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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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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의 고국은 어디인가

지구화 시대 충돌하는 기억들 사이 복잡한 상호작용,
임지현의 <희생자의식 민주주의>
등록 2021-09-04 10:32 수정 2021-09-06 01:57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2021년 8월15일, 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실은 특별수송기가 서울공항에 착륙했다. 유해의 주인은 봉오동전투의 영웅이자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친 홍범도. 이날 열린 봉환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홍범도의 유해를 맞이하는 등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의 예를 갖춰 장군의 ‘고국’ 귀환을 환영했다.

문제는 과연 대한민국을 홍범도의 ‘고국’으로 볼 수 있느냐다. 휴전선 위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홍범도가 평양 출신일 뿐 아니라 빨치산 운동을 한 사회주의자임을 내세워 꾸준히 그의 유해 반환을 요구했다. 비록 국가는 아니지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회도 자신들의 자부심인 홍범도의 유해가 저 멀리 대한민국으로 옮겨지는 것에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두 개의 국가, 그리고 하나의 소수민족이 홍범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셈이다.

임지현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이렇듯 지구화 시대 국경을 넘어 서로 얽히고 또 충돌하는 기억‘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제목만 보고 세계 어느 민족이나 피해의 역사뿐 아니라 가해의 역사 역시 존재한다는, 혹은 우리만 유달리 불행한 역사를 가진 건 아니라는 뻔한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은이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역사’보다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구성하고 재현하는 ‘기억의 역사’”에 주목함으로써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요컨대, 이 책의 관심사는 1931년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화교 학살 사건인 ‘조선 화교 포그롬’(일명 ‘완바오산 사건’) 자체보다는, 이를 일제의 한·중 이간질 획책이라 여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기억이다.

그간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 생산·유통·소비되는 정서적 재화”였던 기억은, 지구화 시대 도래와 함께 마치 사람이나 물자처럼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면, 정보통신기술 발달은 ‘지구적 기억구성체’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 이 새로운 지평 위에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등 그동안 국경에 갇혀 있던 다양한 고통의 기억들이 서로 연결되며 인권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연결이 이전에 없었던 갈등 또한 초래한다는 점이다. 고통에 대한 일종의 전 지구적 표준으로 공인된 홀로코스트와의 비교를 통해 민족의 고통을 인정받으려 경쟁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아우슈비츠가 어느 민족의 ‘성지’인가를 두고 반목하는 이스라엘과 폴란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억의 ‘재영토화’가 활발하게 벌어지는 한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자연재해나 종교적 대속(代贖)으로 치환하는 일본처럼 기억을 ‘탈맥락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피해자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학술대회의 기조연설자로 나선 모습은 ‘지구적 기억공동체’가 부정론자 사이의 연대도 가능케 해줬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족과 민족,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기억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과 연결되며 예상치 못했던 파장을 낳는 ‘기억 전쟁’의 시대를 정면으로 관통하는 이 책은 내용만큼이나 그 소비 방식도 흥미롭다. 수많은 언론사 서평과 지은이 인터뷰는 물론, 인터넷서점의 100자평에 이르는 다양한 반응은 그 자체로 ‘기억 연구’의 중요한 사료다.

유찬근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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