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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구 자영업 르포② 보통날을 기다리며

전국 최대 소비도시 대구의 자영업자들, 모든 것이 어긋나버린 2월18일~4월9일

제1309호
등록 : 2020-04-18 22:43 수정 : 2020-05-0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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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송포차’의 오늘의 메뉴 메뉴판. 손님들이 도재복·양영희 부부 얼굴을 그려줬다. 방준호 기자

복기한다. 허허 웃던 입매가 야무지게 오므라든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처참한 매출액 적힌 포스기(판매시점정보관리기) 앞에 오늘도 김 사장은 학생의 마음으로 선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반성한다. 학생처럼 자주, 아련한 과거나 아득한 미래로 뻗는 부질없는 상념에 잠긴다. 김 사장은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고깃집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2020년 1월20일 인천국제공항, 한국땅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확인됐다(제1308호 참조). 2020년 2월18일 대구, 첫 확진자가 발표됐다. 이후 상황은 전 국민 아는 그대로다. 대구 시내 사람이 사라졌다. 28일, 257㎞. 우연과 우연이 겹친 시공을 건너 그 숱한 도시 가운데 하필 대구였다. 불운이다.

한때 섬유의 도시, 이제는 소비의 도시. 한국 경제 탈제조업·서비스화를 김 사장의 도시는 한발 앞서 겪었다. 여느 선진국 다 같이 겪는 일인데, 여느 선진국과 달리 준비는 부족했다. 서비스화는 세련되지 못했다. 영세 자영업화, 불평등 심화, 생산성 후퇴와 동의어로 쳤다. 섬유공장집 아들에서 장사하는 아빠가 되기까지 김 사장도 도시의 변화를 따라 좌절하고 다시 일어섰다. 그 순간 늘 혼자였다. 어쨌든 균형 맞췄다. 장사라는 것, 내 몫과 직원 몫과 손님 몫을 나누는 일이었는데 대개 내 몫을 줄이고 더 많은 손님이 찾는 가게를 지향했다. 손님이 좋아해 그도 좋았다. 전염병 앞에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손님이 사라졌고, 내 몫을 가장 크게 줄이고 그다음 직원 몫을 줄였다. 도시도, 나라도 나름 애쓰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하필 대구, 까지는 그저 불운임이 명백했는데. 하필 이 시점, 하필 이런 나라에서, 하필 자영업자인 것에는 뭔가 좀더 심장한 의미가 있어 보였다.

복기를 멎는다. 결과는? 실은 따져보지 않아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문을 닫는 게 나았다.” 2월부터 4월까지 가게 문 여는 대신 빚으로 파낸 구멍이 너무 크다. 메우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아득하다. 아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 학생, 그래도 간간이 찾는 손님들 얼굴이 아른댔다. 대구 곳곳, 주점 하는 도 사장, 카페 하는 우 사장, 식자재 납품하는 정 사장… 한숨을 이루는 질료는 조금씩 달라도 성질은 결국 비슷하다.

코로나19가 번졌다. 전국이 흔들렸다. 대구는 좀더 격하게 뒤집어졌다. 급하고 얕은 대책이 수십 개 쏟아졌다. 확진자는 감소했다. 동성로 거리에 사람 기운이 서서히 돋는다. 가게 매출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총선이 치러졌다. 대구 12석 모두 보수 성향 후보가 당선했다. 바뀌어야 했는데, 바뀐 척해봐도, 실은 바뀐 게 없는 혼란한 도시에서 다시 복기한다. 주어는 고쳐 적는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우리는 어떠해야 했는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 '코로나19 대구 자영업 르포① 박리다매의 꿈과 좌절'에서 이어집니다.

대구 중구 종로 먹자골목 풍경. 류우종 기자

2장. 상처받을까봐

벚꽃 진 거리에 라일락꽃이 피었다. 4월8일 대구의 신규 확진자 수는 한 자릿수(9명)로 떨어졌다. 거리에 사람이 돌기 시작한다. 길거리 매대를 편 과일 상인이며 동냥통을 내놓은 노숙인까지 한결같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점, 비닐장갑을 끼고 버스 정차 벨을 누르는 아이 엄마 손이 유난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정도를 빼면 그저 평범한 도시 풍경이다.

감염병은 피했지만 임대료는 그대로

일상을 되찾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믿고, 대구 수성구 시지동 ‘미송포차’도 다시 문 열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 작은 가게, 노부부가 운영한다. 도재복씨가 다리를 절뚝이며 수저통을 채운다. 가게 주인은 아내 양영희씨다. 두 사람 주거니 받거니 정답게 말을 잇는다. 가끔 도씨 이야기가 옆길로 샐라치면 “그런 얘긴 뭐할라꼬” 양씨가 눈 흘긴다. 도씨는 헤헤 웃고 만다. 노인 자영업자인 부부, 큰돈 벌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열두 평 가게에서 생활비, 만일의 병원비를 위한 보험료 정도 건지면 만족했다. 코로나19 앞에 약한 면역부터 걱정해야 했다. 한 달 가게 문을 닫았다. 생활비는 못 벌었고 임대료는 그대로다. 감염을 피했다는 것만은 다행이다.

대구가 한창 잘나가던 1990년대 중반까지 도씨는 “시내에서 술장사를 크게 했다”. 섬유공장 사업가, 건설업자한테 양주나 수입맥주를 팔았다. “하이네켄 요렇게 해가 기본 2만5천원씩 받았다.” 과거 얘기가 썩 기분 좋지만은 않다. “남은 게 없다. 술값을 어음으로 받았는데 기업들 망하고 나면 외상값 다 못 받는 기라. 깡패도 많고 술 먹고 진상 부리는 손님도 많고. 아내도 ‘고생 그만하고 내가 분식집이라도 해서 먹여 살리겠다’고 해서 접었다.” 술기운에 비틀대던 동성로, 화려한 불빛 지나고 보니 모두 거품이다. 남은 건 그때 분양받은 24평 아파트 한 채 정도다. 남은 돈에 빚 2500만원을 얹어 가게를 차렸다. “2000년 6월20일이다.” 20년 된 그 날짜마저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새 출발 한 그 날짜가 지금은 가장 큰 걱정거리다.

이 작은 가게로 버텨온 20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일은 2년 전 도씨가 겪은 교통사고다. 꾸준히 운동해서 몸만은 튼튼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하고 보니 도리가 없었다. 어깨, 다리, 머리 상처 입었다. 걷어붙여 보이는 오른 다리에는 아직 박아놓은 철심이 살갗 아래 불뚝하다. “빼야 할 때가 됐는데 병원비가 걱정”이다.

막내딸 ‘찐이’가 대학을 포기하던 때도 기억난다. 음악 공부를 했는데 졸업 연주회를 준비할 돈을 못 대줘 한 학기 남기고 자퇴했다. 생각해보면 “아까워 죽겠다”. 지금 막내딸은 구미에 있는 작은 전자회사에 다니며 제힘으로 임대아파트를 구했다. 자녀들은 직업을 찾아 뿔뿔이 대구를 떠났다. 큰딸은 경기도 수원에 살고 막내딸은 구미에 산다. ‘직업’은 청년들이 대구를 떠난 가장 흔한 이유(77.2%, 2008~2017년 평균치)다.(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대구지역 청년인구 유출 배경 및 시사점’) 대구에는 일자리가 없다. “장사하든가, 3차 협력사쯤 되는 자동차부품 공장에 들어가든가, 떠나든가 하는 정도로 청년들 선택지는 줄어 있다.”(김동식 대구시의원)

대구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매일 0시 기준) 자료: 대구시, 대구경북연구원 *매출액 감소율은 48개 주요 소비업종 BC카드 매출액 기준

현관 문고리에 마스크를 걸고 돌아간 딸

대구에 첫 확진자가 나온 뒤 며칠은 가게를 그대로 열었다. 자녀들한테 전화가 왔다. “막 사위하고 딸하고 못하게 했다. ‘클 납니다. 면역도 떨어져 있는데 죽을라 캅니꺼’ 이러는 거다.” 부부도 겁이 났다. 2월 말 가게 문을 닫았다. 하루 두세 팀 정도 오는 가게, 이전에도 큰돈은 벌지 못했다. 그래도 임대료 내고, 세금 내고, 보험료 내고 남는 돈은 소중한 생활비로 썼다. 생활이라봐야 부쩍 잦아진 상갓집에 가서 부조하거나 한 철에 옷 한 벌 사는 정도기는 했다. 가게 문을 닫은 사이 집에만 머물며 종일 텔레비전을 봤다. 너무 답답한 날은 가게에 나와 남은 식재료로 음식을 해서 나눠 먹었다. 마스크를 가지고 수원에서 달려온 큰딸 얼굴도 못 봤다. 혹시 딸한테 전염병 옮길까봐 부부가 거부했다. 딸은 현관 문고리에 마스크를 걸고 돌아갔다.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돌아온 가게, 당장 큰 걱정거리는 임대료다. 월세 40만원에 들어온 가게는 주인이 세 차례 바뀌며 어느새 60만원까지 올랐다. 남들 보기 적은 돈이라도 부부에게는 큰돈이다. 사실 그마저 “75만원을 달라고 했는데, ‘우리 나이 먹어서 오래 못한다고 2년만 봐달라’고 해서 깎은 월세다”. 부부가 60만원 월세로 장사할 수 있는 기한은 내년 6월20일까지다. 대구의 거품이 꺼지던 그 시절 덩치 줄여 새로 가게 열던 그날은, 2021년 부부가 이 자리에서마저 장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날이 됐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꽉 막힌다.” 모아놓은 돈이 없다. 이미 나이가 있지만 더 나이 들어 큰돈 들 일이 걱정이다. 두 사람 앞으로 나오는 연금은 합쳐봐야 70만원 정도다. 장사만 오래 해서 국민연금 가입이 늦었다. 가게 없이 생활비를 충당할 자신은 없는데, 임대료를 그만큼 내면서 가게를 이어갈 자신도 없다.

“그냥 동네 주막맹키로” 살아남자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낮춰주는 ‘착한 임대인 운동’을 부부도 알고 있다. “옆집은 50만원 월세 부치니까 20만원 돌려줬다 카이.” 알면서도 감히 건물주한테 깎아달라는 이야기는 못하겠다. “내… 상처받을까봐서.” 상처받을까봐서, 양씨가 좀더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한다. 전적으로 건물주 선의에 기대어 임대료 깎아달라는 얘기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부부는 다른 길을 택하기로 한다. “국민연금 나오면 그걸로 내야지 하고 있다.”

양영희씨가 그저 구웠을 뿐이라는데 튀긴 듯 바삭거리는 장어구이와 사위 주려고 버무린 정구지(부추) 겉절이를 차려낸다. “좀 맵게 됐다.” 괜한 겸손, 간이 적당히 배 맛이 좋다. “집사람이 음식 솜씨가 정말 좋다. 이거 양념도 다 직접 한 거다.” 도씨가 대신 자랑한다. 그나마 먹고살 만큼 가게를 지탱해주는 단골손님이 있는 건 순전히 자랑스러운 양씨 손맛 덕분이다. 손님들은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주고, 두 부부의 그림을 메뉴판에 그려주고, 동네 자잘한 소식을 물어온다. “그냥 동네 주막맹키로” 살아남기 위해, 언제까지 양씨 손맛 하나로 충분할지는 알 수 없다.

정성길 사장이 자신의 가맹점 한쪽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앞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3장. 혼자다

미송포차에서 걸어서 15분, 겉보기 으리으리한 카페 ‘핸즈커피 시지점’이 지난해 말 문 열고 시범운영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영업은 2020년 1월1일부터다. 건물 내부 면적만 170평, 좌석은 200석 정도 된다. 주차 공간도 널찍하다. 은은한 재즈가 감돈다. 우찬규 사장이 카페 문 열던 날을 떠올린다. “자리가 없었어요. 일행은 문 앞에 서 있고, 한 사람은 가게 돌면서 자리 나면 얼른 가방부터 던지고요.” 인테리어 비용만 수억원, 가게 월세만 1천만원이다. 투자금 적지 않았다. 그래서 빚도 끌어썼다. 문 열기까지 마음 졸이며 잠 못 들던 시간이 길었다. ‘오픈발’을 고려하고 생각해봐도 대박이었다. 좀더 예쁘고 편한 카페, 욕심낸 투자가 빛 발했다. 몰려드는 손님이 서비스에 불만을 느낄까 싶어 직원도 더 많이 고용했다. 상주 직원만 9명, 잠깐씩 일 맡는 아르바이트까지 20명이 복작댔다. 한 달 반 만에 코로나19가 터졌다. 3월 매출은 1월에 견줘보면 90% 가까이 줄었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시작됐다.

두 군데서 벌다가 두 군데서 까먹으며

미송포차 같은 작은 가게가 나름의 걱정에 허우적댈 때 규모 있는 핸즈커피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월세 1천만원에 직원 사회보험료만 500만원쯤, 노동시간을 줄였대도 직원 임금만 한 달 1천만원은 가뿐히 넘는다. 비용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우 사장은 대구 수성못 근처에도 카페를 운영한다. “잘될 때야 두 군데서 돈을 번다지만 어려울 때는 적자가 두 배로 나는 거죠.” 일단 2월 중순까지 괜찮았던 매출과 가지고 있던 돈을 합쳐 2월을 버텼다. 3월은? 4월은? 한 달 한 달 지날수록 암담하다. 갓 시작한 가게라 문을 닫기도 어려워 휴업하지 못했다. 휴업을 전제로 주어지는 직원들 휴업수당(고용유지지원금)도 신청할 수 없다. 규모가 상당해 소상공인 대출 대상은 못 된다. 결국 그나마 싸다는 2%대 금리로 다시 빚을 냈다.

이쯤 되고 보니, ‘위기 앞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전국이, 대구가, 김병철 사장과 도재복 사장도 삶의 방향을 뒤바꿨던 1998년 그는 대기업 금융회사 대구지점에서 일하는 3년차 직원이었다. “세상은 힘들다는데 저는 그걸 몰랐어요. 월급 꼬박꼬박 나왔고 사회의 시선 때문에 보너스를 50% 깎은 적은 있는데 그것도 몇 달 뒤에 주더라고요. 근데 이제 알겠어요. 그냥 곧바로 위기를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8년 일하고 회사를 박찼던 2003년, 호기로웠던 그 시절 결정이 새삼 아쉽다. 그때부터 2020년까지 실패하고 때로 성공하며 이런저런 가게를 열었다. “체면 같은 것 내려놓고 악착같이 덤벼야 한다”고 스스로 다졌다. 이제 완연한 장사꾼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기가 던져졌다.

‘기댈 데 없다.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정성길 사장도 위기 앞에 실감한다. 대구 사람은 아니다. 인천에 오래 살았고 중국에 10년쯤 머물렀다. 은근한 연결고리는 있다. 한국, 대구를 중심으로 한 섬유 생산이 몰락한 뒤 중국으로 갔다. 어떻게 보면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긴 새로운 동북아 섬유 무역 질서에 기대어 사업 벌였다. 중국에서 생산한 섬유제품을 일본에 팔아 이익을 거뒀다. 2008년 그의 사업은 정점이었다. ‘어그부츠’가 일본에서 대유행했다. 2011년 곤두박질쳤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소비가 급감했다. 중국인과 일본인이 직접 거래하면서 무역을 중개하는 한국인이 설 자리도 좁아들었다. 중국에서 벌인 새 사업은 자꾸 실패했다. 바닥이 길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7년 매형 권유로 어린이집·초등학교 돌봄교실에 급식을 제공하는 식품 대기업 가맹점을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 대구에 자리잡았다.

사장 혹은 임금노동자

그가 운영하는 가맹점, 100개 어린이집과 학교에 급식을 제공했다. 월매출 1억2천만원 정도 된다. 매출은 상당하지만 유통업 특성상 이익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 불리기는 사장님인데, 본사 직원처럼 일하는 때가 많다. 본사가 내려주는 매출 목표액이 있다. 그동안 팔아온 평균치에 얼마간 금액을 얹은 목표액에 도달해야 본사에서 추가 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비용 빼고 정 사장 몫으로 남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다. 새로운 어린이집을 확보해야 생활을 유지한다. 전단을 찍어 뿌리고, 급식 샘플을 어린이집마다 돌리며 “굽신굽신했다”. 본사는 정 사장 사무실에 놓인 상자가 조금 흐트러져 있는 것까지 간섭했다. 그래도 이해했다. “회사 이미지가 좋아야 우리도 목표액 채우는 거니까.”

그의 자리는 어디인가. 전문가들은 말한다. “프랜차이즈나 가맹점주들은 일의 자율성이나 노동형태를 볼 때 사실상 임금노동자로 보는 것이 맞다. 프랑스나 일본에선 이미 임금노동자로 보는 판례가 있다.”(홍민기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그렇다면 위기의 순간, 본사는 고용주로서 책임져야 한다. 현실에 없는 얘기다. 코로나19 속에 한층 절절히 깨달았다.

2월18일, 그날 이후 어린이집과 돌봄교실에 오는 아이들은 사라졌다. 어린이집 몇 곳 선생님과 아이들이 확진됐다.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대구시는 곧장 어린이집 휴원 조처에 들어갔다. 어린이집 휴원 지원은 있었지만 그의 가맹점까지 챙기지는 않았다. 그나마 긴급 돌봄교실 몇 곳이 남았다. 그래봐야 매출 80%가 날아갔다. “한 달 문 열면 1천만원 넘게 손해난다고 보면 돼요.”(정 사장)

정부 지원은 없고 기댈 곳은 본사뿐이다. 지역 가맹점주 모두 당연히 2월 목표액은 채울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없었다면 목표액에 도달했을 거라고 인정받아 본사에서 추가 장려금 일부를 받은 가맹점도 더러 있다. 정 사장은 그마저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우리 가맹점은 코로나19가 없었어도 목표액을 못 채웠을 거라는데, 그 기준이 제각각이고 결국은 본사랑 친한 가맹점 순서대로 장려금을 나눠준 것 같은 거예요.” 위기의 순간, 마치 직장 상사에게 느끼는 것 같은 야속함을 본사에 느낀다.

본사 직원이 대구에 못 오는 이유

대구 지역 가맹점 사장들이 모여 의논했다. 3월 초 본사에 연락해보기로 했다. ‘이 지경이니 대구로 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가맹점주 대표가 전했다. 절박했으되, 부질없는 짓이었다. ‘본사 직원이 대구에 방문하면 회사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며…’ 감염 위험을 이유로 방문 요청은 거절당했다. 이해해보려 한다. 그래도 생각할수록 야속하다. 대구도, 그도 혼자다.

우찬규 사장이 카페 계산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4장. 오래갈 흉터

저마다 이야기 끝에, 그래도 약간의 위안거리를 하나씩 꼽아보기로 한다. 잠깐은 밝게 웃는다. 이내 침울해진다고 해도.

정성길 사장은 문자를 꺼내 보인다. 긴급경영안정자금 대출 4천만원이 나왔다. “오늘 돈 받으러 갈 거예요. 너무 기뻐요, 지금.” 복권 당첨된 듯 함박 웃는다. 그만큼 운이 좋았던 건 맞다. 특별대출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간 창구, 140번 대기표를 받고 한나절 기다렸다. 상담 직원한테 퇴짜 맞았다. ‘매출액이 너무 크고 직원 수가 5명이라 어렵겠다’고 했다. 다른 가맹점주 조언을 듣고 서류를 더 챙겨 다음날 또 다른 창구에 갔다. 서류 안에 포스트잇도 예쁘게 붙였다. “좋은 직원을 만났는지” 승인이 났다. “저보다 하루 늦은 사장님도 아직 못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된 거죠.” 1.5%, 비교적 낮은 금리다. 어차피 갚아야 할 빚 얻은 게 좋아 웃는다. 지금 당장 경비로 쓸 수 있도록 1만4천유로(약 1870만원)를 즉시 현금 지급하는 나라(독일)도 있을 수 있다는 건(41쪽 ‘신청 이틀 뒤 1870만원이 통장에 꽂혔다’ 기사 참조), 아직 대한민국 대구 땅에선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다. 미래를 저당 잡아 당장 살아남는다면 그나마 행운이다.

4월 첫째주, 그나마 -20% 수준으로

우찬규 사장도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내보인다. “이거 유일하게 제가 받은 건데요.” 다니는 교회에서 100만원을 보냈다는 메시지가 와 있다. 그는 긴급생계자금도, 소상공인 생존자금도 조건이 되지 않아 받지 못했다. “나라에서 복지는 못 받는데 이 시대에 교회 복지.” 웃는다. 큰 도움 되지 않는 액수인 건 맞다. “그래도 잠깐 웃고 위로가 되잖아요. 생활비 한 푼 집에 못 가져다주는 상황인데, 이거라도 어디예요.”

도재복씨는 동사무소에 다녀왔다. “오늘 긴급생계자금 신청하러 갔다 왔다. 근데 서류 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공무원한테 적어달라고 했더니 다 적어줬다.” 두 부부가 챙기기에 자격 조건이 복잡했다. 포기하고 있었다. 손님이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줘서 가까스로 신청했다. 연금으로 임대료 내야 할 처지인데 다만 몇십만원이라도 모르고 놓쳤다면, 아찔하다.

4월10일 대구 신규 확진자 수가 0명을 기록했다. 중구 교동 구제옷 가게에 진홍색, 보라색 등산복들이 내걸렸다. 중앙로역 주변에는 한 상자 3천원짜리 딸기며, 봄꽃 화분이며 내놓은 노점도 자리잡았다. 먹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재난의 시간은 이렇게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다. 전년 동기 대비 -50%를 웃돌던 대구 중구의 주요 소비업종 카드 매출액 감소 폭은 4월 첫째주 그나마 -20% 수준으로 줄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을 상상하는 일은 김병철 사장에게도 큰 위로다. 다만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저한테는 이번 두 달 벌어진 일이 2~3년은 갈 거예요. 당장 지금까지만도 3천만~4천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빚을 져야죠. 그 빚을 메우려면 몇 년은 시간이 필요하겠죠.” 발작처럼 펼쳐진 이 재난은 김 사장에게 한순간 고통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오래갈 흉터다. 손님이 사라졌던 도시, 그 두 달의 흔적을 가장 늦게까지 기억할 사람이 내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김 사장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저녁 6시30분, 김 사장네 가게에 네 테이블 손님이 찼다. 물리적 거리 유지를 위해 한 자리 건너 한 자리씩 앉도록 했다. 손님 수는 예전만 못해도, 마음 한켠 불안이 지워지지 않아도, 고기 굽는 손님 보는 건 역시 뭉클하다. 김 사장이 아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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