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팬덤 정치, 민주주의의 열매이자 독

국민이 정치에 열정적이고 열렬해질수록…
민주화의 진전된 결과이지만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부식시킬 수도
등록 2022-04-18 16:56 수정 2022-04-19 02:15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세영의 질문
지난 대선에서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의 활동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반페미’ 정치에 큰 힘을 실어줬다. 더불어민주당 쪽 팬덤정치는 ‘노사모’ ‘문파’를 거쳐 ‘명파’로 변신하며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정치행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제1407호)

한 명의 최고권력자를 선출하는 대통령선거에서 언론과 시민의 관심은 온통 유력 후보들의 지지율과 득표율에 쏠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당들의 치열한 경합이 벌어진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사회의 저변에서는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정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정치적 의사표현과 참여행동이 그것이다.

한 예로 ‘남초 사이트’로 불리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강한 반페미니즘 여론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윤석열 후보 캠프의 전략적 중심으로 채택됐다. 한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반혐오 노선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젊은 여성 유권자들의 집단행동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대선 뒤에도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의 지지그룹으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정당·정치인에게 영향 행사하는 정치 고관여층

이런 정치 행위는 때로 긍정적으로, 때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또한 각자의 관점에 따라 극단적으로 평가가 달라진다. 어떤 이는 촛불집회를 찬양하고 또 어떤 이는 경멸한다. 태극기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극우 정치담론은 종종 여성·장애인·성소수자에 대한 위협을 수반하며, 정치인과 지지그룹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옹호나 가부장적인 구조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참여행동 각각에 대한 규범적 판단만이 아니라, 이들을 관통하는 2000년대 한국 정치의 변화된 양상을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촛불집회부터 ‘정치팬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자생적 참여행동이 민주화가 진전된 결과이며,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민주주의를 그 내부에서 부식시킬 위험이 내포돼 있다는 역설이다.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참여 행동은 한국 사회와 한국 정치의 더 깊은 구조적 변화의 한 장면이다. 지금 이 나라에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정치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고 있다. 나아가 정치 고관여층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단지 지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보유하게 됐다.

이는 이제 정치가 선거 이상의 그 무엇이 됐다는 뜻이다. 투표권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정치참여는 투표권 행사라는 제도화된 형태를 완전히 뛰어넘는 다양한 지대로 확장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 등 대중행동을 벌이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치 현안에 관한 여론을 형성하거나, ‘팬 그룹’ 형태로 정치인의 지지자 집단을 형성하거나, 정당 당원으로 가입해 당의 노선과 지도부의 결정에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즉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주체가 정치엘리트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연령, 성별, 계층의 시민들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권력’이 되어가지만 그만큼의 ‘책임’은?

이처럼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정치를 움직이는 힘을 증대하고 있다. 정치 무관심층은 오직 정치에 영향받기만 할 뿐이고, 투표권 행사에 만족하는 시민들은 정치에 딱 1인분의 영향을 미친다. 그에 반해 정치 고관여층은 현실을 바꾸는 데 개입하며, 실제 제도정치의 판세를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효능감이 이들을 더 강렬한 개입으로 이끈다.

‘문파’가 문재인 정권의 입지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태극기부대’가 보수 시민을 동원하며 자유한국당의 선택을 제약할 힘이 없었다면, 인터넷 사이트 ‘에펨코리아’나 ‘클리앙’의 분위기가 젊은 유권자들의 여론에 영향력이 없었다면,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와 정치권의 관심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점점 ‘권력’이 되었고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적 권리 행사로서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독이 될 수 있다. 사회학자 마이클 맨은 <민주주의의 어두운 이면>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민(民)의 통치’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여기서 그 ‘민’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 이념은 다원주의적 상호인정과 이익조정을 뜻할 수도 있고,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진정한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믿는 일군의 대중이 열렬히 정치에 관여해 영향을 미칠 때, 이 설익은 주권자 민주주의의 열정은 위험한 것이 된다. 더구나 정치엘리트들이 사회의 다양한 이익을 조정할 능력은 없으면서, ‘국민’을 대변한다는 앙상한 관념에 지배돼 일부 결집한 대중의 요구에 따른다면 그것은 곧 정치의 실종을 의미한다.

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는 김지하 시인의 절규처럼 현실에 부재한,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던 무엇이었다. 그 민주주의가 이 땅에 온 지 30년이 넘었다. 이제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은, 추상적으로 열망했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피상적으로 이해될 경우 현실에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대 조직 의존 않고 서로 연결하는 시민들

이제 민주주의가 독재체제의 등장으로 붕괴할 가능성보다는, 유권자의 일부만을 대표하면서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어뜨릴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다. 열정적 일부의 참여가 정치를 장악하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한다는 것,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슈무엘 아이젠슈타트는 이것을 바로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이라고 불렀다.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참여의 긍정적 의의와 부정적 잠재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의 흥미로운 예가 바로 ‘정치팬덤’이라고 불리는 정치인 지지 행동이다. 여기서 ‘정치팬덤’ 또는 ‘팬덤정치’는 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이 아니며, 이 용어가 지시하는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종종 ‘인물중심 정치’ ‘인물지지 정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물중심 정치 자체는 새롭지 않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3김’ 보스정치 때부터 인물중심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대통령제 자체가 한 명의 인물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정치제도다. 더 근본적으로는, 현대 민주주의가 오직 조직과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이상과 열망은 구체적 인간으로 구현돼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팬덤’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인물지지 정치가 진화한 데는 몇 가지 정치사회적 변화가 작용했다. 우선 정당정치 영역에서, ‘3김’ 분점 시대가 끝나고 정당과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는 ‘정치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는 것이 기본 배경이다. 지지자를 확대·관리하고 그들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해야 경쟁에서 살아남는 시대다.

한편 시민정치 영역에서, 민주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주권자 의식이 강해지고 그에 따라 정치참여와 영향력 행사의 욕구가 커졌다. ‘노사모’ 현상이 등장한 2000년대 초반 이래 시민들의 정치에 관한 관심, 정보와 지식이 꾸준히 확대됐다. 거기에다 정보사회 환경에서 시민들은 거대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 연결하고 집합행동을 벌일 자원과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처럼 정치인은 생존하기 위해 지지층을 필요로 하고, 시민은 세상을 바꿀 힘을 갖기 위해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쌍방적 필요를 충족하는 대안으로 ‘팬덤’ 형태가 발전한 세 번째 이유는, 정치참여가 보편화되면서 정치/비정치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제니퍼 얼이 분석했듯이, 비정치적 팬덤과 정치적 행동양식이 구래의 경계를 ‘점프’해서 혼합되는 것이다.

하나가 아닌 ‘국민’을 조율하는 게 정치의 책임

정치인과 팬의 관계는 과거의 지도자-추종자 관계와 질적으로 다르다. 위계적 문화 시대에 대중이 비범한 영웅적 지도자를 원했다면, 수평적 문화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듯 친근하면서도 ‘보통 사람’을 대변해줄 친구를 원한다. 정치인은 이런 판타지를 충족해야 한다. 이를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챙기거나 권위적으로 설득하려 드는 것은 우정의 배신이기 때문이다.

촛불시민, 애국시민, 당원, 키보드워리어, 팬클럽 등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욕망은 같다. 정치와 세상을 바꾸는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이 하나가 아니며, 저마다 애국·애족·애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조율하고 통합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다. 정치공동체와 모든 시민에 대한 대승적 사랑으로 팬들의 사랑을 얻는 그런 정치가 가능할까?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당론 채택 과정에서 팬덤의 위력이 확인됐다. 정당과 정치인은 왜 팬덤과 강성 지지층의 압력에 취약한가. (제1410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