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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기부하고

이탈리아의 ‘소스페소’… 커피값, 책값 내기 힘든 사람들도 당당하게 누릴 수 있도록
등록 2021-09-04 08:06 수정 2021-09-05 01:22
이탈리아의 커피숍 ‘바’. 사람들이 입식 테이블 방코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탈리아의 커피숍 ‘바’. 사람들이 입식 테이블 방코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비토 아저씨는 오늘도 67번 버스를 타고 바그너 광장 앞으로 나름의 출근을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거르는 법이 없다. 그의 일은 딱 그 200∼300m 근방을 돌며 구걸하는 것이다. 그의 요구는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는 까다로운 손님같이 몹시 구체적이다.

여러 해 전에 처음 그와 마주쳤을 때 몹시 애처로운 눈빛으로 배가 고프다며 손을 내밀기에 약간의 안타까운 마음을 탑재하고 주머니 속에서 2유로짜리 동전을 꺼내어 내밀었다.

2유로 대신에 버거 사주세요

이게 웬걸, 그는 동전은 거절하고 콕 짚어 길 건너 미국에서 물 건너온 M 패스트푸드점을 가리키며 큰 버거 메뉴를 시켜달라고 했다. 순간 나는 “뭐야 이 사람, 진짜 배고픈 게 아니었네” 하며 작은 동정심을 다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타깃은 내가 아니었다. 옆에 같이 있던 내 친구 에마. 착하게 생겨서 거절도 잘 못하는, 한국인이었다면 서울 강남역 등지에서 ‘조상님으로부터 공덕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으시네요’ 소리깨나 듣고 다녔을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마는 사람이 어찌 배만 채우느냐, 먹고 싶은 걸 먹고 살아야지 않겠느냐며 굳이 그 신난 비토 아저씨를 데리고 길 건너 햄버거집에 가서 원하는 메뉴를 시켜주고 뿌듯한 얼굴로 나왔다.

그래 어쩌다 한번 한 끼 대접할 수는 있다 치지만 거의 매일 집 근처에서 마주쳐야 하니 나로서는 고역이다. 더구나 나는 그가 구걸한 돈으로 생필품이 아닌 즉석복권을 사서 긁는 걸 자주 목격했기에 더욱 돈을 줄 생각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메뉴를 대접해줬던 에마는 비토의 공식 인증 주머니가 되어 슈퍼마켓에서 만나면 간단한 장을 봐주기도 하고 종종 밥도 사주는 사이가 돼버렸다. 내가 못되게 생겼는지 에마가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인사만 하고는 슬쩍 사라진다.

세네갈에서 온 마마두는 바그너 광장 앞 벤치에서 책과 간단한 액세서리를 판다. 여러 해 동안 근처 장이 설 때는 그 앞에서, 평일에는 성당 근처에서 물건을 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열심이다. 그렇게 파는 거 세금은 떼는 거냐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최소한 생구걸은 아니니 마음은 마마두를 편들어주고 싶다. 아마 이탈리아에 사는 외국인이자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이 배어 있으리라.

마마두가 파는 책이나 액세서리는 취향에 그다지 맞지 않는지라 구매한 적은 없지만, 근방에 주차할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한국식 “오라이” 느낌으로 도움을 줬던 터라 나도 답례차 그때마다 약간의 사례를 해왔다.

‘언제 밥 한번 먹자’의 이탈리아 버전

그럴 때 내 멘트는 “커피 한 잔 사도 될까요?”이다. 실제로 너랑 나랑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는 뜻이 아니다. 내가 답례로 1~2유로 정도 줘도 되겠느냐를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상황 외에도 ‘커피 한잔하자’는 말은 한국에서의 ‘언제 밥 한번 먹자’에 비해 이곳에서는 실제 상황으로 연결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 일단 이 바그너 광장로부터 100m 안에만 해도 열두 군데 이상의 바(Bar·커피와 음료, 간단한 식사를 파는 곳)가 즐비하다. 식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바 앞에서 건넛집 이웃을 만나면 같이 커피 한잔하게 되는 등, 동전 한 닢으로 해결되는 커피값 덕에 간단히 방코(Banco·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려주는 바로 앞에 서서 마시는 입식 테이블)에서 스몰토크를 나누기에 최적화돼 있다.

한번은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어느 이탈리아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스치듯 본 적이 있다. 독방에 수감된 어느 죄수가 모카포트로 아침에 에스프레소를 내려 먹는 것이었다. 저건 너무 판타지 아닌가 싶어서 같이 보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당연히 죄수들도 커피를 마셔야 하고 모카포트를 지닐 수 있다고 하더라. 이건 기호품의 문제가 아닌 기본 인권과 직결돼 있다며.

그러나 아무리 커피값이 저렴하다고 한들 손에 1유로만이 쥐어져 있다면 커피 한 잔보다는 배를 채울 빵을 사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많다. 그럼 그토록 부르짖는 커피 한 잔의 기본 인권은 어찌 되는 것일까?

‘카페 소스페소’(Caffè Sospeso),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종가인 나폴리에서 시작된 멋진 정책이다. 지금은 나폴리를 넘어 전 이탈리아, 해외로도 소개돼 실행하는 커피숍도 더러 있다고 한다. 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금액을 지불할 때 “한 잔은 소스페소 할게요” 하면 나는 한 잔을 마셨지만 두 잔 값을 내고 바리스타는 그 다른 커피 영수증을 통에 담거나 칠판에 표시해놓는다. 커피값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다. 비토는 늘 하루에 두어 잔씩 이 카페 소스페소를 이용한다고 한다. 마마두는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기에 하루 딱 한 잔만 디카페인으로 카페 소스페소를 쓴다고 했다.

한 잔 값을 더 낸 사람도 크게 생색낼 거 없이 잔잔히 기분 좋고, 커피값을 내기 힘든 사람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한 잔을 요구할 수 있다.

서점에서도 같은 정책을 쓰는 곳들이 있다. 책을 사면서 다른 한 권 값을 더 내고 맡겨놓는 것이다. 기부되는 책들은 주로 어린이를 위한 도서나 명작이 많다. 여기에는 기부자의 간단한 메시지도 남길 수 있다. 제법 사랑스러운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입구 계산대 쪽에 세워진 카트들이 있다.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 시즌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장을 보며 그 카트에 쓰인 필요 품목들을 사서 직접 기부할 수 있다. 큰맘 먹고 심사숙고한 뒤 대단한 기부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소박하게 작은 이유식 한두 병이라도 할 수 있다. 소소한 나눔이지만 크게 채워지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노숙인이 내민 하와이안 포케 한 그릇

접근성이 좋은 나눔, 가랑비에 옷 젖는 나눔. 은은하게 계속되는 나눔이 이곳 스타일인 것 같다. 세전과 세후의 금액 차이가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내 월급명세서를 보며 높은 세율 덕분에 강제로 나눔에 익숙해진 이유도 있는 것일까도 생각해본다.

며칠 전 바그너 광장 앞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비토가 다가와 깔끔히 포장된 음식 한 그릇을 내민다. 가만 보니 동네에 새로 생긴 식당의 하와이안 포케(샐러드)다.

“날생선 별로 안 좋아해서…. 스시 좋아하면 너 먹을래? 내가 그동안 많이 얻어먹기도 했고.”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웃으며 거절했고 그 음식은 다른 길 건너편 노숙인에게 돌아갔다.

밀라노(이탈리아)=글·사진 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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