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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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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사랑을 위한 싸움

‘2022년도 예산안’ 통과를 보며 떠올린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의 기억
등록 2021-12-25 01:23 수정 2022-07-19 07:38
2015년 1월 제주 해군기지 내 해군 관사 건립을 반대하며 망루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 한겨레 자료

2015년 1월 제주 해군기지 내 해군 관사 건립을 반대하며 망루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 한겨레 자료

*제목은 최근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묻는 데 대한 한강 작가의 대답을 빌려왔다.

“2022년도 예산안에 대한 수정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땅땅.”

2022년도 예산안이 통과됐다. 올해는 예산안이 법정시한(2021년 12월2일)을 하루 넘겨 12월3일 의결됐다. 올해는 양호한 편. 통상 예산안을 표결하는 날은 여야가 줄다리기하다가 가까스로 타결돼 새벽 3~4시에 본회의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예산안은 워낙 첨예하게 부딪치니 5분씩 하게 돼 있는 찬성·반대 토론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것까지 듣고 본회의를 마치고 흩어지면 이미 해가 떠 있다. 나가는 길에 동료들과 콩나물국밥 한 그릇 먹고,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역방향으로 어깨를 부딪치며 천근만근인 몸으로 퇴근한 날도 많았다.

내가 국회에 들어온 첫해, 2012년의 마지막 날 예산안을 처리할 때도 그랬다. 당시 예산안은 ‘국회선진화법’(법정시한 안에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정부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돼 그 전까지의 국회 증감액 심사가 무효가 됨)으로 바뀌기 전이라, 법정시한을 넘겨 2013년 1월1일 새벽 3시58분 본회의가 열렸다. 원래는 자정을 넘기지 않으려 했으나, 제주 해군기지 예산만 남기고 여야 사이 몇 시간의 줄다리기 끝에 열린 본회의였다.

진짜 전장에 대한 물음, 제주도 강정마을

2012년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이 본격화한 해로, 450년간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자 삶터이던 구럼비를 발파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그보다 몇 년 전,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아직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전 강정이란 조그만 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지역 일간지 보도를 보고 무작정 제주에 내려갔다. 강정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 한가운데 마주 보는 두 개의 마트에 하나는 찬성을 의미하는 태극기가, 다른 하나는 반대를 의미하는 노란 깃발이 걸린 모습에 아찔했다.

군사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국가계획에 동네 마트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싸우다니, 결정권자는 보이지 않고 대신 주민들의 일상적인 공간에 들어앉은 잘못 겨냥된 적대감의 아이러니를 이해하고 싶었다. 당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애초 쓰려던 주제 대신 군사 문제를 국가 간 문제 혹은 일국 내 의사결정권자들의 문제가 아닌 주민들의 목소리를 근거로 한 평화정치학의 문제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쟁을 예방하고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건설되는 해군기지가 오히려 주민들을 갈라치기 하고 갈등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방식이었다.

“제주지검 관계자에게 불법행위 떼쓰기에 대해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겠다. 외부 개입 세력에 대해서는 찬성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측면에서 지원하겠다.”(국정원)

“반대 쪽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쉬운 내용으로 신문광고를 지속해서 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조그만 것이라도 고소·고발해줘야 경찰도 조처가 가능하다. 인신구속 등이 있어야 반대 수위가 낮아진다.”(제주경찰청)

“(젊은층과 장년층의) 분열은 좋은 상황이다. 공세적 법 집행이 필요하다. 이제는 추진 단계이므로 걸림돌은 제거하고 가야 한다.”(제주도 환경부지사)

2008년 9월 제주시 한 식당에서 열린 국정원과 해군, 경찰, 제주도 등의 유관기관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이다. 이 내용은 2009년 1월19일 제주 KBS가 보도했는데, 이후 문재인 정부 들어 구성된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차원에서 보도된 당사자 각각을 조사한 결과,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진술했다.(‘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 조사결과보고서’,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2019년) 공권력은 이렇게 반대 주민에게는 폭력적 방식을, 찬성 주민에게는 물질적 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갈라냈다.

“서귀포시장이 공사한 것처럼 해서 어촌계에 2800만원을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다.”(당시 동장의 진술)

“활동비가 부족해 후원 식당을 했을 때 제주도청 및 서귀포시청 공무원들에게 오라고 해서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당시 해군 담당자의 진술)

이 기시감은 무엇일까? 2010년대지만 자유당 시절을 방불케 하는 수법,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주의를 왜곡했던 금권·관권 정치의 전형적 방식이 이곳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이것이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짜 전장은 어디인가?

망치로 내리쳐서 다친 내 손. 이 사진은 훗날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2019),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도 실렸다. 이보라 제공

망치로 내리쳐서 다친 내 손. 이 사진은 훗날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2019),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도 실렸다. 이보라 제공

민주주의를 오감으로 이해한 구럼비

상호부조나 공적부조가 없고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제주도에서는 그들의 사회관계를 유지해온 가장 큰 버팀목으로 ‘궨당 문화’를 꼽는다. 도민들이 모두 친인척으로 엮여 있다는 의미다. 그런 곳이기에 처음 해군기지 반대주민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시청·도청 앞에서 시위하자, 진압했던 경찰들이 상부의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반대 주민들의 편의를 봐준 일이 있었다. 시위하는 주민이나 이를 막는 경찰이나 모두 궨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자 경찰은 육지 경찰을 제주로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제주도민들은 “정부가 제주를 ‘외인국’ 취급하는 것 같다”고 하며 제주4·3 이래 최대의 인권탄압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 폭력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했다.

논문을 마치고 몇 년 뒤, 2012년 3월 구럼비 발파를 앞둔 시점이 되니 제주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배낭에 옷가지만 대충 넣어서 바로 비행기를 탔다. 마을은 이미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이를 알리는 사이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문자 그대로 전시상황이었다. 그것은 총칼 대신 폭력과 고성이 난무하는 전쟁, 제주를 외인국 취급했던 정부에 의해 자국민(육지 경찰)이 자국민(제주도민)을 공격하는 내전이었다.

모두가 많이 다쳤다. 어느 날은 화약고 앞에서 구럼비 발파를 위해 화약을 반출하는 것을 막아야 해서 팔과 팔을 피브이시(PVC) 파이프로 연결해서 버텼다. 며칠 버틸 것을 준비했는데 며칠씩이나 생각한 우리가 순진했다. 경찰은 지체 없이 망치로 팔이 들어간 PVC 파이프를 내리쳤다. 그 안에서 맞잡은 우리 손들이 피로 뜨끈하고 끈적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간단히 진압된 주민과 활동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연행됐다. 연행되는 경찰차 안에서 폭력의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피에 물든 내 손을 사진 찍어서 동료들에게 보냈는데, 나중에 유치장에서 나오니 그 사진이 인터넷 <한겨레> 메인 화면에 보도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제19대 총선이 있던 그해, 제주도가 고향인 장하나 의원이 당선되자마자 해군기지 전담보좌관을 뽑으려 했고 제주의 원로들이 나를 추천했다고 들었다. 국회에선 해군기지 사업을 막을 방법이 도무지 없을 것 같아서 여러 차례 거절했더니 급기야 예산안 처리까지 딱 1년만이라도 있어달라 했다. 제주 해군기지 사업을 통제할 수단은 건설사업비였고, 그다음 해 2013년 예산안 처리까지만 잘하면 사업 재검토까지 요구할 수 있을 터였다.

반대토론에도 예산안은 전액 반영

나이도 어린데 야당 입장에서, 더구나 다른 부처보다 훨씬 더 철옹성인 국방부를 상대해야 하는 일은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공무원들 만나면 아래위로 쳐다보는 시선부터 견뎌야 했다. 배에 힘주고 ‘다나까’ 화법을 구사하는 연습도 했다. 야당에 자료를 전혀 제출하지 않는 대령, 중령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일도 많았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간이침대에서 생활했더니 잃은 건 척추고 얻은 건 ‘국회귀신’이라는 별명이었다. 해군기지 사업계획, 유관기관 회의 문서, 해군기지 설계도, 시방서(공사에 필요한 재료의 종류와 사용처, 시공 방법 등을 명확하게 기록한 문서), 감리보고서, 예산서, 무기체계, 심지어 미국 의회 자료와 외교전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고서까지 찾아봤다.

결론적으로 크게 두 가지를 알게 됐다. 당시 군사기지에 대한 반발이 심하니 크루즈선박도 드나들 수 있게 하겠다고 해, 국무총리실 소속 ‘크루즈선박 입출항 기술검증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회의록을 국회에서 제출받아 보니, 일부 위원이 “정부가 그 시뮬레이션을 하지 않고 바로 공사를 할 수 있는 그런 데이터를 우리보고 만들어달라고 그러는데…”라고 말해, 정부가 데이터 조작을 요구했음을 내비쳤다. 또 하나의 쟁점은 이 기지가 자국 군용인지 미 군용인지였는데 제주 해군기지는 한국군이 보유하지도 않은 핵추진항공모함(CVN-65급)을 전제로 설계됐고, 설계 적용은 주한미군해군사령관(CNFK)의 요구를 만족하는 수심으로 계획됐다는 것을 해군기지 건설 시방서로 확인했다.

다시 2013년 1월1일 새벽 본회의장, 장하나 의원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포함되어 있는 2013년 예산안에 반대합니다”를 포효하듯 반대토론을 하고 내려왔지만, 결과는 예산이 전액 반영됐다. 실패했다.

깊이 좌절했고 짙은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강정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고향’ ‘땅’이라는 개념이 없는 내게 땅의 귀속감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해줬다. 메트로폴리탄 시민은 어느 땅으로도 이동할 수 있으니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양 잊고 산다. 하지만 땅의 영향은 없는 게 아니라 잊는 거라서 응당 가져야 할, 각자 속한 땅을 가꾸고 지켜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나에겐 연고도 지인도 없는 제주였지만 주민들의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아예 제주에 살면서 주민들 얘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온 어린 학생을 경계하는 게 당연한 주민들과 말이라도 섞기 위해 제주어를 녹음해서 듣고 따라 했고 ‘브로큰 잉글리시’(엉터리 영어) 아닌 ‘브로큰 제주어’로 대화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나

“삼촌(성별과 관계없이 웃어른을 부르는 제주방언)은 구럼비가 어서지면 어떵할 것 같수과?”

“무사 겅한 말을 고람시니? 기지가 들어오면 어떵할 꺼고 안 들어오면 어떵할 껀가? 여기서 사는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주게.”

국가가 경찰과 군대라는 폭력수단을 독점하도록 주권자가 권한을 위임해준 이유는, 외세로부터의 안전을, 내부엔 질서를 부여해 국민이 안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뜻이다. 그런 국가의 폭력이 오히려 주권자를 진압하는 수단으로 쓰여 주민 동의 없이 살던 땅을 파괴하고 땅에 속한 사람들을 갈라낸다면, 그 땅을 지키고 땅을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버텨내는 것이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다. 그렇게 주민, 삼촌들과 구럼비에서 놀고 먹고 울고 웃으며 민주주의를 오감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실패한 2012년은 10년차 보좌관으로서 살게 한 좌표가 됐다. 그리고 이 글은 그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점검하는 시험지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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