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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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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우리 두 발로… 엄청 큰 과제죠”

낙선자 연쇄 인터뷰① 정의당에 잔인한 시간, 재선에 실패한 이정미 의원
등록 2020-04-25 05:34 수정 2020-05-07 01:34
4월2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이정미 정의당 의원. 뒤편에 고 노회찬 의원, 심상정 당대표와 같이 참석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사진이 있다.

4월2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이정미 정의당 의원. 뒤편에 고 노회찬 의원, 심상정 당대표와 같이 참석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사진이 있다.

180석 ‘공룡 여당’의 탄생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뒤편엔 실패의 원인을 곱씹는 정당과 낙선자들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들어본다. _편집자

“한 번만 하기 없기입니다.”

20대 총선을 치른 4년 전 4월13일, 고 노회찬 의원은 당시 비례대표로 당선이 확정된 이정미 정의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례대표 의원 한 번에 그치지 말고 4년 뒤 지역구에서 꼭 당선되라는 말이었다. 단순히 당선자에게 건네는 덕담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노심(노회찬·심상정)이냐.’ 정의당이 지겹게 받아왔던 이 질문에 답하려면 ‘노심’ 뒤를 잇는 지역구 재선 정치인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구 재선 정치인 배출은 정의당이 진보정당으로서 뿌리내리고 확장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노회찬 의원의 한마디는 이정미 의원에게 ‘숙제’인 동시에 ‘명령’으로 다가왔다. “그다음을 누군가 이어가야 당의 지속가능성, 확장성이 생기잖아요. (노회찬 의원이) 저한테 준 숙제 같은 것, 명령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는 의원이 된 뒤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서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 문제를 제기해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고, 알바인권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등 청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쟁점화했다. 2017년 7월부터 2년간 당대표로 정의당을 이끌기도 했다. 모두 ‘노회찬의 명령’을 현실화하려던 노력이다.

4년이 지난 2020년 4월, 그와 정의당에 ‘잔인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노회찬 의원은 그들 곁에 없다. 당은 거대 양당과 비례위성정당의 틈바구니에서 20대 국회와 똑같은 6석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심상정 당대표가 진보정당 첫 4선 의원이 됐지만, 그와 초선 비례대표 의원 5명의 조합은 4년 전과 다름없이 제자리걸음이다.

지역구에 출마한 20대 국회의원(김종대·여영국·윤소하·이정미·추혜선)을 비롯해 75명의 지역구 후보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심상정 대표가 유일하다. 선거 다음날 심 대표는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고단한 정의당의 길을 함께 개척해온 우리 후보들을 더 많이 당선시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선거 결과에 당 안팎의 비판은 매섭고, 정의당 앞에는 어려운 길이 다시 펼쳐졌다.

순진한 것도 죄라면 죄

4월2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이정미 의원을 만났다. “낙선 인터뷰입니다”라는 말을 건네자, 이 의원은 애써 웃던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천 연수구을에 출마한 그는 정일영 더불어민주당 당선자(41.78% 득표)와 민경욱 미래통합당 후보(39.49%)에 이어 3위(18.38%)로 낙선했다. 당대표 시절인 2018년 말, 9일 동안 단식농성을 하며 이끌어낸 선거법 개정도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지난 3년은 정의당과 이정미 의원 모두 기대(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와 분노(민주당·통합당 비례위성정당 창당), 좌절(총선 결과)로 끊임없이 출렁였던 시간이다.

“집에 돌아가서 혼자 소주 마셨어요, 하하하하.” 4월15일 저녁 출구조사(민경욱 40.0%·정일영 38.9%·이정미 20.7%) 결과를 본 그는, 선거캠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개표방송을 좀 보다가 소주 몇 잔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2017년 6월 인천 송도에 사무실을 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술잔에 비칠 수밖에 없었다. “순진한 것도 죄라는 생각이 들어요. 통합당이 위성정당을 만든다고 엄포를 놓을 때도 저는 두 군데를 믿었어요. 민주당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요. 통합당이 설사 위성정당을 만들더라도 정당법상, 헌법체계를 위반하는 정당을 선관위가 설마 승인하겠냐는 믿음이 있었죠. 통합당이 꼼수를 쓴다고 민주당이 똑같이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순진한 것도 죄라면 죄겠죠.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의원 꿔주기’ 등을 봉쇄해 위성정당을 막는 입법 대안을 ‘4+1 협의체’ 안에서 처리하지 못했던 게 아쉬워요.”

민주당·통합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은 원내교섭단체(20석)를 꿈꿨던 정의당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동시에 거대 정당의 대결 구도로 치른 선거는 그를 비롯해 정의당 지역구 후보들에게도 ‘재앙’이었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단일화가 애초에 불가능한 선거다보니, 진보층 유권자 사이에서 ‘사표론’이 불었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 지역구에 자리잡고 주민들을 만나왔지만, 이 의원은 공천받고 지역구로 내려온 민주당 후보(정일영 당선자)에게 선거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밀렸다.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통합당 민경욱(후보)의 당선은 막아야 한다”며 이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글은 물론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 2중대” “원칙만 고수”

“선거 전에 저를 지지해주던 둑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여론조사 결과가 여론에 다시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계속됐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붙잡고 호소했는지 몰라요. SNS에서 쏟아지는 글에 엄청 힘들었죠. 제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드리지 못하며 사표론을 자극한 것 같아요. 미래통합당이라는 과거 세력을 이번 총선에서 확실히 심판해야겠다는 심리가 주민들의 모든 걸 압도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잘 이겨내고 완주한 건 잘한 일이에요. 정의당이 민주당의 보조 정당은 아니잖아요.”

선거 뒤 정의당은 당 안팎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정의당 ‘왼쪽’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등에서 정의당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민주당 2중대’로 전락했기에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통합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오른쪽’에선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원칙론’만 고수한 정당에 줄 표는 없다고 공격한다. “너희는 어느 편이냐’는 질문에 시달려온 진보정당의 오랜 숙명이지만, 특히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은 제 위치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에 대한 이정미 의원의 답변엔 ‘아쉬움’이 묻어났다.

“정의당이 가장 힘든 게 항상 ‘어떤 편에 설 거냐’라는 선택지만 주어진다는 거예요. 조국 편이냐, 윤석열 편이냐. 저희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해요. ‘공정성과 ‘부모 찬스’를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지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는 분명히 있다’고요. 동시에 검찰개혁이 확실히 돼야 한다는 입장도 보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제3당의 포지션이 힘들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비례대표 후보들의 자격 논란도 정의당을 선거 기간 내내 괴롭혔다. 당내 경선 절차를 거쳤지만 정의당을 오래 지탱해온 이들 대신 정당 경험이 없는 청년·여성이 비례대표 상위 번호를 받자 ‘당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비판이 튀어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비례대표 1번 류호정 당선자의 ‘롤(LOL·온라인게임 리그오브레전드) 대리 게임’ 논란이 불거지고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당 전체가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이 의원은 애초 비례대표 선발 취지가 선거 과정에서 빛이 바랜 상황을 아쉬워했다. “50대 변호사, 남성 중심의 대한민국 국회를 젊은 세대가 들어와서 바꾸어야 하지 않나요. 청년을 당의 액세서리로 세우는 게 아니라 대표하도록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 초반에는 박수를 받았어요. 하지만 비례위성정당이 현실화하면서 정의당이 의석수를 갖지 못하리라는 예측이 나오자 논란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요. 정당 경험이 부족한 20~30대 여성이 (당선 안전권에 들어) 당의 대표 주자가 되는 상황에 답답해하는 분들이 있었죠.”

18.38%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선택

이 의원은 아쉬움을 보이지만 정의당의 초라한 성적표는 외부 환경의 한계뿐만 아니라 당의 역량 한계와도 닿아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범여권이란 말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 같아요. 통합당을 심판하려면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고 기존 정당들과 연합정치를 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연합정치를 하면 설득도 하고 타협도 해야 하니 그만큼 비용이 들겠죠. 민주당이 그런 불편함보다 180석으로 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본 것 같아요.”

그의 인식대로 180석 ‘공룡 여당’은 더는 정의당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이는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위상의 추락과 연결된다. “견제받지 못하는 권력이 영속할 수 있을까요?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어떤 위험 앞에 서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진짜 야당 역할을 하는 정치세력으로 이제 정의당이 서야 할 것 같아요. 대선을 2년 앞두고 민주당은 성과를 내려고 통합당을 될 수 있으면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할 거예요. 그러다보면 민주당은 더 오른쪽으로 갈 수 있죠. 여전히 국회에서 대변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약자나 어려운 이웃들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게 제일 걱정입니다. 민주당이 담아낼 수 없는 목소리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그 위치에 두 발로 서야죠. 우리 두 발로, 남의 다리 빌리지 않고… 엄청 큰 과제죠.”

2만3231, 18.38%. 그가 받은 표의 숫자다. 재선에 도전하는 진보정당 지역구 후보로서는 비교적 많은 표지만 당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 숫자는 ‘낙선자 이정미’의 어깨를 누른다. “사표론 바람 속에서도 저를 선택해주신 건데 너무 고맙고 엄청 부담이 되죠.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분들이 아예 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유, 끝났다’라고 속 시원했을 텐데, 포기할 수 없게 된 거죠.”

선거 한 달 전(3월13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생전 모습도 그를 붙잡는다. “병원에 가면 호흡기 끼셔서 말씀하시기 불편한데도 ‘잘하고 있지. 빨리 가라. 선거운동하러 빨리 가라’고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죠.” ‘알바인권법’을 입법하는 과정에서 ‘우리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 ‘후원금을 보내겠다’고 하던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얼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4년 뒤 다시 ‘노회찬의 명령’

“당선됐다면 무엇을 하고 싶었냐”는 ‘우문’에 이정미 의원은 “그런 이야기는 지금 제게 의미가 없다. 다만 제가 대변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을 만큼 체력이 좋아지고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그는 ‘노회찬의 명령’을 4년 뒤로 미뤘다며 다시 지역구로 내려가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의원실 한쪽에 생전 노회찬 의원의 사진과, 그의 연설로 유명해진 연두색 ‘6411번 버스’ 모형이 놓여 있었다.

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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