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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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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세상을 벗어난 미래

초가속시대에서 천천히 가는 시대로 바뀌는 세계를 톺아보는 <슬로다운>
등록 2021-09-17 01:40 수정 2021-09-17 01:40

“한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출산율, 즉 여성 한 명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아이의 수는 2018년 현재 0.98까지 떨어졌다.” -<파이낸셜타임스> 2019년 8월28일

영국의 사회지리학자 대니 돌링의 최근 저작 <슬로다운>(원제 Slowdown, 김필규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은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사상 처음으로 1명 아래로 떨어졌다는 보도를 인용하는 것으로 맨 첫 문장을 시작한다. ‘슬로다운’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긴 하지만 전보다 천천히 가는 것”, 즉 변화의 속도가 늦춰지는 현상을 말한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특히 20세기 들어 과학과 의료의 눈부신 발달로 인류의 삶의 방식과 생활환경도 엄청난 속도로 바뀌었다.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될수록,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기술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그렇다. 초연결시대를 구현한 디지털 세상에선 ‘빠르다’라는 말로 모자라 ‘미친 속도감’이 통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앞만 보고 달리던 폭주열차에 제동이 걸렸다.

지은이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슬로다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단적인 사례이자 변화의 근본이 세계적인 인구증가율 감소세다. “지난 160년 동안 지구상 인구는 두 배에서 두 배, 또 거기서 거의 두 배(78억 명)”로 늘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인구 폭증은 오히려 비정상일 만큼 예외적이었다. 같은 기간, 세계의 1인당 역내총생산이 실질가치로 따져도 10배 넘게 증가했지만, 2006년 이후 성장률 최고치는 이전 연도에 미치지 못한다.

말을 이동수단으로 삼던 인류가 지금은 로켓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가 됐지만, 일상에선 “멀리 해외로 이동하기보다 가까운 장소에서 (…) 이 세계에 대해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생태관광”이 주목받는다. 지은이는 “(우리가) 대가속 시대의 정점에서 환호하며 창조적 파괴를 찬양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기만 하고 사회가 경제적으로 더 양극화하고 1인당 소비량이 더 커진다면 우리에게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감속’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징후 자체는 새롭지 않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추세를 방대한 데이터로 실증하고 입체적인 그래프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분석 대상은 가계와 국가의 부채, 산업활동과 탄소배출로 본 기후변화, 일상의 체감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꺾이는 인구증가율과 출산율, 국내총생산(GDP)·임금·집값·주식 같은 경제지표 등을 아우른다.

지은이는 ‘슬로다운’을 긍정적으로 반기며 지속가능한 세계를 꿈꾼다. 슬로다운 이후에 대한 낙관도 감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슬로다운은 우리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당신은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아마도 나는 해변 어딘가에서 모래성을 짓고 있을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가짜 남편 만들기,

1564년 백씨 부인의 생존전략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펴냄, 1만5900원

16세기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한 ‘마르탱 게르 사건’이 있다. 8년간 가출했다 돌아온 남편이 아내와 가족, 주변을 속여오다 진짜 남편이 나타났다. 같은 시기, 조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구의 사족 유유가 집을 나간 4년 뒤 엉뚱한 남자가 남편을 자칭하고, 의문의 살인사건과 고소가 이어진다. 얽히고설킨 욕망의 미시사.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1만3천원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가 인종, 이민자, 여성을 말한 테드(TED) 강연을 그림책으로 재구성했다. 자기다움을 억누르는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실미도의 ‘아이히만’들

안김정애 지음, 모시는사람들 펴냄, 1만3천원

북파 공작원 특수부대 훈련병들이 가혹한 인권유린에 분노해 무장탈영했다가 최후를 맞은 사건이 50주년을 맞았다. 한반도 분단사 연구자가 사건 진상조사 과정에서 면담했던 관계자들의 증언과 수사 기록을 통해 비극적 사건의 배경과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의 실상을 보여준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문학동네 펴냄, 1만4천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의 새 장편소설. 제주4·3 항쟁 당시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문학평론가 신형철)가 펼쳐진다. 작중 주인공이 꾼 꿈과 제주의 하얀 눈송이들을 모티프 삼아 비극적 사건의 치유와 해원을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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