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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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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 준 뜻밖의 선물

등록 2022-04-21 14:50 수정 2022-04-22 02:50
큰아들과 밭에 간 날 마주친 4년근 더덕 순. 깜찍하다.

큰아들과 밭에 간 날 마주친 4년근 더덕 순. 깜찍하다.

갈아엎는다. 무능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져 제멋대로인 권력을 보면, 우린 “갈아엎어야 한다”고 한다. 본디 농사에서 나온 말이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이윽고 봄이 닥쳐 새 농사를 지으려는데, 지난가을 추수를 끝낸 그 밭 그대로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을 순 없는 노릇이다. 흙을 이리저리 비비고 위아래를 뒤집어줘야 잘 썩은 퇴비가 흙 사이로 들어가 작물의 영양분이 된다. 또, 그래야 통기성을 높여 충분한 산소를 뿌리에 공급하고 빗물을 땅 깊은 곳으로 내려보낼 수 있다.

산업화사회를 지나 정보화사회에 산다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우리의 언어는 여전히 농경사회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 꽉 막혔던 일이 풀리기 시작하면 ‘물꼬’를 텄다고 하고, 세상살이를 자신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이들을 향해선 ‘제 논에 물대기 한다’고 말한다. 수틀리면 “농사나 지으러 간다”고 하고 농사를 얕잡으면서도 정작 우리 삶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언어는 농사꾼의 입말에 기댄다. 농사를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이제 나도 밭을 갈아엎을 때가 됐다. 밭 아래쪽에 사는 원주민 황씨한테 전화로 부탁했다. 트랙터로 흙을 뒤집은 뒤 관리기로 골을 내어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주는 데 11만원을 주기로 했다. 지난해까진 10만원을 수고비로 건네다 올해는 물가 인상분을 고려해 1만원을 추가했다. 앞서 2주 전엔 큰아들과 함께 읍내에 나가 퇴비 8포대를 사다 밭에 뿌렸다. 완전히 썩지 않아 냄새나는 퇴비를 삽으로 흩뿌리는 대가로 아들에게 최저시급(9160원)에 웃돈을 얹어 시간당 1만원을 줬다. 물론 점심도 공짜로 제공했다. 이렇게 뿌린 퇴비는 ‘로터리친 뒤’(트랙터로 밭갈이한 뒤) 적어도 2주 이상 더 썩혀 양분의 이온화가 충분히 진행돼야 비로소 작물을 심을 수 있다. 서두르다간 모종의 뿌리도 함께 썩는 탓이다.

얼치기 농군이 짓기엔 빌린 밭 500㎡(150여 평)는 너무 넓다. 한여름 뙤약볕엔 더 넓어 보인다. 그래서 4년 전 꾀를 냈다. ①갈아엎는 면적을 줄여보자. ②그래도 땅을 놀리면 안 된다. 게을러 보이니까…. ③옳다구나, 나무나 다년생 작물을 심으면 된다. 이렇게 기가 막힌 3단 논법을 개발한 뒤 실행에 착수했다. 마을 쪽을 향한 가장자리엔 블루베리, 복숭아, 사과, 배, 매실, 대봉감 나무를 한두 그루씩 사다 심었다. 인근에서 주인 없이 자라기에 밭에 옮겨심은 개복숭아 묘목은 쑥쑥 자라 지난해 굵은 열매를 수십 개 맺어 나를 기쁘게 했다. 반대쪽 가장자리엔 다년생 작물인 도라지와 더덕 모종을 심었더니 해마다 예쁜 순을 보여준다. 더덕은 넝쿨식물이라 기대어 타고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고추 지지대 중 긴 것 몇 개를 뿌리 옆에 꽂아줬는데, 날이 더워지면 넝쿨이 무성히 자라 잘도 타고 올라간다. 4년근이니, 올가을엔 몇 개 캐어 먹어볼 요량이다. 게으름이 안겨준 뜻밖의 선물이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농사꾼들: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한겨레> 김완, 전종휘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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