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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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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이틀 뒤 1870만원이 통장에 꽂혔다

독일 자영업자·소규모 사업자 대상 즉시지원금,
일단 응급처치로 소생시키고 세부 규칙은 이후 고민
등록 2020-04-19 13:57 수정 2020-05-02 19:29
독일 베를린의 번화가인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액세서리를 파는 디자이너숍도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3명 이상 모임은 금지됐지만, 장을 보거나 산책하러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다.

독일 베를린의 번화가인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액세서리를 파는 디자이너숍도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3명 이상 모임은 금지됐지만, 장을 보거나 산책하러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다.

#1 독일 베를린 식당 사장 한정인(41·가명)씨. 코로나19로 식당 내 영업은 금지되고 포장·배달 주문만 가능하다. 그는 평소 코스 요리만을 제공하며 일주일에 6일 식당 문을 열었다. 지금은 포장이 가능한 단품 메뉴로 바꿔 일주일에 3일만 영업한다. 정상 영업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매출이 90% 이상 줄었다. 건물주는 한 달치 임대료 지급을 유예해줬다. ‘코로나 즉시지원금’을 신청해 사흘 만에 1만4천유로(약 1870만원)를 받았다. 독일에서 이렇게 빨리 일이 처리된 경험은 처음이다. 정말 ‘위급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다. 원한다면 무이자 대출도 가능하지만 일단은 이 지원금으로 버텨볼 생각이다.

#2 베를린 스타트업 이지쿡아시아 대표 이민철(37)씨. 아시아 요리 상자를 배달해주는 회사를 운영한다. 코로나19가 중국과 한국에 퍼질 때 주문 기피 현상이 생겼다. 외출자제령으로 배달음식과 요리 수요가 늘면서 매출이 조금씩 올랐다. 현재 직원은 모두 재택근무 중이며 고용상태 변화는 없다. 그런데도 코로나 즉시지원금으로 총 1만4천유로를 받았다. 베를린상공회의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담당 기관에서도 지원 정보를 매일 알려준다.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면서 회사가 ‘케어’(관리)받는 것을 느꼈다. 외국인인데도 지원에 차별이 없다.

3월25일 패키지 법안, 208조원 추경예산안

코로나19로 독일의 일상이 멈췄다. 마스크를 쓰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방역 대신, 독일은 영업 중지와 이동자제령으로 코로나19 확산에 대처하고 있다.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줄었고, 슈퍼나 약국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일상이 중지되면서 사람도, 돈도 멈췄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자영업자는 다음달 월세부터 걱정이다. 하지만 이런 경제·사회적 우울함 속에서도 버틸 방도가 있다. 독일 정부가 지원하는 ‘코로나 즉시지원금’ 덕분이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일단 숨통이 트인다.

독일에서는 2월 말 이탈리아 방문자들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며 본격적인 지역 전파가 시작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위기’라고 경고했다. 확진자 수는 매일 수천 명씩 늘었다. 개인정보 보호가 엄격해 이동 경로 추적이 불가능하고, 마스크 착용도 일반화돼 있지 않았다. 방법은 사람들 모임을 강제로 제한하는 것밖에 없었다. 1천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점차 500명, 50명, 지금은 3명 이상 모임을 제한했다. 상점 영업도 금지됐다. 동시에 사회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도 빠르게 논의했다.

독일은 3월25일 코로나19 패키지 법안을 마련했다. 총 1560억유로(약 208조1천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안이 통과됐다. 이 중 500억유로(약 66조7천억원)가 ‘즉시지원금’으로 쓰이고 나머지는 의료시스템 지원과 예비비로 사용한다. 코로나19 패키지를 위해 독일은 기본법(헌법)에 명시된 균형예산 원칙까지 포기하기로 했다. 이 규정은 독일 통일 이후 국가 부채가 늘어나자 신규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제한한 것으로, 국가비상사태에서만 예외가 인정된다. 독일이 코로나19 위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일 연방재무장관은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원으로 국민의 건강, 일자리와 기업 그리고 국가를 지키는 조처”라고 강조했다.

즉시지원금은 영업 중지로 직격탄을 맞은 1인 자영업자와 프리랜서, 소규모 사업자에게 지급된다. 독일에서 세금번호를 받고 수익활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코로나19로 인해 재정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내외국인 구분은 없다. 다만 독일 예금계좌로만 즉시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직원 5명 이내 사업자는 최대 9천유로(약 1200만원), 10명 이내 사업자는 최대 1만5천유로(약 2천만원)를 받는다. 명목은 3개월치 운영자금. 향후 3개월간 예상되는 피해를 막으려는 게 목적이다(3개월치 지원금을 한 번에 지원). 독일에서도 유례없는 대규모 현금 지원이다.

피해 입증 서류 없이, ‘클릭’ 동의

독일 16개 주정부도 자체 예산으로 즉시지원금을 따로 마련했다. 지역경제의 특성에 맞게 규모나 지원 대상을 유연하게 적용했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가장 많은 바이에른주는 직원 250명 이내 업체까지 최대 5만유로(약 6700만원)를 지급한다. 반면 베를린시는 직원 5명 이내 업체에만 5천유로(약 650만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다른 도시보다 1인 자영업자, 프리랜서 문화예술인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정부 지원금에 연방정부 지원금을 더해 좀더 포괄적인 지원이 가능해졌다. 한씨와 이씨도 베를린시 지원금 5천유로, 연방정부 지원금 9천유로를 더해 직원 5명 이내 사업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인 1만4천유로를 받았다.

베를린시는 3월27일부터 코로나 즉시지원금을 신청받았다. 절차는 간단하다. 온라인으로 인적사항과 세금번호, 회사정보, 계좌번호를 입력한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를 입증할 서류는 제출하지 않는다. 대신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 지원금 용도 등에 ‘클릭’으로 동의해야 한다. 초기에는 누리집의 서버 과부하로 오류가 생기기도 했지만 1시간 만에 온라인 대기번호 시스템이 적용됐다. 대기번호를 받으면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전자우편을 받는다. 새벽같이 일어나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이씨는 대기번호가 6만 번대여서 신청 순서가 오기까지 나흘을 기다렸다. 이씨는 “누리집에 처음 접속했을 때는 ‘역시 (느린) 독일이다. 정보기술(IT) 시스템은 한국을 따라갈 수 없지’ 했는데, 돈이 곧바로 들어오는 걸 보고 ‘여기가 독일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즉시지원금 지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함이다. 연방정부도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신속성’과 ‘절차 간소화’를 강조했다. 베를린시는 즉시지원금을 1차 지급한 뒤 “역대 가장 빠르고 간소하게 자영업자와 프리랜서 10만 명 이상을 지원했다”면서 “자영업자가 많은 베를린의 특성상 주정부 가운데 가장 빠르게 조처했다”고 밝혔다.

4월9일 기준 베를린에서만 즉시지원금 19만1500건을 처리했다. 지원액은 총 16억유로(약 2조1300억원)에 이른다. 베를린시는 현재 주정부 예산은 모두 소진하고 연방정부 지원금을 집행하고 있다. 여전히 “지원금은 충분하다”고 한다.

베를린 상점마다 붙은 안내문. ‘코로나바이러스로 당분간 문을 닫는다’고 적혀 있다.

베를린 상점마다 붙은 안내문. ‘코로나바이러스로 당분간 문을 닫는다’고 적혀 있다.

생계비 없으면 기본 사회안전망으로

독일에서도 이렇게 큰 규모의 지원이 단기간에 집행된 건 유례가 없다. 그만큼 혼란도 뒤따른다. 먼저 지원금의 사용 범위가 모호하다. 지원금은 빠르게 받았지만 이 돈을 사무실 임대료 등 경비지출(사업을 경영하는 데 발생하는 지출 비용)로만 쓸 수 있다는 조건이 문제가 됐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 프리랜서들은 평소 지출 경비가 적은 직종이고, 집세나 생활비로 쓸 돈이 당장 필요하다. 그런데 경비지출로만 쓸 수 있다고 하니, 정책을 발표할 때 문화예술인 지원을 강조한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기준이다. 경비지출의 정확한 항목도 제시하지 않았다. 한씨도 “지원금을 생계비로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관련 공지가 없어서 걱정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신중히 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완전한 정보로 의문과 불만이 잇따르자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지원금 중 월 1180유로(약 155만원)까지 생활비로 쓸 수 있다고 규정을 바꿨다. 지원금은 수익으로 정산돼 세금 납부 대상이 된다. 그걸로 ‘정리’가 끝날 수도, 사후 점검을 할 수도 있다. 신속한 집행에 집중하다보니 세부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일단 응급조처를 하고, 이후에 명확한 기준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수익활동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자리를 잃어 생계비가 필요한 사람은 기본 사회안전망으로 편입된다. 고용보험을 들지 않았던 자영업자, 프리랜서도 이른바 ‘하르츠4’(Harz IV)라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 2020년 기준 1인 기본수당은 월 432유로(약 57만원). 여기에 집세, 자녀수당 등 상황에 따라 금액이 추가된다. 월세 400유로를 내는 1인 가구 구직자는 월 832유로(약 110만원)를 받는다. 세 살배기 아이가 한 명 있으면 204유로(약 27만원)를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지급 기간은 일반적으로 12개월이지만 경우에 따라 연장할 수 있다. 물론 구직활동 등 직업청의 요구사항을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

독일 정부는 역시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3월1일부터 6월30일까지 하르츠4 승인 절차를 완화하기로 했다. 즉시지원금으로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엄격했던 재산 검증 과정을 단순화하고, 원래 살던 집의 월세 비용을 그대로 지원한다. 대신 자영업자와 프리랜서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자영업자가 실업자가 되면…

독일에는 이처럼 실업자에 대한 ‘기본보장’ 제도가 있다. 수익활동을 하는 자영업자와 프리랜서가 모두 실업자가 되면 국가 부담은 더욱 커진다. 장기적으로 이들의 노동 의지가 약화될 수도 있다. 즉시지원금에 대해 ‘현금을 뿌린다’는 비판이 거의 없는 이유다. 직업과 영업장이 있는 이들을 어떻게든 경제구조 테두리 안에서 보호해야 한다. 긴급수혈로 대형 수술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정부의 강제 영업 중지에 보상하는 의미도 있다. 이는 명백한 정부의 책임이니까.

3개월 뒤 독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원금을 받은 이들이 지금 당장은 실업자가 되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은 중지됐지만, 그들의 일은 계속된다.


베를린(독일)=글·사진 이유진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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