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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오빠가 지켜줄 페미니즘이라니

‘자기 부정’을 넘어 ‘자기 주문’에 가까운 어느 페미니스트 정치인의 영입 수락 논리
등록 2021-12-25 13:47 수정 2021-12-26 00:05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2021년 12월20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직속 기구인 새시대준비위원회 환영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2021년 12월20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직속 기구인 새시대준비위원회 환영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미움이 너무 깊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자임해온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국민의힘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으로 놀라운 ‘정치적 멀리뛰기’를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양당 기득권을 비판하며 제3지대의 대선전환추진위원회를 이끌던 그인지라 난데없는 ‘변신’에 많은 이가 어안이 벙벙했다.

남은 시간상 결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현실론을 편 그는 왜 이재명이 아닌 윤석열인지에 대해 “권력형 성범죄를 방조하고 2차 가해를 일삼는 더불어민주당의 재집권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윤석열은 다를까. 영입 전날 윤석열을 만나보니 믿음이 갔다는 게 사실상 그가 밝힌 이유의 전부이다. “여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말에서 포용력을, “(‘n번방 방지법’ 등에 대해)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한 태도에서 유연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 민망하리만치 ‘과장되고도 옹색한’ 의미 부여이다.

2016년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나서고 2018년 ‘페미니스트 시장’을 내걸고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는 등 신지예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갖춘 여성청년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번 영입 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편다. 차별금지법을 하겠다고 해놓고 말을 바꾸는 민주당보다 아예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국민의힘이 더 ‘설득’ 가능성이 있단다. 국민의힘은 성폭력을 막으려는 정당임이 분명하다고도 한다. 청년 정책 말미에 무고죄 처벌 강화를 넣고, 불법촬영물 범죄를 막기 위한 ‘n번방 방지법’을 ‘검열법’이라고 선동한 국민의힘을 얼마 전까지 비판해온 신지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거의 ‘자기 부정’을 넘어 ‘자기 주문’에 가깝다. 아무리 귀 기울여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민주당이 아니라서.

정작 그가 추구해온 가치와 노선에 대해 윤 후보로부터 특별한 약속이나 확답을 받은 바는 없다고 한다. 국민의힘에서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입과 발을 옥죄는 양상이다. 쐐기라도 박듯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당의 기본적인 방침에 위배되는 발언을 하면 ‘제지’하고 ‘교정’할 것”이라 했고, 장예찬 국민의힘 선대위 청년본부장은 “후보가 ‘무고죄 처벌 강화’나 ‘여성가족부 폐지’ ‘탈원전 반대’ 등의 기조를 세우면 ‘잡음’ 내지 않고 ‘순응’할 수 있겠느냐”고 약속을 요구했다. 첫 행보를 시작하기도 전에 들은 단어치고는 고약하다. 제지, 교정, 잡음, 순응…. 페미니스트 정치를 해온 이가 특정 대선 후보의 외연을 넓히는 인사로 영입되며 과연 이런 표현을 듣고 심지어 동의해야 하는지, 많은 이가 모욕감을 느낄 법하다.

신지예는 자신이 국민의힘에 입당한 것도 아니고 캠프(선거대책위원회)에 들어간 것도 아닌 후보 직속의 별도 조직에 참여한 것이라고 한다. 후보에게 당 밖의 다른 목소리를 전하고 잘 설득하고 필요하면 토론하겠단다. 그렇다면 그저 ‘진영을 넘어선’ 자원봉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은 대선 기간 그가 윤 후보를 대면할 기회나 있을까.

정치는 개인기로 하는 게 아니다. 세력이 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뜻을 함께해온 이들 중 누구 하나 그의 선택을 지지하거나 동행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행보를 후원해온 이들은 앞다투어 사과의 말을 남겼고 전날까지 몸담았던 단체와 조직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신지예의 결단은 본인이 감수할 일이다. 나름의 절박함이 있을 것이고, 드러내지 않은 절망도 있었을 것이다. 비판할 수는 있으나 막아설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선택은 ‘페미니즘’도 ‘정치’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누가 ‘허락해서’ 하는 게 아니다. 여성인권은 누가 ‘지켜주는’ 게 아니다. 관습 혁파와 제도 안착은 몇몇 뜻있는 지도자의 배려나 수혜가 아니라 피땀 흘려 쟁취한 것이다. 오빠가 지켜주는 여성 정치는 없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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