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새 권위란” 이성계에게 묻다

새 수도 건설 과정을 다룬 장지연의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
등록 2022-05-01 08:51 수정 2022-05-02 02:24
장지연 지음, 너머북스 펴냄

장지연 지음, 너머북스 펴냄

“피플스 하우스?” 2022년 4월24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제안한 새로운 대통령 집무실 이름에 인터넷이 술렁였다. 이제 좀 잦아드나 싶던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논란이, ‘인민의 집’인지 ‘국민의 집’인지도 헷갈리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다시금 타오르는 모양새다. ‘구중궁궐’ 청와대를 떠나 더 열린 공간에서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각계의 우려에 귀를 닫는 독선적인 태도, 어떻게든 5월10일 임기 시작과 함께 청와대를 ‘개방’하겠다는 성급함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오죽하면 당선자가 저렇게 밀어붙이는 건 풍수나 무속 때문이 아니겠냐는 얘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럴 때 만만한 게 역사다. 너도나도 과거를 끌어와 용산 이전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려 한다. 이 사태를 염두에 둔 책은 아니지만, 장지연의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는 조금 다르다. 조선 건국과 함께 한양이라는 새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을 담은 이 책은, 수도 이전 자체보다는 이를 둘러싼 레토릭(수사)에 주목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중국처럼 이민족의 정복이나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날 정권교체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바로 전날까지 존속했던 옛 왕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 만큼 새 왕조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서는 훨씬 섬세하고 치밀한 접근이 필요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공양왕을 옹립했을 때, 고려에서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위는 여전히 태조 왕건이었다. 특히 사실이든 아니든 왕건이 남겼다고 전해지던 태조 유훈은 고려의 정치가라면 자신의 정견을 펼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헌법과도 같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는 곧 태조 유훈을 둘러싼 치열한 해석투쟁이었다. 태조 유훈에 근거해 풍수를 따르고 불교를 중흥하겠다는 공양왕에 맞서, 이성계파 관료들은 태조 유훈의 과감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태조 왕건을 불교와 풍수의 신봉자에서 유교의 수호자로 탈바꿈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역성혁명을 위한 명분을 쌓았던 것이다.

왕건이라는 옛 권위는 조선을 개창한 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가령 이성계가 신료들의 반대에도 무학대사와 함께 천도지를 답사한 건 다분히 왕건과 도선을 의식한 행위였다. 자신의 스승 무학대사에게 고려 건국의 필연성을 상징하는 인물인 도선의 권위를 덧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왕건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왕건을 뛰어넘어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경복궁의 정전(正殿)에 붙인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은 퍽 의미심장하다. 당시까지 정치무대에서 ‘부지런함’의 기준이던 ‘무일’(無逸)은 왕건의 고난과 업적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정도전은 이를 하·상·주 삼대(三代)의 이상군주를 상징하는 ‘근정’으로 교체함으로써 권위의 원천을 전 왕조의 창업주가 아닌, 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보편원리에 두려 했다. 그렇게 정도전이 경복궁에 투영한 성리학적 이상은, 비록 왕자의 난 같은 우여곡절을 겪었을지언정 조선왕조 500년간 면면히 이어졌다.

지은이가 분명히 짚고 넘어갔듯, 조선의 역사를 무식하게 유비해서 현대에 갖다 붙이는 것만큼 시대착오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옛 권위를 해체하기보다는 이를 재해석해 최대한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어내고, 새 권위가 행사되는 공간을 정교하게 구현해내려 고심하던 조선 정치인들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한 울림이 있다. 지금 윤 당선자에게 중요한 것도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자체보다는,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어떻게 새로운 대통령 집무실에 녹여낼지를 설득하는 일일 것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