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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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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세대? 잘 갈라쳐봅시다

과잉 이상화되어 악으로 취급받는 ‘갈라치기’,
선거란 갈등이 조직돼 합법적으로 표출되도록 하는 경합의 공간
등록 2022-01-11 12:12 수정 2022-01-12 02:01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60여 일 앞두고 한국 정치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어지럽다. 하지만 대선 후보의 말과 행동, 그 가족을 둘러싼 의혹, 당 내부 권력투쟁 등을 단순히 중계하는 정치 보도만 있을 뿐, 한국 정치구조의 심층을 깊이 분석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 중앙대 교수와 국회·청와대를 출입한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이 한국 정치에서의 갈등과 통합, 포퓰리즘 등을 주제로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품격 있는 정치칼럼을 연재한다. ‘신진욱×이세영의 정치 크로스’는 앞으로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진다. _편집자

신진욱의 질문

지금 한국 사회에서 대결정치의 폐해가 크다고들 한다. 사람들을 서로 적으로 돌려서 자기편을 결집하는 이른바 ‘갈라치기’에 대한 비판도 많다. 하지만 사회의 중요한 쟁점을 놓고 다투고 경쟁하는 게 정치다. 그럼 제대로 된 갈라치기란 무엇일까? 지금 한국 정치의 문제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걸까?

이세영의 답

정치 기사에 ‘갈라치기’란 용어의 등장 빈도가 잦다. 선거철의 익숙한 풍경이다. 여당은 야당 후보를 겨냥해 “젠더 갈라치기, 세대 갈라치기를 그만두라”고 윽박지르고, 야당은 여당 후보를 향해 “표를 얻으려 국민을 갈라치지 말라”고 맞받아친다. 갈라치기 논란은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한 2021년 말에도 있었다. ‘이명박은 가둬두고 박근혜만 사면한’ 대통령의 결정을 두고 야당은 “선택적 사면으로 야권 분열을 노린 갈라치기”라고 맹비난했다. 기실 역대 대통령치고 ‘국민을 갈라치기 한다’는 비판을 듣지 않은 이는 드물다. 문 대통령 역시 임기 중반을 넘긴 시점부터 “국민을 적과 동지로 갈라쳐 대중독재를 꾀한다”는 보수 논객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분할해 지배하는 식민지배 기법

갈라치기는 원래 바둑 용어다. 넓게 펼쳐진 상대의 진 중앙에 돌을 놓아 상대의 운신을 제한하는 공격 전술이다. 물론 같은 의미를 가진 정치 용어는 전에도 있었다. ‘분할해 지배한다’는 뜻의 ‘디바이드앤룰’(Divide and Rule)이다. 피지배층 내부의 민족감정·종교·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해 긴장과 갈등을 야기함으로써 통일된 저항행동을 사전에 봉쇄하는 통치술이다. 고대 로마제국부터 현대 제국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통치 기예로 활용됐다. 이런 지배 기법은 식민지뿐 아니라 내치와 조직관리의 영역에서도 빈번히 구사되는데, 집권한 보수 세력이 지역갈등 구도를 조장해 계급·계층 갈등을 억누르는 것, 사용자가 복수노조를 활용해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하려는 시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오랫동안 ‘분할지배’ ‘분리통치’로 옮겨 사용되던 이 말은 국내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갈라치기’란 용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갈라치기를 공식 석상에서 정치적 용법으로 처음 사용한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11월, 단일화 협상을 벌이던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캠프가 단일화 방안으로 대의원 여론조사를 제안하자 “우리 당은 지난 (대선 후보) 경선 후 많은 대의원이 (결과에) 불복하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옳지 않은 불복을 활용해서 당을 ‘갈라치기’ 하겠다는 것이냐”고 받아쳤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말을 대통령 임기 반환점에 즈음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한 오찬 간담회(2005년 10월30일)에서 다시 한번 사용했다. 그는 당시 논란이 된 ‘대연정 제안’의 배경을 설명하며 “국민들이 편을 갈라 싸우는 문제는 정치권이 거의 해결하지 못하면서, 정치인들은 국민을 필요에 따라 ‘갈라치기’ 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갈라치기는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교묘한 이간질로 상대 진영을 분열시켜 반사이익을 취하려는 비열한 정치 술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갈라치기의 고수’란 평가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정치, 특히 선거 영역에서라면 갈라치기를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갈라치기는 정치의 본질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전략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계관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정치에 관한 한 ‘악마적’일 만큼 차가운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도덕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이 각각 ‘선과 악’, ‘미와 추’의 대립에 기초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을 지반 삼아 작동한다고 봤다. 여기서 적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 대상’, 관념이나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힘으로 작동하는 현행적 존재다. 공통의 경제이익에 따라 결속한 기업연합이나 노동조합도, 서로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해 투쟁에 돌입하는 순간 정치적 세력이 된다는 뜻이다.

5년 주기로 벌이는 합법적이고 제한적인 내전

현실의 공적 담론에서 슈미트식 정치 인식은 철저히 배척된다. 불화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의 정치판도, 공적인 담론 영역으로 옮겨오는 순간 ‘대화와 토론으로 이견을 좁혀 공통의 이해와 이익을 찾아가는 합의의 과정’으로 ‘과잉 이상화’되는 탓이다. 2022년 1월3일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신년사에 등장한 선거 관련 언급도 마찬가지다. 정치에서 ‘선의’의 중요성을 줄곧 역설해온 대통령답게, 이번에도 문 대통령은 “적대와 증오와 분열이 아니라 국민의 희망을 담는 통합의 선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진영 간 총력전에 가까운 대선까지도 ‘통합의 이벤트’로 치르기를 바라는 건 그의 진심일 터이다. 그러나 ‘통합의 선거’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지에는 정치와 선거판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이들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최상위 권력의 향배를 가르는 대선은 사회 전체의 갈등적 에너지가 응집되는 열정의 쟁투장이다. 전략과 인적 자산, 자금, 조직, 담론, 정책 자원이 총동원된다. 정당과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한 진영과 진영이 공직과 재정, 정책 수단의 점유권을 두고 5년 주기로 벌이는 합법적이고 제한적인 내전인 셈이다. 이런 내전에도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리는 더 많은 유권자 집단을 자기편의 경계 안으로 끌어가는 쪽에 돌아간다. 그러니 전략적 선긋기, 정교한 갈라치기가 필수다.

갈라치기가 성공적이려면 우리 편의 동요는 최소화하되 상대편 이탈자를 늘려 우리 편의 크기를 최대로 키워야 한다. 가장 좋은 선택은 기존 전선 대신 새로운 전선을 짜는 것, 현행의 갈등 구도를 대체할 새로운 갈등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치적 갈등이 지역이나 인종적 차이를 중심으로 형성됐다면, 산업·노동·복지 분야 이슈를 중심으로 갈등 구도를 재편해 정치적 대결이 ‘지역 대 지역’ ‘인종 대 인종’이 아닌 ‘부자 대 가난한 자’나 ‘노동 대 자본’, 또는 ‘대자본 대 중소상공인’의 전선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1930년대 미국 민주당의 뉴딜 프로젝트가 여기에 속한다.

뉴딜의 핵심은 산업화된 동북부 기반의 공화당과 농업 중심의 남부를 텃밭 삼은 민주당의 지역갈등 구도를 법령과 공공정책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 대 기득권층의 대결 구도로 전환해 안정적인 다수파 연합을 구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빈곤층을 겨냥한 공공일자리 정책과 독점기업·금융자본에 대한 규제, 흑인과 이민자 등 소수자의 권리 확대 정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갈등 강도는 강화됐지만 구도는 다르지 않아

물론 정치의 목표는 ‘사회 통합’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 출현 이후 완전체에 가까운 통합을 달성한 경우는 나치 같은 전체주의 국가 말고는 없었다. 현실은 ‘조화와 통합’을 지향하는 어떤 사회도 그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성향과 기호, 직업,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이상, 내부의 긴장과 균열,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과해선 안 될 점은 갈등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한다는 사실이다. 갈등이 격렬해질수록 적대하는 두 진영의 내적 통합은 오히려 강화된다. 통합과 분열은 갈등이라는 동일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내적 통합은 공통의 적, 다시 말해 ‘우리’가 맞서 싸울 ‘그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 갈등의 전선을 명확히 긋는 것에서 시작한다. 갈등과 적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합의와 통합만을 말하는 것은 허위이자 기만이다.

선거는 이런 갈등이 조직돼 합법적으로 표출되도록 하는 경합의 공간이다. 경합에서 승리한 ‘상대적 다수’의 의지는 공공정책이란 형태로 공동체 전체에 실현되고 관철된다. 경합에서 패배한 세력에게 주어지는 대안은 두 가지다. 부단히 상대의 단점과 취약점을 폭로해 상대편 지지자들의 이탈을 촉발하거나, 새로운 갈등으로 기존 갈등을 대체해 정치적 공간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유럽의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이민자, 소수인종, 난민 집단을 국민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공동의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피해 계층을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로 동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제20대 대선 투표일을 2개월도 채 남겨놓지 않은 우리 현실은 어떤가. 촛불이라는 국민적 열망 위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민주화 이후 어렵게 합의해온 정치적 가치의 동요와 균열을 한층 심화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허무의 토양 위에 피어나는 것은 “윤석열 당선은 최순실 공화국의 부활” “이재명은 나라를 거덜 낼 파시스트” 같은 저열한 협박과 협잡의 언어들이다.

갈등의 강도는 강화됐지만, 갈등의 구도는 이번 대선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수 야당은 ‘이념·지역’이라는 갈등의 기본축 위에 ‘공정 대 반칙’ ‘자유민주주의 대 약탈적 포퓰리즘’이란 보완적 갈등 이슈를 더해 ‘정권교체론’의 전선을 적의 종심(진지에 가까운 곳을 가리키는 군사용어)으로 확장하려 한다. 이에 맞선 리버럴 여당의 선택은 ‘부패·특권 카르텔 대 촛불개혁 세력’이라는 5년 전 갈등축을 유지하되 자산계급과 중산층의 관심 이슈인 조세와 부동산, 종교계와 20대 남성 집단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체성 이슈로 ‘중원 이동’을 감행함으로써 ‘조국 사태’ 이후의 세력 이탈을 상쇄하는 것이다.

기껏 ‘전향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갈라치기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양쪽 모두 새로운 갈등 이슈를 던져 유권자 집단을 효과적으로 갈라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기존 정치적 균열선을 그대로 둔 채 포지션을 중앙으로 이동시키거나, 상대의 약점과 실수 등 비정책적 열세를 드러내는 제로섬 네거티브 게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기껏해야 제한된 ‘전향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게다가 이렇게 확보한 이탈층도 시간이 흐르면 관망적 중립지대나 애초 속해 있던 진영으로 복귀할 공산이 크다. 결국 우리는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되든, 전선 교착 상태에서 펼쳐지는 소모적 고지전을 이후로도 오랫동안 목격하게 될 것이다.

염두에 둘 진실은 이것이다. 정치는 늘 ‘통합’을 당위로 외치지만, 현실의 우리는 항구적 ‘전쟁 상태’에 있다는 것. 미셸 푸코의 말대로 “전선은 지속적·영구적으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를 한 진영 또는 다른 진영에 위치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대적자가 된다. 이 차돌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지점에서 정치는 시작한다.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 monad@hani.co.kr

이세영의 질문

2022년 대선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포퓰리즘이다. 여야가 서로 ‘표만 되면 뭐든 던지고 보는 포퓰리스트’라고 맹비난한다. 흔히 ‘대중영합주의’라는 말로 번역되는 부정적 의미의 포퓰리즘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에 긍정적 차원은 없는 것인가? 세계 도처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얻는 현상은 그들이 민중의 집합적 열망이나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기 때문은 아닌가? 신진욱 교수의 견해가 궁금하다.
신진욱의 답은 제1398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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