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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산업이 된 역사

사회적 비용 박탈, 부패 커넥션… 낭비의 극한인 무기산업 고발 <어둠의 세계>
등록 2021-02-28 16:16 수정 2021-03-01 00:02

2002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이자 주미대사인 반다르 빈 술탄이 미국 텍사스주 목장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와 가족 오찬은 화기애애했다. 반다르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과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반다르가 타고 온 7500만파운드(약 1170억원)짜리 호화 전용기는 영국 무기업체 BAE시스템스가 역대 최고의 무기 판매 성사에 대한 보답으로 준 ‘선물’이었다. 앞서 1985년 영국과 사우디는 400억파운드(약 62조4천억원) 규모의 무기 거래에 합의했다. 반다르의 계좌에는 10억파운드(약 1조5600억원) 넘는 사례금이 꽂혔다. 앤드루 파인스타인이 쓴 <어둠의 세계>(조아영·이세현 옮김, 오월의봄 펴냄)는 군·산·정 복합체인 세계 무기산업의 검은 내막을 파헤친 2011년 저서다. 한국에는 10년 만에 번역본이 나왔다. 지은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회의원을 지낸 저널리스트이자 비영리단체 ‘코럽션 워치’(부패 감시)의 창립자다. 그는 이 책에서 제1차 세계대전 즈음부터 최근까지 한 세기 동안 세계 전역에서 전쟁이 ‘산업’이 된 역사를 되짚고, 죽음의 비즈니스 인물들을 폭로한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19년 세계 군비 지출 규모를 1조9천억달러(약 2100조원)로 추산한다. 이 중 재래식 무기 거래와 군사서비스 산업 규모만 연간 4천억달러(약 444조원)에 이른다. 돈만 되면 고객을 가리지 않는 무기 거래는 전세계 무역 관련 부패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무기산업은 규제와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돈, 부패, 기만, 죽음으로 이뤄진 그들만의 세계”다. 문제는 천문학적 금액의 뇌물과 부패 커넥션에 그치지 않는다. 앞의 사례를 다시 보자. 반다르가 받은 돈의 일부는 공교롭게도 9·11 테러의 범인 15명 중 2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인에게 흘러들었다. 예상치 못한 ‘역류 현상’이다.

무기산업은 엄청난 사회적 기회비용을 박탈하는 낭비의 극한이기도 하다. 199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외부 위협이 없는데도 영국·독일·이탈리아 등에서 고가의 전투기, 잠수함, 헬기를 사는 데 60억파운드(약 9조4천억원)를 퍼부었다. 고위 정치인과 중개인 등 거래 관련자들은 3억달러의 수수료를 챙겼다. 그로부터 5년 사이 남아공에선 최소 35만 명의 에이즈 환자가 치료약이 없어 목숨을 잃었다.

아프리카·남미·아시아 등 제3세계 빈곤국에서 무력분쟁, 폭력, 조직범죄와 인명 살상이 끊이지 않고, 그 반대편에선 그들에게 무기를 팔아 배를 불리는 집단이 분쟁을 부추기는 현실은 참담함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지은이는 “우리가 보편적 인권·평등·정의를 원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부패한 무기산업이 지금처럼 규제와 감독에서 벗어난 채 계속 번창하도록 놔둬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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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카인드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인플루엔셜 펴냄, 2만2천원

오랫동안 철학 영역이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오늘날 과학에서도 핵심 분야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행동’의 모순은 흥미로운 골칫거리다. 지은이는 끔찍한 전쟁과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연대와 협력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지배권력이 은폐해온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재발견한다.

트로트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장유정 지음, 따비 펴냄, 1만7천원

바야흐로 한국은 ‘트로트 르네상스’ 시대다. 대중음악사에 천착해온 국문학자가 일제강점기 트로트의 뿌리부터 현재까지 100년 동안 ‘웃음과 눈물로 우리를 위로한 노래의 역사’(부제)를 되짚었다. 트로트를 둘러싼 ‘왜색 시비’ 등 편견을 걷어내고 그 생명력에 주목한다. “변신과 포용력이 트로트의 힘이다.”

포유류의 번식-암컷 관점

버지니아 헤이슨·테리 오어 지음, 김미선 옮김, 최진 감수, 뿌리와이파리 펴냄, 2만8천원

하이에나는 보통 수컷의 성기처럼 발달한 음핵을 가지고 있다. 이를 남성중심적 언어인 ‘유사음경’이라 묘사해왔다. ‘수정’ 역시 난자가 ‘비옥하게 된다’는 뜻을 써왔다. 번식생물학은 난자의 역동성에 눈감았다. 젠더중립적 용어를 써서 포유류의 번식 전략과 자연선택을 ‘암컷 관점’에서 살펴본다.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미류 등 지음, 창비 펴냄, 1만5천원

코로나19 발생 초기 라이더들은 소독약을 맞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대신 눌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배달이 늘자 ‘라이더 연봉 1억’ 추측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박정훈). 마스크는 썩지 않고, 세계가 기특해한 총선을 한국은 비닐을 산으로 쌓으며 치러냈다(고금숙). ‘마스크 시대’를 바라보는 중요한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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