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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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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구, ‘말 없음’을 연기하는 배우

말투, 눈짓, 걸음걸이로 인물을 알게 하는 <나의 해방일지>의 손석구
등록 2022-05-01 01:54 수정 2022-05-01 01:54
JTBC 제공

JTBC 제공

“저는 연기를 진짜같이 하는 분들은 그냥 밥만 먹는 것만 봐도 봐져요(알게 돼요). 연기 진짜 잘하는 분들 캐스팅해서 그것만 찍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어요.” 왓챠 오리지널 단편영화 프로젝트 <언프레임드>에서 <재방송>을 연출한 손석구의 말이다. <재방송>은 배우 손석구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재방송>을 보고 있으면, 손석구가 그간 해온 연기도 함께 보인다. 그리고 사람 손석구가 바라는 관계와 삶도 함께 보이는 것 같다. 현재는 보조출연을 주로 하는 ‘변변찮은’ 단역배우 수인(임성재 분)을 수인의 가족은 참 ‘변변하게’ 대한다.

수인의 이모는 동네 사람들에게 ‘배우 하는 조카’라고 소개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심쩍어도 ‘배우’로 안다. 소파에서 늘어지게 낮잠 자는 조카에게 “그렇게 못 자서 어떡하냐”라고 무심한 걱정을 한다. 갑자기 생긴 ‘땜빵’ 보조출연 역할을 하러 가지 않은 아들에게 수인 엄마는 “그런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라며 아들을 밉지 않게 타박한다. 단편영화 <재방송>은 지금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배우와 배우의 작은 일감들을 무겁지 않은 말투로, 그러나 소중하게 다룬다.

배우 손석구의 연기도 그렇다. 말투, 눈짓, 걸음걸이. 몸의 구석구석까지 놓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아 연기하는 배우랄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JTBC)에서 인적사항이라곤 성밖에 알 수 없고 대사도 (4월27일 현재까지 방영된) 6회까지는 한 회에 열 마디 안팎인 것처럼 느껴지는 ‘구씨’는 화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눈을 뗄 수가 없다.

구씨는 왜 어디인지 모르는 곳을 보며 잔만 바꿔가며 안주도 없이 술만 마실까. 왜 언제나 표정이 없을까. 왜 저렇게 터덜터덜 걸을까. 진짜처럼 연기해서일까. 말하지 않아도, 술만 먹는 것만 봐도, 계속 ‘봐지고’, 계속 궁금하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까지도 진짜 같다. 인사도 안 하고 지내다 구씨 집 앞에 찾아온 염미정(김지원 분)에게 ‘왜 왔어?’라고 말로 질문하는 대신 눈을 한 번 깜빡인다. 아 지금 ‘왜 왔나’ 생각하고 있구나, 보는 사람은 알게 된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 “치맥 할래요”라며 구애할 때는 또 굉장히 눈을 많이 깜빡인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받을 때는 눈썹을 위로 올리고 시선은 은근히 옆이나 아래를 향하며 빙긋 미소가 어린다. ‘나 지금 조금 쑥스럽고 계면쩍은데 기분 좋아’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보는 사람은 잘 알게 된다.

가끔 마음속에 순위를 매겨본다. 어떤 순간이 가장 설레는 순간일까. 대놓고 ‘좋아해, 사랑해’ 말하는 순간은 순위 밖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일 때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꼽아본다면, 말없이 염미정의 퇴근 시간에 역 앞에서 기다리는 구씨가 화면에 나타날 때다. 세상 무엇과도 이어지기 싫은 구씨가 역 앞에서 염미정을 기다리는 순간, 둘이 만나 함께 나란히 걷는 순간이 이전의 맥락과 이어져 가장 두근댔다. 말이 넘치는 시대. 말이 없어도, 마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 그 순간을 가장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있어 심장은 오늘도 뛴다.

리담 칼럼니스트 dorisleewall@gmail.com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 1분에 업로드되는 동영상은 500시간, 매일 10억 시간 이상 동영상이 조회된다. 이 통계에 혁혁히 일조하며 ‘관련 동영상’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매일같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저자의 외침! 유혹에 ‘금사빠’가 돼버렸지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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