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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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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보이지 않는 을들의 전쟁

문재인 정부 때 자산격차·계급문제 커져, 노동정치 실현에서 해법 찾을 가능성은
등록 2022-05-17 15:02 수정 2022-05-18 01:38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이세영의 질문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격차와 불안정성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 때나 선거 이후에나 이 문제는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는 계급정치의 사회적 토대가 전혀 없는 것인가?(제1410호)

평등, 공정, 정의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불행히도 이 가치들은 위선과 허식이라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얻었다. 문재인 정부가 진보 정권이 아니었다고 규정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대중의 마음속에 새겨진 ‘진보’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지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민중을 말하는 정치세력이 민중의 혐오 대상이 됐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며 힘을 얻은 자들이 바로 이 사회의 진정한 거대 권력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득한 절망을 느낀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모든 것을 악화시키기만 했다는 평가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가처분소득의 불평등, 공공복지의 재분배 효과 등 여러 지표가 개선됐고 박근혜 정부 후반 10%에 육박하던 청년실업률은 코로나19 위기 속에 있던 2021~2022년 7%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일자리·주택·자산 등 많은 면에서 격차가 심해졌고, 그것이 정권 후반기 민심 이반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계급 문제가 정권교체의 중대한 배경이었음을 놓친다면 현 시국의 심층을 볼 수 없다.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집값 폭등과 자산격차 확대는 치명적이었다. 순자산 지니계수는 2017년 0.584에서 2020년엔 0.602로 급등했다. 청년층 내 순자산 상위 20%는 2017년에 하위 20%의 27.9배를 갖고 있었으나 2020년엔 33.2배를 갖게 됐다. 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많은 소상공인이 쓰러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2017년 32.9%에서 2021년 38.4%로 올랐고, 특히 20대는 33.1%에서 40.0%로 뛰었다. 탄핵, 촛불, 코로나19, 총선 압승 등 여러 예외 상황에서 열린 기회의 창이 그냥 닫혔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를 증폭시켜 정권교체를 이뤘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급·불평등·노동 이슈는 대선 기간에도, 대선 이후에도 전혀 부상하지 않았다. 유권자의 투표도 계급계층에 따라 갈리지 않았고 양대 정당에 대한 대안으로 정의당이 부상하지도 않았다. 제도정치에 도전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급은 모든 곳에서 감지되지만,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문제는 한국 정치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악화하는 불평등과 이를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의 간극은 점점 더 커졌다. 지난 20년 동안 모든 인식조사에서 대다수 사람은 교육, 일자리, 소득, 부동산 등의 계층격차가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자 최우선의 국정과제라고 답했다. 이런 문제로 정권이 흔들리긴 했어도 그다음에 오는 정권이 달랐던 적은 없다. 정치 양극화는 심해졌지만 계급 양극화를 반영하지 않는다.

시인 박노해는 2010년 발표한 ‘시대고독’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시대를 진단했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자기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를 산다. 이익과 이익, 신념과 신념이 곳곳에서 부딪히지만 그것은 권력층의 다툼이거나 을들의 전쟁이지, 계급투쟁이 아니다.

독재를 경험한 많은 나라에서 이런 경험은 보편적이다. 국가폭력과 시민사회의 대결이 압도하던 시대에는 그 고통의 깊이만큼이나 높은 도덕적 숭고함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는 수많은 갈등이 교차하고 얽히는 혼돈의 세계로 변했다. 체코 민주화운동을 이끈 시인이자 이후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1992년 출간한 <여름날의 명상>에서 “절대선을 위한 인륜성의 실천”이 사라지고 집단이익들의 갈등과 정치투쟁만이 남은 시대를 탄식했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지만 현대정치의 큰 기둥 중 하나인 노동정치는 바로 그 이익갈등과 정치투쟁의 한가운데서 ‘인륜성’을 구현하려 했다. 독일 노동자의 정치지도자였던 페르디난트 라살은 1862년 ‘현재의 역사 시대와 노동계급 이념의 특별한 연관성’이라는 명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의 원칙을 국가와 사회의 지배적 원칙으로 삼는다는 사상”이야말로 “세계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최상의 진보이자 인륜성의 승리를 표현한다”. 이 웅장한 선언은 인류 역사에 계급정치의 개막을 알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갈등을 제도정치의 장으로 반영해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산업사회의 태동과 더불어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균열이 핵심적인 정치사회적 균열로 자리잡았다. 이들 양대 계급은 농민과 중간계급 등 기타 계급들과 연대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쟁했다. 대의정치의 장에서는 주요 계급들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하는 좌우 정당 간의 경쟁구도가 구축됐다.

비록 어느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라살이 소망한 것처럼 “노동계급의 원칙이 곧 국가의 목적이 되게끔” 하는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존엄과 자부심, 단결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에스핑-안데르센이 강조했듯이, 사회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열세를 상쇄할 무기를 국가와 정치에서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불가분의 가치임을 통찰하는 데 있다.

저소득·무주택자의 계급인식 싹트고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군사독재까지 수십 년간 정치적 자유와 노동자의 기본권이 억압됐기 때문에 민주적 계급정치가 발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역사적 배경 위에서 민주화 이후 정치적 대립 구도는 지역, 세대, 북한 문제 등 비계급적 차원에서 날카롭게 형성됐다.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북풍과 역풍, 이런 것들이 친구와 적을 가르는 기준이 됐고, 정치인은 이를 영리하게 고무하며 즐겁게 활용했다.

그럼에도 경제적 격차와 불안이 심해짐에 따라 불평등, 복지, 노동권익 같은 계급적 의제가 정치에서도 중요해졌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소득·주거·자산 등 측면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정부정책과 정당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즉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좀더 진보적인 정치를 바라고, 상류층일수록 보수 성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노인층에선 여전히 이념보수가 다수라면, 특히 청장년층에서 이런 계급균열이 두드러졌다.

여러 지표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관찰됐다. 노년층을 제외하면 저소득층일수록 더불어민주당이나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복지 태도에서도 소득이 낮을수록 복지정책을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자가 보유 여부와 자산 규모는 정치적 선호나 투표 성향과 강한 상관성을 보였다. 물론 이를 두고 한국에서 계급의식과 계급정치가 무르익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속단이고 과장이다. 하지만 때론 어떤 미약한 신호가 큰 변화의 맹아가 싹텄음을 암시한다. 그 신호가 왔다.

그러한 역사적 흐름을 타고 탄생한 것이 문재인 정부였다. 문재인 정부는 평등·공정·정의라는 가치의 삼위일체, 소득주도성장·포용복지국가·노동존중사회라는 비전의 삼위일체 안에 시대정신을 관념적으로 응축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바로 그 문재인 정부 동안에 계급정치의 토대가 다시금 해체됐다. 가난한 자, 집 없는 자, 일자리 없는 자가 민주당에 더 호감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정의당도 대중적 신뢰를 상실했다. 복지 태도, 이념성향도 계급과 멀어졌다.

사회에서도 진보 세력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수많은 촛불시민의 공동체가 생겼고, 청년들의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 네트워크가 형성됐으며, 평등과 복지가 더는 공산당·빨갱이의 낙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 주류 담론의 위상을 갖게 됐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진보운동과 시민사회는 신뢰를 잃고, 활력을 잃었으며, 자부심을 잃었다. 보수우익이 불평등과 불공정을 외치고, 대기업이 진보운동의 젊은 리더들을 지원하는 시대가 됐다.

변화의 방향은 예정돼 있지 않아

이 폐허에서 진보정치와 진보운동은 다시 일어나야 한다.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어쩌면 이 엄청난 질문 앞에 우리는 지금 무력하기만 한지 모른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는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으며 달라질 가능성의 공간이 열린 적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치와 사회의 변화는 진보를 향해서도, 몰락을 향해서도 예정돼 있지 않으며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불규칙하게 출렁이는 파도의 어느 지점에 지금 우리는 놓여 있다. 바닥을 차고 비상하는 힘은 이미 어디선가 생겨나고 있는지 모른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키워드는 ‘자유’였다. 진보의 가치였던 ‘자유’가 보수의 전유물이 돼버린, 이 한국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제1415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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