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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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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들에게도 대목이 있다

명절 손님들, 세뱃돈으로 비싼 물건 사는 아이들과 생전 처음 본 아주머니
등록 2021-04-24 15:07 수정 2021-04-28 02:14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아버지는 체면이 사람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웬만하면 눈 질끈 감고 모르는 체 넘어가야지 임시 기분에 휩쓸려 살다보면 돈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돈도 젊을 때 벌어야지 늙으면 돈이 안 붙는다고 하십니다. 돈은 버는 재주가 없으면 쓰지 않아야 모이고, 젊어서 한때 무섭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모을 수 있답니다.

사람이 가난하면 돈이 벌어지지 않고 제 발창(발바닥)에 묻어나서 점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돈이 없어 어디서 빌리려면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없는 돈에 뭐라도 사들고 가느라고 돈을 써야 하고, 빌려준다 하더라도 가는 대로 한번에 빌리는 게 아니고 언제 오라고 하면 아무리 바빠도 또 품을 내버리고 돈을 가지러 가느라고 시간을 버린답니다. 그렇게 빌린 돈은 또 이자를 줘야 하니 언제 돈을 벌겠느냐고 합니다. 늘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옳은 것 같아 그대로 따르며 살려고 애썼습니다.

세뱃돈 타기를 기다린 아이들

평창으로 와 가게를 차리고부터는 명절날 시댁에 가지 못했습니다. 남편만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아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걸리고 버스를 타고 미리 갔다 왔습니다. 명절에는 집주인도 다 큰집에 가서 가겟집이 비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어린 딸을 데리고 명절을 보내는 것은 아쉽고 쓸쓸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몸이 편하면 입도 편하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날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눈에 선합니다. 설날이면 춥기는 왜 그리 추운지 벌벌 떨면서 떡방아를 찧고 수수부꾸미를 지지고 여럿이 모여 하하하 호호호 하며 재미있던 때가 새삼 그립습니다.

혼자 있다고 아무것도 준비를 안 했더니 뭐라도 하나 해서 먹을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큰오빠가 친정집에 갔다가 일찍 출근하는 길에 음식을 싸다 주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메밀부치기(부침개)도 많이 보내왔습니다. 이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잘 먹을 수 있구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같습니다.

설날에는 온 시내가 다 문을 닫았습니다. 가게 문을 빼꼼 열어놓고 아이를 데리고 들락거립니다. 아이들이 아줌마 문 열었어요, 하며 아주 반가워합니다. 세뱃돈이 생긴 아이들이 물건을 사고 싶은데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애태우다가 문을 연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옵니다. 아이들은 세뱃돈 타는 설날을 1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사고 싶었던 물건을 마음껏 사갔습니다.

친척이 많은 아이들은 세뱃돈을 많이 벌었다며 평소에 사지 못했던 비싼 물건을 사갔습니다. 어른들도 평소엔 못 사게 하던 물건을 명절에는 공돈이 생겼으니 그냥 사게 아이들을 둡니다. 우리 집은 장난감 전문점이 아니니 운동회 때 팔던 장난감 재고를 다 꺼내 팔았습니다. 팔릴 것 같지 않던 장난감들을 다 팔고 나니 공돈이 생긴 것 같습니다. 평소에 54색 크레파스는 진열품입니다. 아이들이 사달라고 하면 어른들은 조그만 것 하나 쓰면 되지 대문짝 같은 것을 사달라 한다고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해 설에는 54색 크레파스도 여러 개 팔렸습니다. 비싼 물감과 그림 도구도 사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설에 살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미리 맞추기도 합니다. 돈이 생긴 김에 신학기에 쓸 학용품을 사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가게를 차린 첫해 설에 우연히 가게 문을 열었는데 평소보다 많이 팔았습니다. 다음부턴 아예 명절 준비를 공들여 했습니다. 설마다 우리 집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짭짤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빚 받으러 온 사람보다 당당하게

명절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집 집안에는 친척이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고 민폐를 끼치는 유명한 아주머니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설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조카님 잘 있느냐며 놀러 왔다고 합니다. 정초부터 무언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빈대를 잘 붙는다고 해도 제천서 평창까지 찾아오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머니는 우리와 아주 친한 사이 같습니다. 조카네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났답니다. 스스럼없이 조카 돈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우리가 살림 차린 지도 얼마 안 되고 무슨 돈이 있어 빌려드리겠냐며 그냥 놀다 가시라고 했습니다. 점심 대접을 잘해드렸습니다. 아주머니는 해가 지고 막차가 떠나도 가실 생각을 안 합니다. 아이를 업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단칸방인데 자기는 윗목에 자겠다고 합니다. 체면상 아랫목에 주무시라고 했더니 그냥 아랫목을 차지하고 아주 편한 자세로 주무십니다. 다음날도 갈 생각을 안 합니다. 아이를 업고 아무리 동동거려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무슨 빚 받으러 온 사람보다 당당하게 먹고 자고 합니다. 아주머니가 가끔 집을 나가, 혹시 갔나 하고 보면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때가 되면 용케도 들어왔습니다.

사흘이 지나도 갈 생각을 안 합니다. 반갑지 않은 사람과 사니 사흘인데도 많은 세월이 흘러간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이 사흘째 되는 날 명절에 아이를 업고 고생고생해서 번 돈에서 얼마를 주었습니다. 말이 빌려주는 거지 받을 생각 없이 주었습니다. 돈을 보자 떼인 돈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조카 고맙네 하며 일어서서 갔습니다. 돈을 빌리는 것 같은 근성으로 돈을 벌면 큰 부자가 될 것 같습니다. 남편은 옛날부터 아는 사람이지만 나는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그렇게 조카며느리를 찾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정초에 액땜했다고 생각하라

차라리 첫날 얼마를 줘서 보냈으면 편했을 터인데…. 그냥 도둑맞은 셈 치고 돈을 줬는데도 아깝기도 하고 억울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은 정초에 액땜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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