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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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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닦는 나를 비웃는 그들이 딱하다

반세기를 넘겨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찾아온 저임금 노동자의 일기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등록 2022-08-13 13:12 수정 2022-08-14 01:35
1970년 스웨덴 라벤 오크 셰그렌 출판사의 ‘정치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마이아 에켈뢰브(맨 왼쪽)가 심사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유서가 제공

1970년 스웨덴 라벤 오크 셰그렌 출판사의 ‘정치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마이아 에켈뢰브(맨 왼쪽)가 심사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유서가 제공

그는 6년 초등교육을 마친 뒤 곧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스물두 살에 굴착기 작업자와 결혼해 5남매를 낳았으나 서른아홉에 이혼했다. 청소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며 홀로 어린아이들을 키워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된 일”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면서도 야간학교에 등록해 늦깎이 공부를 했다. 틈만 나면 신문을 보고 책을 읽었으며, 짬짬이 일기에 하루의 일상과 생각을 기록했다. 사회적 지위는 낮았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은 드높았다. 스웨덴의 노동문학가 마이아 에켈뢰브(1918~1989) 이야기다.

마르틴손처럼 굴욕을 견뎌내리라

에켈뢰브가 52살 때 유명 출판사의 소설 공모전에 자신의 일기로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은 책이 출간 52년 만에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이유진 옮김, 교유서가 펴냄, 1만6800원)는 초판이 나온 해에만 6쇄를 찍으며 스웨덴 10대 베스트셀러가 됐고, 스웨덴 노동문학상인 ‘이바르 루유한손 상’(1987)을 받았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도 됐다. 책의 원제는 <청소용 양동이로부터의 보고서(Rapport från en skurhink)>다. 한국어판 제목은 소설 공모전에 응모했던 원고의 제목이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쓴 일기를 간추린 이 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는 말의 모범 같다. 일상의 대부분은 힘겨운 노동과 육아, 지친 삶을 위무하는 독서의 즐거움, 그리고 사회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졌다. 그런 관심은 아이들을 챙기고 여행을 떠난 이웃의 꽃밭에 물을 주는 것을 넘어 전세계의 억압받는 인간에 가닿는다. 난생처음 참가한 시위에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나가라”고 외치는 것과 프랑스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것과 “남아메리카에서 5초마다 어린이 한 명이 굶어 죽는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르지 않다. 진솔한 삶의 기록과 사유가 빚어낸 글은 유려한 시구보다 울림이 깊고 화려한 정치 격문보다 힘이 세다.

“만일 사람마다 삶을 살아갈 힘이 있어야 한다면 자기를 위해 길을 밝혀줄 불빛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내 빛은 오랫동안 작가 하리 마르틴손이었다. 마르틴손은 굴욕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굴욕을 이겨낼 것이다…. 마르틴손은 무기력해지지 않고 가장 비천한 일들을 해냈다. 따라서 나 역시 청소용 양동이에 익사하지 않고 내가 맡은 청소부 일을 해낼 것이다.”(하리 마르틴손은 스웨덴 노동자 작가로, 197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제 청소하러 갈 테고 청소를 마친 다음에는 야간학교에 갈 것”이라는 행복한 기대는 노동과 삶이 하나임을 웅변한다. 그래도 수십 년 만에 다시 시작한 글짓기·수학·사회 과목의 “공부는 참 어렵다.” 한번은 “역사 수업에 가려고 토요일 아침 일찍 서둘렀는데 학생도 선생님도 오지 않았다. 요일을 착각했다. 아마도 학교를 다니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모양이다”라고 한숨을 쉰다.

책의 세계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네

저임금 노동자 가장의 삶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버겁다. 어느 날엔 “아침부터 허리가 쑤셨다. 허리가 밥줄이다 보니 허리가 아플 때마다 겁이 난다. (…) 전에는 가장 고된 일을 먼저 했는데, 지금은 미루고 또 미룬다”고 썼다. 일은 바닥 청소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역할이자 어려운 직업은 엄마로 사는 일 같다. 일종의 책임이 생기고 날마다 무능력을 실감한다. 모성의 행복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래도 계속 일기를 쓴 이유는 “내 삶이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삶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고 믿어서다.

일기가 독백 같은 대화라면 독서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구원이었다. “책을 곁에 둔다면 외롭지 않다. 독방에 갇혀 있어도 고독하지 않다. 책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책과 함께하지 않아도 내면에는 책이 있는 셈이다. 책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삶의 경륜과 공부가 쌓이면서 지은이의 눈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처지와 사회적 계급 구조에 대한 자각,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단지 먹고, 자고, 청소하고, 먹고, 자고, 청소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자신과 자기가 가진 것 외에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교회 설교단과 국회에서 얼마나 좋은 말이 많이 쏟아지던가? 인간은 가장 사악한 존재다.”

하리 마르틴손의 작품을 읽고는 “확실히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시기심이 더 많은데, 가난한 사람은 가장 간단한 일 앞에서도 ‘결핍의 불안’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이런 결핍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모든 것을 과대평가하고 무한히 많은 것을 과소평가한다. 이는 가난의 가장 깊은 비극이다”라고 간파한다. 또 뉴스를 보고는 “소련의 지도자들은 소이탄 형태로 베트남에 떨어지는 마그네슘을 미국에 판매”하며 “평화로운 공존’에 합의”했다고 꼬집는다. 

에켈뢰브는 공적 발언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8년 9월7일 일기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로 시작한다. “요행수를 바라며” 유명 잡지사의 독자 투고면 ‘이 주의 일기’에 원고를 보냈는데 덜컥 글이 실리고 원고료까지 받은 것이다. “오직 지위 높은 귀족, 사회의 엘리트가 쓰고 나는 저 일기들을 읽는데, 무의식적으로 노동자가 신문과 잡지를 통해 발언하는 일은 드물다는 생각”에서 한 투고가 실린 것은 자존감을 북돋고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1968년이 모래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전 새해 전야”에 쓴 일기에는 텔레비전에서 본 ‘과잉사회’에 관한 영화를 떠올리며 “현실과 똑같다”고 했다. “사람들은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버렸다. 그저 새로 사기 위해. 이 드라마는 아파트 쓰레기 환송장치에 얼마나 많은 것이 투기되는지를 목격하는 환경미화원에 관한 것이다. (…) 이 나라에서 필요한 유일한 것은 자본이다.”

내 삶은 그들보다 훨씬 더 넉넉하다

반세기를 넘겨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찾아온 에켈뢰브의 일기가 현시대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처럼 읽히는 것은 신선하고도 씁쓸하다. 풍요가 넘치는 곳에 쓰레기도 넘치고, ‘결핍의 불안’이 깊은 곳에 사회적 돌봄은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의 명문대에서 바닥을 닦는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업 방해’라는 이유로 자식뻘 학생들의 고소에 부닥치는 현실은 부끄럽고 참혹하다. 

에켈뢰브는 ‘1969년 부활절 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살면서 여러 번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딱하게 여겼다. 내가 딱하게 여기고 싶었던 이들은 그들이었다. 그들보다 없이 살아도 내 삶은 그들보다 훨씬, 훨씬 더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딱하게 여긴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삶의 가치를 평가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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