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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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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산다고 하다가 못 사면 창피하다”

제천 군유지에 지은 시부모 집, 땅을 개인에게 불하한다는 말 듣고 돈 마련 위해 백방으로 뛰는데
등록 2021-07-28 15:58 수정 2021-07-29 01:41

살림을 시작하고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항상 넉넉지 못한 살림에 땅을 사고 집을 사느라 짜고 짜고 살았습니다. 땅 사고 집 살 때 돈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값의 3분의 1만 있으면 빚내서 샀습니다. 이자 갚고 원금을 갚기까지 아이들 간식은커녕 우윳값까지 아껴야 했습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 이층집을 지으려 마음먹고 관급 철근과 시멘트를 신청했습니다. 면사무소를 통해 사는 건축자재는 시중 가격보다 월등히 쌌습니다. 이층집 지을 꿈을 꾸며 행복했습니다.

평창의 모든 것을 팔아 제천 집을 살리자

그런데 제천 시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군유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군에서 땅을 개인에게 불하한답니다. 3개월 내로 땅값을 내지 않으면 불하를 우선해서 받을 권리가 사라진답니다. 누군가 싸게 나온 군유지를 사버리면 시댁 식구들은 그대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 집은 남편이 열아홉 살에 직접 설계해 친구들과 벽돌을 찍어서 지은 것입니다.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게 살 만한 집이었습니다.

한 3천 평 되는 밭 한쪽에 200평쯤 터를 넓게 잡아 집을 지었습니다. 집 주위에 대추나무도 있고 향나무도 여러 그루 심어 시시때때로 전지해 모양 있게 키웠습니다. 집 마당 한쪽으로 맑은 지하수가 펑펑 나오는 펌프가 있고 시어머니가 사랑하는 장독대가 정겨움을 더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농사는 뒷전이고 꽃을 좋아하셔서 집을 꽃동산처럼 가꾸었습니다. 여름이면 어디선가 매일 새로운 종의 꽃을 구해다 심었습니다. 뒤꼍에 커다란 산사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서리 맞은 빨간 열매를 약이 된다고 많이 따 먹었습니다.

집부터 짓고 축사나 화장실은 길에서 안 보이는 뒤쪽에 지어서 농삿집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어린 시누이 둘과 시동생 다섯 명의 행복한 보금자리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과 같이 가서 쉼을 누리는 집이었습니다.

집터를 사지 못하면 쫓겨나게 생겼는데, 아무런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시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사셨습니다. 소식을 듣고 태산이 무너질 것 같아 찾아갔을 때 시아버지께서 술을 많이 드시고 “너 걱정하지 마라.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어떻게든 땅을 사려고 해봐야지 술만 드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돈이 어디서 나나. 괜히 산다고 하다가 못 사면 창피하기만 하다” 하셨습니다. 남편과 나는 완전히 낙심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터전을 잃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애써 일궈낸 사업장과 집을 모두 팔기로 했습니다. 평창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제천 집을 살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논 열다섯 마지기는 농사짓는 동생보고 사라고 했습니다. 동생도 땅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돈이 없답니다. 남편은 돈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목덜미서부터 얼굴이 시뻘게져서 들어와 문지방에 발을 걸치고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몸이 마른 사람한테 생기는 신경성 고혈압이랍니다. 저렇게 애쓰다 사람이 잘못될까봐 은근히 걱정됐습니다. 당분간은 제천 집에서 시댁 식구 다섯, 우리 식구 다섯, 열 식구가 다 모여 살면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조급한 것은 나지, 내 맘대로 짧은 시간에 집이 팔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술에 취해 서류도 안 떼놓은 시아버지

사람이 급해지니 염치도 없어졌습니다. 돈 없다는 동생한테 자꾸만 논을 사라고 졸랐습니다. 너는 땅이 많으니 논도 사고 돈도 어디 구해서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은 가족이 많은데 제천 집을 못 사면 떼거지 나게 생겼다고 떼쓰다시피 했습니다. 돈은 구하지도 못했는데 약속된 시간은 보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도 애쓰니 동생이 논은 살 수가 없다며 빚내서 돈을 빌려줬습니다. 큰올케한테도 돈을 빌렸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신청했던 시멘트와 철근을 다 취소했습니다. 평창 집을 급하게 팔려고 하니 터무니없이 싸게 사려고 합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약속된 날이 다 됐습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지만 집터와 딸린 밭 가격밖에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밭 한 뙈기는 결국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그만 해도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며 제천 집에 들러서 서류 하나만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은 저녁에 오른손 전체를 붕대로 감은 채 돌아왔습니다. 평창에서 제천까지 가다보니 마감 두 시간 전에 군청에 도착하게 되더랍니다. 미리 송학면이라는 곳에 가서 필요한 서류 하나만 떼어달라고 시아버지께 부탁했답니다. 시아버지는 술에 취하셔서 “산다고 하다 못 사면 창피하기만 하다”고 하며 서류를 떼어다놓지 않았더랍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송학면까지 가서 서류를 떼고 다시 군청까지 가 택시에서 내리다가 문짝에 오른손이 끼여 손등 전부가 찢어졌습니다. 피가 철철 흘렀답니다.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러닝셔츠를 벗어 동여매고 가서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답니다.

난감하고 깜깜했던 3개월을 잘 버티고 제천 집 구출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등기장이 나온 날 이 땅을 샀다고 등기를 보여드렸더니 어머니가 “둘째 아들 앞으로 등기를 해주지 네 앞으로 했냐”고 하시더랍니다.

땅 팔아 빚 갚고 나니 평화가

한 달은 왜 그리 빨리 오는지 이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동동거려도 월말이면 물건값 주고, 이자 내기가 힘에 겹습니다. 마음도 몸도 많이 지쳐갑니다. 제천 땅 일부를 잘라 팔아 빚을 갚기로 했습니다. 땅을 파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제천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했습니다. 땅을 살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팔려면 전부 다 팔라고 합니다. 조금 사서 뭣에 쓰겠냐고 합니다. 거의 1년이 다 돼서, 작은 땅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땅이 팔렸습니다.

우리가 땅을 살 때는 고시 가격으로 싸게 샀습니다. 그동안 땅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빚을 갚고 오랜만에 평화가 왔습니다.

전순예 <강원도의 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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