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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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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륜의 시작은 로맨스였다

자기 옳음에 ‘꽐라’돼 있던 민주당 몰락의 과정
등록 2021-04-11 08:26 수정 2021-04-13 02:01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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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도 더 전, 이 정권의 실세들과 막역히 지내는 한 인사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도 알고 그도 아는 어떤 이가 놀고 있는 게 안타까워 청와대 아무개에게 전화해서 ‘어느 자리는 갈 만한데 스스로는 못하니 좀 챙겨주라’ 했다고 전했다. 아무개는 알았다고 하고 끊었단다. 나는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으며 놀고 있던 어떤 이가 생활고에 시달렸는지 물었다. 돕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변명으로라도 듣는 내 귀를 닦아주고 싶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물론 큰 이권은 없는 자리이고 그이는 그 자리의 조건을 갖췄으며 알아서 지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무개는 그저 대답만 했을 수도 있다. 정작 내가 놀란 점은 내 앞의 인사가 이런 명백한 청탁 사실을 지인 근황 토크에 섞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는 것이다. 늘 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이야기하고 자신도 큰 고초를 겪었으며 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는 이였다. 그래서인가.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너무 쉽게 ‘내부자들’로 대하는 것 같았다.

권력을 잡으면 옳은 처신을 해야 하는데, 옳은 처신을 하기 때문에 권력을 얻었다는 착각을 한다. 마이크(펜)를 잡았으니 옳은 말을 해야 하는 기자들이, 옳은 말을 하기 때문에 마이크(펜)를 쥐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책임과 권한을 크게 혼동하는 것이다.

지난 4·7 재보선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사진)의 막판 ‘읍소’였다. 그는 “‘내로남불’ 자세도 혁파하겠다”며 “개혁의 설계자로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고 단호해지도록 윤리와 행동강령의 기준을 높이겠다”고 했다. 너무 늦었다. 이미 사람들은 민주당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반복해서 알아버렸다. 멀게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서울 흑석동 상가 구매가 알려졌을 때, 가까이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의 청담동 아파트 임대료 인상이 드러났을 때 즉각적으로 나왔어야 하는 말이다. 많은 이가 ‘내로남불’에 주목했으나 나는 ‘개혁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두고두고 목에 걸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들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고 제어해야 한다고 착각하는구나 싶어서다.

실천하라고 했지 설계하라고 했나. 정치공학적으로 몇 명이 머리 맞대어 짜내는 게 개혁인가. 내 편끼리만 옳다고 여기는 일을 밀어붙이는 게 개혁인가. 아주 오래, 많은 사람이, 그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만들어내는 전 과정이 개혁이다. 오죽하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민주당은 너무 쉽게 하려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재난 앞에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아준 표를 자신들이 정의로워서라고 착각했다. 옳음에 ‘꽐라’(술에 취한 상태)됐다. 그리 얻은 의석을 ‘면허증’이라도 되는 양 입맛대로 사용했다. 못하면 언론 탓, 적폐 탓이었다. 급기야 이 정권 안에서 저질러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마저 과거부터 이어져온 부패라고 떠넘겼다.

민주당은 스스로 지나치게 옳아서 망가졌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했고 또래에 견줘 치부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한 시절에는 옳음과 선함의 잣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권력을 갖고도 그런 잣대를 지니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정당한 견제와 비판 장치를 마련하는 데 게을러지거나 그런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조국 내외는 아마 ‘자신들의 능력보다는 훨씬 덜’ 자식 뒷배를 봐주고 ‘훨씬 덜’ 재산을 불렸을 것이다. 김의겸은 상가 하나 집 한 칸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 ‘오랜 전세살이를 멈추기 위한 정도’의 DNA만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시대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각했다. 나는 권력을 탐한 게 아니니까. 옳은 일을 위해 이용하는 거니까. 오래 싸워온 적들과는 다르니까…. 그러나 모든 불륜도 저마다의 시작은 로맨스였다.

국민은 이번 재보선으로 ‘선한’ 의지를 탓한 게 아니다. 그 결과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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