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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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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는 거대 미역이 휘날리고

상농은 땅을 키우고 하농은 풀을 키우고 하하농은 비닐을 키운다
등록 2021-08-15 15:10 수정 2021-08-16 03:09
멀칭 기계를 끄는 쌍두마차.

멀칭 기계를 끄는 쌍두마차.

감자를 키우려면 멀칭은 필수다. 여기서 멀칭이란 풀이 자라지 못하게 두둑 위에 검정 비닐을 씌우는 것을 말한다. 전종휘 농사꾼님은 비닐을 혐오한다 했지만, 비닐 멀칭의 이점은 또 있다. 수분이 마르지 않아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감자가 땅속에서 알아서 자란다. 주말 농부에게는 노 비닐, 노 농사. 비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마을 어르신들도 말씀하셨다. 50~60년씩 농사를 지어온 농부의 말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로 믿고 따라야 한다.

그런데 멀칭은 어떻게 하는 거죠? 우리가 생각한 방법은 이랬다. 돌돌 말린 비닐 심의 구멍에 괭이자루를 끼운다. 비닐의 한쪽 끝을 이랑 끝에 씌우고 흙으로 묻어 고정한 후 괭이자루를 들고 반대쪽 끝으로 걸어간다. 비닐이 돌돌 풀리며 이랑 위에 씌워진다. 오, 그럴듯해. 막상 해보기 전까진 그랬다. 비닐은 이랑의 양쪽 끝만 고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양옆을 일일이 흙으로 덮어 고정해주어야 했다. 게다가 바람이 부니 비닐은 거대 미역처럼 하늘에 펄럭이고, 인간은 온몸을 허우적거리며 미역을 땅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트랙터의 은총을 경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미를 들고 밭을 기어 다니며 일일이 흙을 덮었다. 이랑은 약 30m×25개. 꽤 많이 한 것 같아 돌아보면 한 곳은 몇m 되지 않고, 할 곳을 바라보면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나니, 30년 전 외운 시조가 절로 나왔다.

나중에 유튜브를 찾아보니 프로 농부들은 관리기(손으로 잡고 전·후진이 가능한 작은 동력기)에 멀칭용 액세서리를 부착해 멀칭을 하고 있었다. 그냥 기계를 붙들고 앞으로만 가면 저절로 멀칭이 되는 거였다. 관리기, 멀칭기 등을 찾아보니 어느새 유튜브 알고리즘은 농기계만 추천해준다. 농기계의 끝판왕은 로터리를 치면서(땅을 평평하게 하면서) 고랑을 한 번에 8개를 만들고, 동시에 파종까지 하는 트랙터였다. 이런 첨단 기계의 시대에 우리는 무슨 고생을 한 걸까.

올해는 작년의 고생을 되풀이할 수 없다며 반드시 기계의 힘을 사용하자고 다짐했다. 농기계임대사업소에서 마침 관리기를 무료로 빌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날짜를 딱 맞춰 빌리기가 어렵고, 기계를 밭까지 옮기려면 트럭이 있어야 해서 아쉽지만 포기했다. 남편이 매일 멀칭만 생각하며 고심하다가 수동 멀칭기를 주문했다. 35만원. 수백만원 하는 관리기에 비하면 싸다. 비닐이 씌워지는 원리는 같은데, 수동이다. 즉 인력으로 기계를 끌어야 한다는 것.

결과를 말하자면 올해는 멀칭 지옥 심화편이었다. 유튜브에서 본 바로는 수동이라도 그냥 혼자서 슥 끌고 가면 비닐이 샤샤샥 덮이더만, 우리 밭은 돌이 많고 단단해서 웬만히 힘을 줘서는 기계가 절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쌍두마차처럼 남편과 내가 죽을힘을 다해 멀칭기를 끌었다. 수십 번 육두문자를 뱉으며(이게 참… 저절로 나온다) 때려치우자고, 이놈의 기계 팔아버리자고 하면서 이틀에 걸쳐 멀칭을 마쳤다.

기계가 앞으로 나갔다고 해서 멀칭이 잘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군데군데 비닐이 삐져나와 바람에 펄럭여 또 몇 주에 걸쳐 호미와 삽괭이를 들고 보수해야 했다. 진부의 한 농업사 창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하농은 풀을 키우고 중농은 작물을 키우고 상농은 땅을 키운다.’ 올해는 봄부터 여름까지 주말마다 비가 왔다. 주말마다 비를 맞아가며 비닐을 덮자니, 풀도 아니고 작물도 아닌 비닐을 키우는 우리는 하하농이구나 싶 더라.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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