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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구 자영업 르포① 박리다매의 꿈과 좌절

‘코로나19 위기’ 100일 리포트
등록 2020-04-18 06:47 수정 2020-05-07 01:59
김병철 대구 중구 종로 '통큰통삼' 사장이 자신의 가게 앞에 서있다. 류유종 기자

김병철 대구 중구 종로 '통큰통삼' 사장이 자신의 가게 앞에 서있다. 류유종 기자

복기한다. 허허 웃던 입매가 야무지게 오므라든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처참한 매출액 적힌 포스기(판매시점정보관리기) 앞에 오늘도 김 사장은 학생의 마음으로 선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반성한다. 학생처럼 자주, 아련한 과거나 아득한 미래로 뻗는 부질없는 상념에 잠긴다. 김 사장은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고깃집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2020년 1월20일 인천국제공항, 한국땅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확인됐다(제1308호 참조). 2020년 2월18일 대구, 첫 확진자가 발표됐다. 이후 상황은 전 국민 아는 그대로다. 대구 시내 사람이 사라졌다. 28일, 257㎞. 우연과 우연이 겹친 시공을 건너 그 숱한 도시 가운데 하필 대구였다. 불운이다.
한때 섬유의 도시, 이제는 소비의 도시. 한국 경제 탈제조업·서비스화를 김 사장의 도시는 한발 앞서 겪었다. 여느 선진국 다 같이 겪는 일인데, 여느 선진국과 달리 준비는 부족했다. 서비스화는 세련되지 못했다. 영세 자영업화, 불평등 심화, 생산성 후퇴와 동의어로 쳤다. 섬유공장집 아들에서 장사하는 아빠가 되기까지 김 사장도 도시의 변화를 따라 좌절하고 다시 일어섰다. 그 순간 늘 혼자였다. 어쨌든 균형 맞췄다. 장사라는 것, 내 몫과 직원 몫과 손님 몫을 나누는 일이었는데 대개 내 몫을 줄이고 더 많은 손님이 찾는 가게를 지향했다. 손님이 좋아해 그도 좋았다. 전염병 앞에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손님이 사라졌고, 내 몫을 가장 크게 줄이고 그다음 직원 몫을 줄였다. 도시도, 나라도 나름 애쓰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하필 대구, 까지는 그저 불운임이 명백했는데. 하필 이 시점, 하필 이런 나라에서, 하필 자영업자인 것에는 뭔가 좀더 심장한 의미가 있어 보였다.
복기를 멎는다. 결과는? 실은 따져보지 않아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문을 닫는 게 나았다.” 2월부터 4월까지 가게 문 여는 대신 빚으로 파낸 구멍이 너무 크다. 메우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아득하다. 아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 학생, 그래도 간간이 찾는 손님들 얼굴이 아른댔다. 대구 곳곳, 주점 하는 도 사장, 카페 하는 우 사장, 식자재 납품하는 정 사장… 한숨을 이루는 질료는 조금씩 달라도 성질은 결국 비슷하다.
코로나19가 번졌다. 전국이 흔들렸다. 대구는 좀더 격하게 뒤집어졌다. 급하고 얕은 대책이 수십 개 쏟아졌다. 확진자는 감소했다. 동성로 거리에 사람 기운이 서서히 돋는다. 가게 매출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총선이 치러졌다. 대구 12석 모두 보수 성향 후보가 당선했다. 바뀌어야 했는데, 바뀐 척해봐도, 실은 바뀐 게 없는 혼란한 도시에서 다시 복기한다. 주어는 고쳐 적는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우리는 어떠해야 했는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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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병철(45)은 대학을 그만뒀다. 집안 어르신들 운영하던 섬유공장이 외환위기로 휘청였다. 폴리에스터 원단을 외국에 파는 무역업을 시작했다. 큰돈을 만진 때도 번 돈을 몽땅 잃은 때도 있다. 돌고 돌아 2020년. 대구 중구 장관동에서 고기 뷔페를 운영한다. 1인당 1만1400원, 고기 질도 좋다.

1996년 도재복(71)·양영희(66) 부부는 대구 시내(동성로)에서 운영하던 큰 술집을 그만뒀다. 섬유회사, 건설회사 사람들이 주로 찾았다. 술값은 대개 어음으로 받았다. 외상값 안 갚은 채 회사가 도산해버리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남긴 건 24평 아파트 한 채 정도다. 2020년, 부부는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서 작은 주점을 운영한다. 마을 사랑방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정성길(42)은 중국에서 생산한 의류를 일본에 팔아 돈을 벌었다. 점점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 무역을 중개하는 한국인 자리가 좁아졌다. 사업이 힘을 잃었다. 2020년 대구 수성구 중동에서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돌봄교실의 급식을 조달하는 가맹점을 운영한다. 가맹점 사장일 뿐인데 본사 직원만큼 기업 이미지를 걱정한다.

1998년 우찬규(51)는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 대구지점에서 일했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세상이 뒤집혔다는데, 별달리 느낀 바 없다. 월급은 그대로 나왔다. 8년 일하고 그런 회사를 박찼다. 이런저런 장사를 하며 성공하고 실패했다. 2020년 대구 수성구 시지동에 대형 카페를 개업했다. 대박의 조짐이 보였다.

1998년 상반기 대구 지역 1371개 기업이 부도로 쓰러졌다. 쓰러진 업체 대부분(40.8%) 제조업체였다. 그 대부분은 섬유공장이다.(<연합뉴스> 1998년 8월21일) 생산 기반은 미약해졌다. 20여 년 지나는 동안 대구를 설명하는 단어 목록에서 제조업이나 섬유는 존재감 잃었다. 2020년 대구는 완연한 소비도시다. 무언가 그만두고, 실패하고,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시작한 골목 가게 사장들이 선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도시. 대구에 2월18일(대구 첫 확진자 발생일) 코로나19가 던져졌다.

예약이 없어 비어 있는 김 사장네 3월 예약자 노트. 류우종 기자

예약이 없어 비어 있는 김 사장네 3월 예약자 노트. 류우종 기자

1장. 마지막이어야 할 고깃집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가게 문간에 서서 김병철 사장이 5년 전(2016년) 이 골목 들어오던 첫날 마음가짐을 떠올린다. ‘통삼겹살 무한리필 통큰통삼’. 간판 글자체 하나 결정하는 데도 고민이 많았다. 뷔페 메뉴에 막창도 넣고, 소고기인 우삼겹도 넣었다. 칼집 내 파슬리 뿌려 숙성한 삼겹살은 두툼하다. 그런데도 가격을 최대한 낮췄다. 9900원으로 시작했다. 지난해 비용 감당이 안 돼 1만1400원으로 값을 올리는 데도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1만1900원으로 하려다가 500원을 깎았다. 마지막이어야 할 곳이라서, 절대 실패하면 안 됐다.

도시의 운명과 얽힌 운명

큰돈은 못 남겨도 손님이 몰렸다. 주머니 사정 가벼운 학생들, 외국인, 동성로 가게나 콜센터 노동자들이 주로 찾았다. 골목 안 다른 사장들도 “손님 많은 집”이라고 알아줬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았다. 생활이 안정됐다. 소비의 도시, 자영업자의 도시가 돼버린 대구 바닥에서 마침내 자영업자로 그럭저럭 살아남았다. 2019년 대구 자영업자 비중은 23.1%다. 농민이 자영업자로 포함되는 통계의 한계를 고려해 특별·광역시 7곳만 떼어 보면 대구의 자영업자 비중은 단연 최고 수준이다. 둘째가는 부산(20%)과도 격차가 크다.(경제활동인구조사)

“말하다보니까.” 김병철 사장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눈을 빛낸다. 입가에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이 어린다. “저 살아온 게 대구랑 통한달까.” 가게 놓인 자리마저 예사롭지 않다. “여기는 대구의 종로예요. 일제강점기 때 만든 동네라 건물이 작아서 큰 가게를 열기 어려우니까 죽어 있던 상권인데 대구가 근대 문화유산을 관광 상품화하면서 번성한 거예요. 그 초창기에 우리가 들어왔죠.”

오랜 기간 대구는 광역시 가운데 관광객 선호도가 가장 낮은 도시로 꼽혔다.(대구경북연구원, ‘대구관광 과거와 현재’) 뒤늦게 근대문화유산을 재료 삼아 관광산업에 열을 올렸다. 뒤늦은 대구의 노력에 잘 올라탔다. 도시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얽혀 있다는 게 그 순간만은 다행이었다. 대개 도시를 따라온 운명은 힘겨웠으니.

실패의 기억을 짚어간다. 외환위기 때 대구 제3산업단지에 제법 큰 규모로 경영하던 가족의 섬유공장이 망했다. 기계 대부분과 기계에 딸린 기술자가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그때 섬유 물건 많이 가지고 있던 공장은 고환율 덕에 물건 팔아 돈을 많이 남겼죠. 우리 공장은 운도 없지, 물건 없이 기계랑 설비뿐이었어요. 새로 생산하려 해도 수입 원자재 가격이 반대로 확 올라 있었으니까 부담이 됐고.” 도시에 덮친, 가족도 피해갈 수 없던 난리통에 김 사장도 대학을 그만뒀다.

대구 섬유산업이 저문 시점은 대개 1990년대 초반부터로 본다. 1995년 40년 가까이 대구 섬유산업의 상징이던 제일모직 대구 공장마저 근처 구미로 옮겨갔다. 영세하게 남아 있던 대구 안 공장들도 외환위기로 무더기 도산했다. 지역을 대표하던 중견 건설업체들도 망해 나갔다. 제조업과 건설업 기반이 무너졌다. 진입장벽이 낮은 서비스업 정도가 잔뜩 움츠렸다가 위기 이후 조금씩 고개 들었다.

다른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재산을 굴리거나

성공의 기억도 있다. 외국과 대구를 오가며 섬유 무역업을 벌였다. “히잡을 중동에 팔았는데, 제가 젊고 물량 정리도 잘하니까 좀 돈이 되더라고요. 부모님도 다 제 사업으로 모여서 가업이 무역 쪽으로 바뀌었어요. 브라질 진출까지 했죠. 점점 값싼 중국산에 도저히 게임이 안 되다가 결국 통관 문제까지 겹쳐서 실패했어요.”

그렇게 이내 다시 실패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방황했다. 아들이 태어났는데 분윳값이 없었다. 3년 정도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다. 회사를 나와 대구 남구 봉덕동에 막창집을 차렸다. 소비도시가 되어버린 대구에서 살아남을 길은 ‘먹는 장사’였다. “그래도 ‘대구에서 막창집 하면 망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 집이 맛은 있었는데….” 그래도 망했다. 마음 다잡고 고기뷔페를 열었다. 마지막이어야 한다, 다짐한 5년 전 그날이다.

그의 도시 대구. 경제지표만 놓고 보면 기묘한 모습이다. 탈제조업·서비스화하는 한국 경제의 미래를 한발 앞서 암시하는 듯도 하다.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1990년대 이후 지속해서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제조업 생산 기반이 무너져서다. 반면 1인당 개인소득은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6위 정도는 한다.(2016년 기준) 대구에 살지만 경북 다른 제조업 도시에서 돈을 벌어오는 노동자, 한국 3대 도시로 명성 떨치던 시절 쌓은 재산을 굴려 소득을 얻는 자산가가 많아서다.(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대구 지역 1인당 GRDP와 개인소득 수준의 차이 분석 및 시사점’)

독특한 풍경을 낳았다. 생산은 미약한 채, 먹고 마시는 소비와 서비스업 쪽으로 경제가 쏠렸다. 대구 최종 수요에서 민간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1.6%로 전국 평균(33.1%)에 견줘 매우 높다.(2013년 기준) 서비스업 중심 경제는 특별한 사회적 장치가 없는 한 대체로 불평등을 키운다.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소득은 비교적 격차가 적지만, 자산을 바탕으로 한 재산소득, 각자도생인 자영업자의 사업소득은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대구 지역 상위 20%의 소득점유율은 73.3%(2015년 기준)로 서울 다음으로 높다. 일자리를 찾아 청년이 도시를 떠난다는 점도 고질적인 문제로 꼽는다.

김병철 대구 ‘통큰통삼’ 사장이 가게가 있는 대구 중구 종로 먹자골목에 서 있다. 방준호 기자

김병철 대구 ‘통큰통삼’ 사장이 가게가 있는 대구 중구 종로 먹자골목에 서 있다. 방준호 기자

확진자는 84명, 매출은 15분의 1

무엇보다 소비가 멎으면 도시 경제 전체가 훅 꺼진다. 누적 확진자 수 6827명(4월16일 0시 기준, 국내 확진자의 64.3%), 코로나19 감염의 한복판이기도 했지만, 전통 서비스업 중심 산업구조 탓에 상처는 더 깊다. “제조업이 저문 뒤 유통이나 도소매업처럼 한때 섬유산업이 잘나가던 때 같이 커졌던 전통 서비스업만 남아 있다. 소비를 ‘올스톱’시키는 코로나19 영향에서 특히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대구 중구는 경산, 청도, 구미, 포항 같은 경북 산업도시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먹고 놀고 하던 곳이니 타격이 더 심하다.”(임규채 대구경북연구원 경제일자리연구실장)

1월20일 코로나19가 국내에 들어온 뒤 김 사장네도 20% 정도 매출이 줄었다. 다시 도시와 함께 실패할 일은 없을 거라고, 지나갈 일이라고 믿었다. 2월17일 가게는 직원들한테 맡겨놓고 8살 아들, 아내와 같이 경주 나들이에 나섰다. 손님 줄어든 김에 아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다. 1박2일 짧은 여행 둘째 날, 대구 첫 확진자(31번 확진자)가 나왔다. 아빠 노릇은 물 건너갔다. 휴대전화만 쳐다봤다. ‘신천지’ ‘지역사회 감염’ ‘새로나 한방병원’… 평생 살아온 대구의 익숙한 동네 이름과 확진자의 동선을 겹쳐가며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게로 돌아왔다. 2월19일 확진자가 11명으로 늘었다. 매출 절반이 날아갔다. 20일 확진자가 34명으로 늘었다. 절반에서 30% 정도 매출이 줄었다. 21일 확진자는 84명이 됐다. 이날 고깃집은 11만1100원을 팔았다. 평소 하루 매출 1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액수보다 충격적인 건 손님 수다. “딱 세 테이블, 잊히지도 않아요.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장사하는데 딱 세 테이블.” 늘 최우선으로 여겼던 손님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열다섯 개 정도 되는 테이블이 가득 차고 그런 채 두세 번은 돌아가야 정상인 가게였다.

골목 모든 가게가 그랬다. BC카드 매출액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구경북연구원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김 사장네 가게가 있는 대구 중구의 2월 넷째주 주요 소비업종 카드 매출은 한 해 전보다 67.8% 줄었다. 3월 마지막 주까지 50% 이상 매출 감소가 이어졌다.

자영업자-아르바이트, 인간적 관계 제도적 관계

뒤늦게 셈해본다. “우리 일하는 친구들 4명 임금을 하루 30만원 정도라고 보면, 각종 공과금을 더하면 문 여는 순간 하루 40만원 가까이 손해 보는 게 돼요. 임대료 하루 10만원 친 돈은 어차피 비용이고요. 버린 고깃값 채솟값 빼고요. 그런데 제가 문을 닫아야 할지 판단이 안 되는 거예요. 언제까지 이럴지를 모르니까.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이 처음에는 3월 초까지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3월 말이 되고 이제는 4월 중순이 되고.”

결국 손해일 그 셈을 그때 정확히 했다고 해도, 김 사장은 쉽게 가게 문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가게 한쪽 누가 먹어줄지 모를 양파를 부지런히 써는 응우옌틴반아잉(23·이하 아잉)이다. 대구 수성대에서 미용을 공부하는 베트남 유학생이다. 가게에서 일한 지 2년 됐다. “사장님이 착하고 우리한테 관심 많이 가져요. 지금 사는 집도 사장님이 구해줬어요. 마스크도 사다주셨어요. 베트남 가야 되나 싶어 불안할 때도 사장님이 남아 있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아잉)

가게 문을 닫는 일은 아잉에게는 한국살이 유일한 벌이를 끊어내는 일이다. 위기 앞에 임금과 노동시간을 줄이기는 했다. 오래 일한 한국인 직원에게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일하는 시간대를 맞춰줄 테니 다른 일을 하나 더 구해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고 괴롭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200만원 정도 받던 아잉은 3월 임금으로 100만원 안팎을 받았다. 인간적인 관계만으로 해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고용 안정 제도로 보호받으며 강하게 얽힌 기업-정규직 관계와 달리, 자영업자-아르바이트 관계는 인간적으로는 몰라도 제도적으로는 한없이 느슨했다. 착한 사장님, 선의가 아니었다면 아잉은 쉽게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위기가 닥치자 그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4월9일 오후 5시, 준비를 마친 가게가 영업을 시작한다. 손님은 들지 않는다. 아잉은 주방에 기대앉아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다시 가게 문간에 서서 김 사장은 평범했던 저녁을 떠올린다. “우스갯소리로 고기뷔페 사장은 운동부 선수들 오면 싫어한다 그러잖아요. 근데 저는 그것도 좋았어요. 당연히 많이 먹는 친구들 오면 남는 건 없어요. 그래도 손님으로 와주는 게 그냥 좋았거든요.” 하루 130명쯤, 어림잡아 지난 5년 가게를 드나든 손님이 15만 명 정도다. “여기 뒤에 베트남 신부님 계신 성당이 있어서 외국분들이 주말이면 찾았어요. 동성로에 요즘 콜센터가 많이 생겼거든요, 콜센터 직원들도 월말 되면 회식으로 많이 오고요. 가게 매장 직원들도 오고요.”

‘그것’밖에 못 벌어도 행복했던 고깃집

그의 방침, 박리다매. 누군가 ‘수익성 낮다, 생산성 낮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 “이 골목 다른 가게 사장들이 제가 버는 돈 들으면 깜짝 놀라긴 해요. 그렇게 손님이 많은데 왜 그것밖에 못 버느냐고요.” 제조업과 달리 산출이 불분명한 서비스업 생산성은 결국 서비스 가격으로 결정된다. 서비스업, 특히 영세 자영업자의 낮은 생산성은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실은 “임금과 서비스 가격이 낮기 때문”(홍민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서비스의 질이 낮아서가 아니다. 뒤집어보면 김 사장이 훌륭한 고기와 서비스를 내놓고도 포기한 수익 덕에 동성로 매장과 콜센터 저임금 노동자들은 싼값에 한 달 쌓인 피로를 덜어냈고, 고달픈 외국인들도 미사 본 뒤 웃으며 고기 먹는 낙으로 일주일을 살았다. ‘저임금’ 그리하여 ‘저비용’이라야만 살 만하게 짜인 사회 안에서 제 수익을 깎은 고기를 내주는 역할을 김 사장이 맡았다. 일종의 사회적 기여다.

그런데도 김 사장과 영세자영업자를 향한 사회적 보호 수준은 가장 낮다. 2000년대 이후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임금노동자, 그 가운데서도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짜였다. 이 판국 기댈 제도 없다는 게 한층 억울할 법한데도 김 사장은 박리다매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저는 손님 보는 맛에 장사하는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열어두면 이 가게는 늘 하는 가게구나 하고 회복이 된 뒤에 가장 먼저 손님들이 올 거예요.” 이뤄질지 알 수 없는 바람을 읊조린다. 거리를 걷던 청년 한 명이 가게로 들어온다. 가게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는다. 돌아오는 금요일 7명 모임을 하려고 한단다. “진짜로 예약해줄지 알 수 없지만 진짜로 예약해준다면” 두 달 만에 예약 노트에 이름 적힐 첫 손님이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 '코로나19 대구 자영업 르포② 보통날을 기다리며'에서 계속됩니다.

닫힌 셔터 문에 코로나19 모형을 합성해 소비 급감으로 어려움에 처한 대구 자영업자의 현실을 표현했다. 그래픽 장광석

닫힌 셔터 문에 코로나19 모형을 합성해 소비 급감으로 어려움에 처한 대구 자영업자의 현실을 표현했다. 그래픽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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