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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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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레닌’이 재간을 키운 곳

식민지 시기 넘치는 재주로 주목받은 박진순을 통해 본 조선 사회주의의 기원
등록 2022-01-11 12:18 수정 2022-01-12 02:01
안경을 쓴 젊은 시절의 박진순. 20대 초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안경을 쓴 젊은 시절의 박진순. 20대 초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박진순(朴鎭順)이라는 사람이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살았던 이다. 1930년대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잡지 <삼천리>에 그 사람의 인물평이 실려 있다. 그는 러시아 거주 재외동포였다. 조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단체 한인사회당 창립에 참여하고, 국제당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유창한 러시아어로 열변을 토해 ‘각국 공산당 거두를 경탄’케 했다고 한다. 재주가 넘치는 사람이며, 조선어 저술도 가능했다. 춘우(春宇)라는 필명으로 경성에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에 시사 문제에 관한 논설을 기고했다. 듣기로는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수로 재임 중이며 변증법과 사회주의 철학에 조예가 깊다고 소개했다.1

시베리아 3대 재사의 한 명

또 다른 잡지 <동광>도 그 사람을 거론했다. 당시에 조선어 신문이 세 종류 간행됐는데, 이들을 통합해 하나의 거대 신문사를 설립한다면 그 간부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겠냐? 이런 질문을 내놓고 인물평을 했다. 편집자는 쓸데없는 공상이라는 비판에 신경이 쓰였나보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하지 말라. 오늘의 지상공론이 내일의 실제가 될는지 누가 아느냐”고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2 뒷날 독립된다면 정부를 구성할 인재들이 누구냐를 묻는다는 뜻이었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각 신문사에 근무하는 조선인 기자 44명이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박진순은 ‘구미 특파원’으로 지목됐다. 뒷날 독립 정부의 외무부 장관감이라고 암시함을 알겠다.

일본 경찰도 주시하고 있었다. 고등경찰이 남긴 첩보 기록에 의하면, 박진순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의 연해주 거주 조선인으로서 ‘매우 재간 있는 청년’이며 ‘동양의 레닌’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3 레닌과 나란히 병칭된 점이 흥미롭다. 혁명운동에 헌신하고, 이론적 재능과 조직적 수완이 남달리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운동의 동지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사회주의운동사에 관한 폭넓은 회고담을 남긴 노년기 김철수의 증언에 따르면 “시베리아 3대 재사(才士)의 하나인데, 그 사람이 나보다 세 살 덜 먹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었다.4 재사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3대 재사’라는 표현은 그 시절 유행이었던 것 같다. ‘동경 3대 재사’라는 표현은 1910년대 일본 도쿄 유학생 사회에서 걸출한 재능으로 인정받은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가 그들이다.5 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서도 ‘3대 재사’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두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박진순이 그에 포함되는 것은 틀림없다. 김철수는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재사라는 말도 부족해서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철수가 태어난 해가 1893년이므로, 박진순은 1896년생으로 알려졌음을 짐작게 한다.

박진순에 대한 세평에 한결같은 점이 있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언론 지면이나 경찰의 비밀사찰 기록에서도 그를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의 걸출한 투사로 지목하고 있다. 이론 능력이 뛰어나고 국제 외교에 공로가 큰 인물이라고들 말한다.

박진순이 1928년 12월22일에 작성한 러시아어 이력서 첫 페이지.

박진순이 1928년 12월22일에 작성한 러시아어 이력서 첫 페이지.

이력서 말미에 쓴 박진순의 친필 서명.

이력서 말미에 쓴 박진순의 친필 서명.

이동휘와 2대에 걸친 유대

하지만 디테일에 문제가 있다. 전해 듣거나 기억에 의존한 정보인 까닭에 불분명하거나 잘못된 점이 뒤섞여 있다. 우선 출생 정보가 그렇다. 경찰이 언급한 ‘함경북도 경원군’은 박진순이 아니라 그 부모의 출신지였다. 아버지의 성관은 고성(固城) 박씨였다. 가문의 항렬표에 따르면 제26세손의 항렬자가 진(鎭)이다. 박진순의 이름도 그에 맞춰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집안은 16세기에 함경북도로 유배된 이래 300년간 뿌리내리고 살았다고 한다. 경원군 경원면 증산동은 고성 박씨의 집성촌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데, 아마도 박진순 집안의 내력과 관련됐을 것이다.

박진순 부모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때는 1890년대였다. 두홉스코이 연흑룡주 총독의 우호적인 이주정책으로 러시아 극동의 조선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절이었다.6 정착한 곳은 수찬이었다. 조선인들이 수청(水淸)이라고 부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으로 32㎞ 떨어진 농촌 지역이었다.

박진순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연도를 1898년이라고 적었다. 부모가 그곳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말하자면 박진순은 재러시아 동포 2세였다. 앞서 살펴본 김철수의 증언과 비교해보면 출생연도에 2년의 차이가 있음이 눈에 띈다. 어느 쪽이 사실일까? 박진순이 기록한 출생연도는 러시아 공문서에서 사용한 것이고, 김철수가 거론한 해는 가까운 동지들 간에 알려진 정보다. 당사자가 직접 거론한 것이니만큼 일단 1898년생 설을 신뢰하기로 한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 등재된 출생연도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려하면, 가까운 동지들의 기억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단언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1남 3녀 가운데 외아들이었다. 남아를 선호하는 당시 풍습을 고려하면 매우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박진순은 그의 집안이 부농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회상했다. 비교적 유족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반일의식이 강렬한 사람이었다. 을사늑약과 일본의 한국 강점에 맞서 의병운동이 고조됐을 때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도 투쟁 열기가 높았다. 박진순의 러시아어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때 ‘조선의병지원단’ 수찬 지부장이었다. 조선의병지원단이란 무엇을 가리킬까? 1908년에 결성된 ‘동의회’(同義會)이거나, 수찬 등지에 조직됐던 ‘국민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단체명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결사일 수도 있겠다.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반일 의병운동의 중심인물인 이동휘의 가까운 친구였다.7 주목되는 정보다. 박진순의 아버지는 이동휘(1873년생)와 동년배로서,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의병운동, 권업회, 사회주의운동으로 이어지는 이동휘의 반일 혁명운동 족적과 궤를 같이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뒷날 성년이 된 아들 박진순도 이동휘와 보조를 같이했음을 보면, 2대에 걸쳐서 형성된 동지적 유대감이 얼마나 강력했을지 짐작이 간다.

러시아의 조선인 학교들

성장기 박진순의 첫 교육은 조선인 학교에서 이뤄졌다. 러시아 영토 안인데도 그랬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6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했다. 8살부터 13살에 이르는 시기였다. 유교 고전과 한문 교육에 한정하는 구식 서당이 아니었다.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 시기 수찬 일대에 산재한 조선인 마을에는 조선어와 한문,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곳곳에 있었다. 보기를 들면 신영동의 신영학교와 합성학교, 사명동의 사명학교, 바들남재 청구학교, 금향동의 일신학교, 인수동 의성학교, 금점동 진명학교, 소성 큰령의 망남학교, 우지미 오봉동의 흥동학교, 청지거우 청지학교, 홍석동 홍석학교 등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진순이 다녔다는 조선인 학교란 이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학교들은 조선 본국에서 1905~1910년 시기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방방곡곡에 설립됐던 신식 초등교육기관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이 학교들의 교육 이념은 저항적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보기를 들면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의 교육 이념은 “자주독립을 창도하여 우리 인민의 지위를 존중케 하며,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게 하여 오늘 우리의 비참한 경계를 면하게 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8 조선의 국권과 자주독립을 전면에 내세우는 조선 민족주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자국 영토에서 외국어로 이뤄지는 교육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인가 없이 설립된 학교는 모두 폐지한다는 방침을 견지했다. 당시 연해주에서 당국의 인허를 받아 합법적으로 설립된 조선인 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한민학교 하나뿐이었다. 박진순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선생님이 없어서 종종 학업이 중단됐다고 한다. 농촌 지대의 비인가 조선인 학교를 단속하려 이따금 경찰이 출동했기 때문이다. 박진순은 조선인 사설 학교의 존재 방식이 반합법적이었다고 술회했다. 법외 학교이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존속할 수 있었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1912년 박진순은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블라디미로·알렉산드롭스크 시에 있는 고등소학교였다. 15살 때였다. 그곳에서 1916년까지 4년 동안 수학했다. 이 학교는 중등 수준의 사범학교였던 것 같다. 졸업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은 것을 보면 말이다. 19살 되던 해에 박진순은 졸업과 동시에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시디미 마을의 조선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됐다.

박진순의 출생지 수찬(한국어 명칭 수청)은,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쪽 32㎞ 지점이다. 오늘날에는 파르티잔스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진순의 출생지 수찬(한국어 명칭 수청)은, 블라디보스토크 동북쪽 32㎞ 지점이다. 오늘날에는 파르티잔스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조선의 젊은 세대, 혁명적 민족주의자

러시아 사범학교 체험은 박진순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박진순은 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조선어와 러시아어 두 가지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라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접했다. 특히 교무주임 야료멘코 선생이 학생들에게 진보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박진순은 그의 훈도 아래 제정 러시아의 저명한 혁명사상가 게르첸과 체르니솁스키의 저작을 탐독했다고 한다. 또 플레하노프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바쿠닌과 크로폿킨 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저술에도 큰 흥미를 느꼈다.

재학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처음으로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8살 되던 1915년에 비밀결사 ‘대한독립단’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조선인 혁명가 ‘Ким-Ин-Нер’(김인열로 읽히지만 실제 누구를 가리키는지 미상)이 조직했는데, 그는 조선의 유명한 의열투사 안중근의 동료였다. 대한독립단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혁명단체였다. 박진순은 당시 혁명적인 민족주의자임을 자임했고, 미국식 민주공화국을 가장 이상적인 국가제도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 시기 ‘신조선의 젊은 세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고 자평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사회주의의 기원은 서유럽과 달리 노동운동 분화 속에서 형성된 게 아니라, 혁명적 민족주의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경향에서 분화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박진순이야말로 그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金世鎔, ‘2백만 재외동포 안위 장래 - 西伯利亞의 조선인 활동’, <삼천리> 1930년 10월, 9쪽
2.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동광> 제29호, 1931년 12월27일, 64쪽
3. ‘高警 제28235호, 上海在住 不逞鮮人의 近況’, 1921년 10월14일,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4.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5. 류시현, <동경삼재>, 산처럼, 2016년
6. 이항준,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한인 이주’,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상)>, 국사편찬위원회, 2008년
7.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ческие сведения в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ую Контрольную Комиссию(이력서, 국제통제위원회 앞). 1928년 12월22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л.76-82об
8. <大東共報> 제69호, 1909년 9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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