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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품격] 민주당, ‘정체성’ 아니라 ‘정체’가 궁금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대하는 여당의 자세
등록 2020-11-21 11:07 수정 2020-11-22 01:22
공동취재사진

공동취재사진

노무현 정부 전반기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논란이 이는 사안마다 “특검으로 가자”고 했다. 하도 특검이, 특검이… 해서 아예 ‘슈퍼스파이더’(특거미)에게 정치를 맡기라는 조롱을 받았다. 발목잡기이자 무책임의 상징이었다. 최근 여당 지도부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해 “(관련 법안이 있으니) 상임위에 맡기자”고 입이라도 맞춘 듯 ‘상임위 우선론’을 내세우는 걸 보면서 그때 그 시절 ‘특거미 만능론’이 떠올랐다.

혹시 있을지 모를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다른 법안과 충돌하지 않게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잘 논의하자는 뜻이라지만 그럴싸한 핑계만 대는 꼴이다. 시점이나 맥락을 보면 아예 핑계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여론에 떠밀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법안을 발의한 게 11월12일이었다. 당 안팎에서 과잉 입법이니 중복 처벌이니 기다렸다는 듯이 ‘배경음’이 깔렸다. 실제 이 법안을 공동 발의한 의원들조차 법안 내용을 다루려는 방송 출연 요청 등을 고사했다고 한다. 당내 이견이 많고 당론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낙연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가 “쟁점 조정” “상임위 자율권” 등을 언급하며 당론 모으기를 주저하는 동안 초선 장철민 의원이 부랴부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마치 ‘다른 법안 여기 있소’ 흔들듯이 말이다.

더는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국민적 위기의식과 공감대에서 나온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예방과 재발 방지에 방점이 찍혔다. 안전설비 관리 부실,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무책임한 과중 업무, 그로 인한 무리한 노동이 모든 노동현장 사망사고의 원인이다. 그동안 줄초상이 나도 사업주가 벌금 몇십만, 몇백만원 물고 나면 그만이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반복되는 죽음을 막을 수 없으니 ‘일을 시키는 쪽’과 ‘관리·감독 하는 쪽’에서 사고를 막기 위한 책임을 다하라는 뜻을 담았다.

이 법이 만들어지면 사업자나 원청의 경영자, 관리·감독 책임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다는 당사자들의 볼멘소리 외에 사회 전체에 부담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설비와 환경, 노동조건 개선에 드는 비용? 당연히 그거 하라는 법이다. 처벌이 과하다고? 혹시 사고가 생겨도 책임자가 평소 안전 의무를 잘 지켰다는 걸 스스로 입증하면 처벌받지 않는다.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정의당이 1호 법안으로 내놓았고, 이낙연도 대표가 되자마자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제정 의지를 밝혔다. 청와대 청원보다 복잡한 인증·가입 절차 등을 거쳐 10만 명 이상 국회 입법 청원도 진작 이뤄졌다. 법 제정을 당론으로 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당론은 대체 누가 모으나.

지도부는 상임위 핑계, 상임위는 다른 법안 핑계, 의원들은 당내 이견 핑계…, 하염없이 안 할 수 있는 ‘무한 루프’다. 노동 대표성을 가진 의원조차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 좋은 정치 코스프레’는 계속되니 민망하다 못해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차라리 기업 쪽에서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호소하니 처벌 대상과 수위를 조절하자거나 내용을 더 담자거나 빼자거나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설득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때 되면 될 것처럼 하면서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이쯤 되면 민주당의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가 궁금해진다.

지금은 법의 필요 여부를 따질 때가 아니다. 절박하다. 정의당 안과 달리 민주당 안이 담은 ‘50명 미만 사업장 적용 4년 유예’ 조항이 독소조항인지 아닌지 박 터지게 논해야 할 시점이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전례만 봐도, 이 조항대로면 시행 뒤 3년9~10개월까지 아무 변화가 없다가 두어 달 남겨놓고 또 기업 부담을 이유로 더 유예하자는 말이 나올 게 뻔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법안이다. 내용에도 과정에도 ‘치트키’는 절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민주당은 명심하기 바란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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