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근대란 우연의 산물

서양사학자 이영석을 그리며 읽은 <삶으로서의 역사>
등록 2022-04-14 17:04 수정 2022-04-15 02:23
이영석 지음, 아카넷 펴냄

이영석 지음, 아카넷 펴냄

모든 사람의 삶은 역사다. 그중에서도 역사가의 삶은 조금 특별하다. 역사가는 과거의 일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역사가가 밟아온 궤적 역시 과거로 넘어가 역사가 된다. 그렇기에 역사가의 삶이란 그가 살아간 시대와 연구한 시대가 격렬히 맞부딪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사학사(史學史)이기도 하다.

서양사학자 이영석이 쓴 <삶으로서의 역사>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지은이의 전공인 영국사의 연구 동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충실한 학술사이며 한국 서양사학계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식사회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평생에 걸쳐 ‘역사’와 ‘근대’라는 질문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응답해온 한 연구자의 일대기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공부의 동기, 그리고 방법이다. 1953년 태어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유신세대 이영석에게 공부란 곧 부끄러움이었다. 사회운동에 투신한 동료들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선 공부의 이유가 철저히 현실 비판과 변혁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서양, 그중에서 산업혁명기 영국을 연구 주제로 삼은 것도 한창 산업화가 이뤄지던 한국에 대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마저도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 영국문화원을 통해 몇 달씩 걸려가며 국제우편으로 자료를 대출하거나, 해외 출판사에 개인 계좌를 개설한 소수의 연구자에게 따로 부탁해야만 했다.

이처럼 강한 목적의식에 사로잡혔던 이영석의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조금씩 변화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그를 딱딱한 사회사에서 부드러운 신문화사로 이끌었다. 이영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려낸 삶의 풍경,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계몽사상, 일국(一國)을 넘어선 네트워크로서 영제국 등,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전 시간 노동하며 조금씩 제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수공업 장인”처럼 묵묵하고 성실하게 연구를 확장해갔다.

그렇다고 이영석이 서구 학계의 최신 트렌드를 그저 뒤따라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변방의 연구자라는 자신의 배경을 의식했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기보다는 자산으로 삼았다. 그렇게 주변의 시각으로 영국이라는 중심을 바라봤기에 근대란 보편이나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임을, 아주 최근까지도 비근대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서구 출신의 연구자가 으레 그러하듯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 맹신이나 자국에 대한 국수주의적 추종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서구라는 규준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책의 제목처럼 ‘삶으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2년 2월, 이영석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평소 지방의 교양대학에 재직해 제자가 없다며 아쉬워하던 그였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지식의 민주화’를 기치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연구를 공유해왔던, 그리고 누가 어떤 질문을 하든 진지하고 자세하게 대답해주던 이영석에게 다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서평회 자리에서 수줍게 사인을 부탁했을 때 자신의 책을 어떻게 읽었냐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리고 부족한 서평에 과분한 격려를 해주던 모습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많이 늦었지만, 선생님께서 평안하시길 바란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