 통폐합’안을 확정해 공고했다. 2019년 3월, 공진중에 1학년 신입생은 입학시키지 않고, 2학년은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며, 3학년만 1년간 유지하다 이듬해 완전히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었다.

“2학년까지는 공진중에서 지내다 3학년 때 전학”을 가는 줄 알았던 진영에게는 더 나쁜 소식이었다. 겨울방학 기간에 “어차피 전학 갈 거라면 미리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전학시키기 시작하니 절반은 전학 가는 거로 확 쏠렸고, 남은 아이들로는 학급 구성이 안 되자 결국 다 보내는 것”(공진중 관계자)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끝까지 전학을 거부했던 아이들 몇 명은 등이 떠밀렸다. “다른 학교에 적응하는 걸 걱정했을 듯한 내성적인 성격의 친구”도 마지막까지 버티다 공진중을 떠나야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새 학기까지는 한 달 남았을 때다. 34명은 성재중, 3명은 경서중으로 아이들이 갈라졌다. 공진중에는 3학년 47명만 남았다.

어른들의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의 시간이 시작됐다. 겨울방학, 학생 37명이 ‘강제 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벌써 두 번째 전학이었다. 공진초 폐교로 4학년 때 탑산초등학교로 옮겨진 뒤 공진중 폐교로 중학교 2학년 때 성재중·경서중으로 또다시 이동되는 아이들이 있었다.

“6반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다”

“너네 우리 학교 오면 공진중 교복 입고 다닌다는데?” “반도 우리 학교랑 너네 학교랑 나눈다는데?” 탑산초를 같이 다녔던 성재중 친구가 툭 던진 말에 승주는 맘이 확 상했다. ‘우리 학교’와 ‘너네 학교’. 친구는 벌써부터 ‘출신’을 구분하고 있었다. “편한 우리 학교를 놔두고 왜 다른 학교에 가야 하나” 하는 물음은 매번 답을 찾지 못하고 “가기 싫다”는 결론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친구들 말은 뜬소문이었지만 당시 이를 믿었던 승주도 부모님도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또래 친구를 사귀는 일이 중요한 진영은 걱정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날마다 SNS에서 알고 있던 성재중 친구, 그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마음에 설레기도 했지만, 걔들은 1학년 때 무리를 만들었을 텐데 거기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컸다.

성향과 상황에 따라 전학이 대수롭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새로움과 변화에 대한 걱정이 없는 정은은 “아무런 느낌 없이” 덤덤했다. 이미 공진초에서 탑산초로 전학했던 일도 있었다. “이전(공진초 때)에 친구들과 헤어져봤고, (성재중에) 가봤자 학교생활이 (지금과) 뭐가 크게 달라질까” 싶었다. 신중한 편인 주현은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게” 조금은 떨렸고 조금은 기대됐다.

새 친구들을 맞이하는 성재중 아이들에게도 ‘단체 전학’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원래 (또래 친구들이) 3학년 때 온다더니 2학년 때 오는 거로 1년 앞당겨져”(해영)서다. 그래도 주민은 그냥 신났다. “탑산초를 졸업하며 흩어졌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탑산초 출신이 아닌 유빈은 “원래 알던 친구들이 아니고 처음 보는 친구들이라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2019년 3월, 전학한 첫날. 지수는 15분 남짓 걸어 성재중에 갔다. 공진중에 갈 때보다 10분 더 걸렸지만, 걸어 다닐 만한 거리였다. “성재중이 공진중보다 등교 시간이 10분 늦어, 앞으로 아침에 똑같이 일어나면 되겠다” 싶었다.

겉보기에 공진중과 엇비슷한 규모인 성재중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반 배정이 여느 때보다 긴장됐다. 성재중엔 2학년이 6반까지 있었다. 공진중의 두 배였다. 한 반에 22명, 23명씩 배정된다고 했다. 역시 공진중의 두 배쯤 됐다. 구도심에 있는 성재중도 전교생 388명으로 작은 편이었으나, 소규모 학교에서 온 아이들 눈에는 “‘6반’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다”(의현)고 할 만큼 커 보이기만 했다.

어떤 반에는 공진중 출신이 5명, 어떤 반은 6명이 배정됐다. 누군가는 “친한 공진중 친구가 같이 한 반이 돼서” 다행이었고, 누군가는 “친한 공진중 친구들과 다 헤어져서” 속이 상했다. 각자 배정된 반으로 흩어져, 출석번호대로 앉아 첫날을 보냈다. 두 학교 통폐합으로 마련된 새로운 책상과 의자에서 시작한 성재중 생활이었다. 단체 전학을 간 터라 ‘자기소개’ 시간이 따로 없어, 말수 적은 주현에게는 “다행”이었다.

2019년 3월 공진중 학생 전학 경로. 자료: 서울시 강서양천교육지원청 *공진중학교는 2020년 3월 폐교. 신입생은 2019년부터 받지 않음.

2019년 3월 공진중 학생 전학 경로. 자료: 서울시 강서양천교육지원청 *공진중학교는 2020년 3월 폐교. 신입생은 2019년부터 받지 않음.

처음 들어본 말

아이들은 제 속도대로 적응해나갔다. “하루 만에 완전히 적응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일주일 만에 (성재중 친구들과) 친해진 친구”도 있었다. “얘 축구 잘하는 애야.” “얘 내 초등학교 친구야.” 공진중 출신 아이들과 같이 탑산초를 나온 친구들이 연결고리가 됐다.

그래도 아직 서먹서먹할 때 ‘어울림캠프’가 열렸다. “빨리 친해지라”며 학교가 만든 자리였다. “모든 수련회가 그렇듯, 서로 소개하고 협동하는 게임 같은 활동을 하는 게 재미없었지만”(해영) 친구들끼리 숙소에서 노는 시간은 꽤 좋았다. “성재 어땠어?” “공진 어땠어?” “성재에는 ○○이 잘생겼어.” “공진은 △△가 예뻐.”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어색함을 덜어냈다.

지수, 주현, 정은처럼 금세 “성재중 친구들과 섞인 친구” “오히려 성재중 친구들을 리드하는(이끄는) 친구”도 있었지만 하민은 속도가 느렸다. 어울림캠프를 다녀와서도 급식을 먹을 때나, 집에 갈 때면 공진중 친구들을 찾았다.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 시시콜콜 대화도 공진중 친구와 나눴다. “공진중은 공진중끼리 다니는, 뭔가 끈끈한 느낌”(의현)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하민은 누군가와 빨리 마음을 터놓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지만 “우리 무리에 공진중 애들은 넣지 말자”며 뭉쳐다니는 성재중 친구들을 보니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1학년 때부터) 함께 다니는 (성재중) 친구들 무리에 낄 수 없어” 다른 반으로 이동수업을 갈 때도 혼자 다녔다. 성재중 친구들과도 맘 편히 급식을 먹게 된 것은 1학기가 거의 끝나가던 “6월, 7월쯤”이었다. 물론 1년 동안 끝내 혼자였던 친구도 있다. “공진중에서 혼자 있었던 친구는 성재중에 와서도 많이 혼자 있었고, 성재중 친구들이 도와주려 해도 결국 잘 어울리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주현은 기억한다.

두 학교의 아이들이 만나니, 처음엔 서로를 몰라 오해와 갈등도 있었다. “그냥 뒈져.” 새로운 친구의 말투에 승주는 “내가 진심으로 죽었으면 하는 건가” “나를 싫어하나” 잠깐 고민했다. 공진중을 다닐 땐 한 번도 못 들어본 표현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을 알아가다보니 “악의적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표현이 원래 조금 거칠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한번은 성재중·공진중 출신 친구가 “갑자기 서로 화내며 물건을 던지고 주먹다짐”하는 일도 있었다. 선생님이 개입해 충돌은 마무리됐으나, 이따금 두 친구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같은 반 친구들은 아슬아슬하다. 그래도 ‘학업 수준이 낮은 공진중 아이들이 면학 분위기를 해칠 것’이라는 일부 성재중 학부모의 걱정과 달리, “전학생이 와서 수업을 방해하거나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유빈)고 아이들은 느낀다.

영구임대아파트인 가양4·5단지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성재중 생활이 조금 더 낯설게 다가왔다. 1학년 의현은 선배들과 달리 신입생으로 성재중에 입학했으나, 마치 성재중으로 전학한 듯했다. 마음속 진학 1순위는 늘 공진중이었다. “집과 무척 가깝고, 같은 단지에 사는 선배들이 다니는” 학교라 익숙했다. 반대로 “성재중은 사람도 엄청 많고, (분양아파트 브랜드) □□에 사는 부잣집 애들이 오는 이미지”의 학교라 원래 진학 희망 순위에는 없었다.

아파트 보유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공진중 폐교가 “충격적으로” 확정된 뒤에도 의현은 성재중이 아닌 경서중 진학을 원했다. 영구·공공임대아파트 가양7~9단지 아이들 일부가 다니는 경서중이 공진중 다음으로 편하게 느껴졌다. “거기(성재중)는 아파트 보유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 우리 같은 장기주택(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아이들한테 차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부모님도 경서중 입학을 원했다.

의현 부모님의 우려처럼 사람들은 임대아파트를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더라도 ‘은근히’ 기피했다. 전학 대상자인 2학년 37명 중 3명만 경서중에 가고 나머지 모두 성재중에 간 이유 중에는 ‘분양아파트 학군 선호’도 있었다. “성재중이 더 좋은 학교라는 인식 때문에 원래 공진중이 아닌 성재중에 보내고 싶었던 (분양아파트) 공진중 부모들이 성재중을 선택”(공진중 관계자)했기 때문이다.

임대아파트에 대한 편견으로 의현은 상처받은 경험이 있었다. 공진초 폐교로 의현이 3학년 때 전학 간 탑산초 역시 성재중처럼 분양아파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곳에선 “늘 소외자 느낌”이었다. “(탑산초 아이들 사이에서) 공진초가 장애인이 많이 사는 곳(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다닌다는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친화력이 낮은” 의현은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걸지 못했다. “4학년 때는 탑산초 아이 셋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의현과 또 다른 친구를 따돌리는 일”(의현 부모님)까지 있었다. 시간이 흘러 6학년 때 마음을 터놓는 친구를 만난 뒤에야 의현은 위로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탑산초와 달리 성재중에선 “친한 친구도 생겼고, 나머지 반 친구들과 말 정도는 다 하”며 별 탈 없이 지낸다. 탑산초에서 단짝이던 친구와 함께 입학해 적응이 수월했던 덕분이다. 마음을 졸였던 부모도 “공진중 폐교 직후 성재중 전학생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긴다. 같은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주현과 정은은 “별로 힘든 점은 없었다”고 했다.

낯선 학교에서 아이들은 또래 친구만큼 선생님들에게도 많이 의지했다. 걱정과 달리 “성재중과 공진중 아이들을 똑같이 대하는 선생님” “‘너희들 이제 친하게 지내야 해’ 하며 잘해준 선생님”이 적응을 도왔다고 아이들은 기억했다.

예민한 시기를 겪는 아이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선생님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공진중 아이들이 성재중으로 많이 와서 좋긴 한데, 통제가 안 돼서 힘들다.” “우리 반에 (공진중에서) 이런 아이들만 왔냐.” 공진중과 성재중 출신을 가르는 듯한 선생님들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도 있었지만 “불편했다”는 학생도 있었다.

2019년 3월부터 공진중 출신 학생 34명이 옮겨가 생활하는 성재중학교.

2019년 3월부터 공진중 출신 학생 34명이 옮겨가 생활하는 성재중학교.

문 닫힌 학교를 지날 때마다

이별과 만남, 설렘과 불안, 희망과 실망. 여러 갈래의 감정을 겪어온 아이들은 성재중에서의 1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만족” “진짜 학교 같은 느낌” “즐거움”. 어느덧 새 환경에 적응한 아이들은 “이제 성재중이 우리 학교”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아직 “공진중이 더 편했다”는 아이도 성재중이 싫지만은 않다. “가족 같은 느낌의 학교도 좋았지만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학교도 좋아서 3학년이 더 기대되기 때문”이란다. 물론 문이 닫힌 공진중 앞을 지날 때면 슬프고, 아쉽고, 그리운 마음이 들지만.

공진중에 남고 싶은 마음에 청와대 청원까지 올렸던 진영도 지금은 성재중으로 잘 옮겨왔다고 생각한다. 새 친구들을 사귀느라 고생했지만 새 친구를 얻어서 좋다. 그래도 청원을 올렸을 때의 물음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 학교가 없어지는데 왜 우리 의견은 안 듣고 폐교와 전학을 결정했을까.” “왜 부모님과 학교 의견만 반영했을까.” “꼭 폐교해야 했다면,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1~2년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폐교된다고 미리 알려주고 차분하게 이별할 시간을 주면 안 됐을까.” 정은, 승주, 지수, 의현. 공진중 아이들이 함께 던진 질문이다.

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도시개발사업 묶인 뒤 꼬리표


폐교 불안 속 13년


27년 중 13년. 학교는 일생의 절반을 폐교의 불안 속에 살았다. 도시개발과 한 몸인 학교의 숙명이었다. 1993년 봄 공진중은 ‘한강종합개발계획’으로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탄생했으나, 2007년 겨울 인근 ‘마곡구역 도시개발사업’과 엮인 뒤부터 ‘폐교’ ‘이전’ ‘통폐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정부가 저출산으로 신규 학교 설립을 억제하던 상황에서, 마곡지구(1만1418가구)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려면 인근 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경제 논리에 공진중이 차출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공진중의 형제 학교인 공진초등학교가 2015년 폐교했다. 껍데기인 이름만 남은 채 마곡으로 옮긴 학교는 새 학생들로 채워졌다. 이듬해에는 교육부가 이른바 ‘마곡2중학교’ 신설 조건으로 공진중(2016년 186명)·송정중(328명)·염강초(168명)의 폐교를 확정했다. 모두 원도심에 있는 작은 학교였다. 공진중·염강초는 교육부가 정한 ‘적정 규모 학생 수’에 못 미치는 과소학교(소규모 학교·초등학교는 전교생 240명 이하, 중학교는 300명 이하)였고, 송정중은 저출산 추세로 곧 과소학교가 될 처지였다. 세 학교의 학부모와 주민들은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 상대적으로 학생이 많고 반발이 가장 심했던 송정중만 살아남았다. 2020년 3월, 공진중과 염강초가 사라지며 마곡하늬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우연일까. 유난히 작은 공진중과 염강초 옆에는 공공임대아파트 단지가 있다. 영구임대아파트 가양4단지(1998가구)와 가양5단지(2411가구) 아이들 일부가 공진중에, 영구임대아파트 가양7단지(1998가구)와 공공임대아파트 가양9단지(914가구) 아이들 일부가 염강초에 다녔다(가양초와 공동 통학구역).
폐교될 운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1993년 문 열어 3년 뒤 첫 졸업생 560명을 배출했던 공진중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저출산 여파로 대부분 학교에서 학생 수가 줄었지만, 임대아파트를 품은 학교에선 그 속도가 더 빨랐다. 이중고를 겪었다. 입주민이 고령화하는 임대아파트에선 학교에 보낼 아이가 적었고, 분양아파트에선 가난한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기 꺼렸다.(제1304호 표지이야기 ‘1반만 있는 도시 학교’ 참조)
차별과 배제에 학교는 시달렸다. 개교 13년 만인 2006년, 이미 공진중은 전교생 70%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로 분리됐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6년 2월19일 기사). 그래도 전교생 400~500명을 유지하던 학교는 ‘학교가 곧 없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겹치자 빠르게 말라갔다. 부모들이 공진중을 기피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폐교가 사실상 결정된 2018년에는 141명까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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