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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가 경기침체에 대응할 수 있을까

스태그플레이션 맞서려 미국은 대규모 정부투자·증세정부가 적극 투자하는 산업정책 부활하는데, 대기업 세금만 깎는 한국 기재부
등록 2022-08-14 13:13 수정 2022-12-09 04:20
고물가 속 기록적인 폭우로 주요 농산물 출하량이 줄어들며 농산물 가격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점쳐진다. 2022년 8월10일 서울의 한 재래시장 모습. 연합뉴스

고물가 속 기록적인 폭우로 주요 농산물 출하량이 줄어들며 농산물 가격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점쳐진다. 2022년 8월10일 서울의 한 재래시장 모습. 연합뉴스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중국의 2분기 역성장으로 경기침체 우려가 확대되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22년 8월8일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7월에도 “인플레이션이 잡히더라도 그 뒤 경기침체가 걱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기침체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경제학자들의 판단은 정부 진단보다 더 어둡다. 한국경제학회가 7월11~25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경제학자 39명 가운데 21명(54%)이 ‘우리나라가 스태그플레이션 초기 진입 단계에 있다’고 답했다. 2명(5.1%)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상당히 진행되는 상태’라고 했다. 10명 가운데 6명이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섰다고 본다.

코로나19가 왜곡한 일자리 풍요

미국도 스태그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들어 1·2분기 연속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보다 줄었다. 8월10일(현지시각) 발표된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같은 달에 견줘 8.5% 올랐다. 6월 상승폭(9.1%)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가격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5.9%로 6월 상승폭과 동일했다. 물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에서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현재 미국에서 나타나는 경기침체 양상은 일반적인 현상과 달라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미국의 7월 실업률은 3.5%로 코로나19 대유행 이전 수준으로 낮아졌다. 비농업 일자리도 전년 같은 달 대비 52만8천 개 늘었다. 미국 정부는 탄탄한 고용시장을 근거로 “경기가 둔화하고는 있지만 침체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일자리 풍요 속 경기침체’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고령화와 코로나19 영향으로 구직활동 자체가 줄었기 때문에 실업률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월7일(현지시각) 기사에서 “코로나19 이후 선진국들 사이에서 이주가 줄었다. 나이 든 노동자들은 코로나19 감염을 피해 일터에 나오지 않고 일부 젊은층도 아이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다”고 말했다.

폭우·폭염이 부추길 ‘빅스텝’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입장에선 고용 상황이 잘 버텨주고 있으니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을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 인베스팅닷컴의 ‘연준 금리 모니터링 도구’를 보면 8월11일 기준 시장 참여자의 72%가 연준이 9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나머지 28%는 0.75%포인트를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예상한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연 2.25~2.5%인데, 이 추세라면 연말에는 3.5~3.75% 수준이 되리라고 전망한다.

현재 한국 기준금리는 연 2.25%로 미국보다 약간 낮다. 2022년 7월 사상 처음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밟은 한국은행은 내부적으로 올해 남은 세 차례 회의(8·10·11월)에서 금리를 0.25%포인트씩 점진적으로 올리는 데 무게를 둔다. 이렇게 되면 연말엔 기준금리가 3%에 도달해 미국과 격차가 벌어진다. 따라서 자본유출 가능성도 커진다. 반면 미국과 속도를 맞춰 금리를 빨리 올릴 경우 가계부채 부실이 터질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분석을 보면 현재 가계의 금융불균형(과도한 부채) 정도를 지수로 나타내면 78.5인데, 1997년 외환위기(52.5)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75.4)보다 크다. 한국은행은 국내 물가 상승 속도를 보면서 금리 인상폭을 결정할 방침이다. 소비자물가는 두 달 연속(6~7월) 6%대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10월께 소비자물가가 정점을 지날 것으로 예상한다. 국제유가가 세계적인 경기침체 우려로 배럴당 100달러 이하로 낮아진 것은 긍정 요인이지만 최근 발생한 국내 폭우·폭염이 농산물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경우 물가 정점이 늦춰질 수도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8월1일 국회에서 “물가가 예상했던 기조에서 벗어나면 빅스텝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고물가는 에너지 가격 폭등, 세계 공급망 불안 등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금리 인상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2년 들어 7월까지 무역수지가 150억달러 적자를 기록한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 기간 수출액은 전년보다 14.7% 늘었는데도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수입액이 25.5% 증가해 적자를 냈다. 특히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무역에서 석 달 연속(5~7월)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8월10일 발간한 ‘최근 대중 무역적자 원인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디스플레이 등 산업구조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원자재·중간재 수입이 증가해 적자가 발생했다”며 “중간재 공급망을 다변화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적자가 악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법인세 낮추는 철 지난 정책만

정부가 내놓은 스태그플레이션 대응책은 이런 산업구조 재편에 관한 고민의 부재를 드러낸다. 기획재정부는 7월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서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과표 단계를 축소해 대기업의 세부담을 줄이겠다고 했다. ‘법인세를 낮추면 투자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논리인데 철 지난 경제학 이론에 기댄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경제학계 원로인 이준구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는 자신의 누리집에 “법인세율 인하가 투자 증가에 기여했다는 연구결과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세가 투자 행위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이론적 평가는 컨센서스(일치된 의견)에 가깝다”고 밝혔다.

기재부는 경제활성화 명목으로 법인세를 포함해 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까지 줄여 5년간 60조원의 세금을 감면할 계획이다. 이런 행보는 최근 미국 상원에서 통과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과 대비된다. 이 법은 친환경 에너지 발전 및 전기차 구매에 세액공제를 늘리고, 재원 마련을 위해 연간 10억달러 이상 수익을 내는 기업에 최소 15% 세율의 법인세를 부과한다. 필요한 곳에 감세하지만 대규모 정부투자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증세하는 방안도 담았다. 세계적 인플레이션이 에너지 위기·공급망 불안 등 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에너지 전환, 전략 산업 육성 등으로 공급 능력을 확충하면 그 결과로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전략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감세와 규제완화 위주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이후 주요국에선 정부가 공급 능력 확충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산업정책이 부활하고 있다”며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일괄 인하는 세계 추세와 맞지 않고 감세하더라도 에너지 전환이나 디지털 전환 등 변화에 맞춰 전략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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