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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성폭력, “선거 앞두고 징계까지 할 필요 있냐”는 말

구조적 차별에 백지 반성문 말고 각자 위치에서 구체적 실행을
등록 2022-05-21 15:02 수정 2022-05-25 00:59
윤호중(왼쪽)·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2022년 5월12일 저녁 국회 당대표실에서 성폭력 의혹으로 제명된 박완주 의원과 관련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윤호중(왼쪽)·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2022년 5월12일 저녁 국회 당대표실에서 성폭력 의혹으로 제명된 박완주 의원과 관련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더불어민주당에서 성폭력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여성 보좌진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임이 알려지자 기자들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린다. 여성 보좌관이라면 가리지 않고 거는 전화일 테다. 겉으론 걱정하지만 속으로는 뭐 더 ‘건질 것’이 없는지 묻는 눈치다. 나는 실망감과 상실감에 이렇게 무릎이 꺾이는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실망은 가해자에 대한 것이고, 상실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다. 좀더 나은 정치를 위해 애쓰고 애쓰는 마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 같다. 습관적으로 해왔던 ‘우리 당’이란 말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누구고 ‘당’은 무엇인가. 책임 있는 자들이 뱉은 말과 살아온 진짜 삶의 궤적은 얼마나 다른가.

뭐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법 만들었나

정치철학과 비전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결사체인 정당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그 때문에 지지율이 추락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뭐 하려고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법 만들고 정책 만들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유권자에게 선택받는 위치에 있으니, 매일 잘하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고무줄 당기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에 사는데, 가해자가 그 고무줄을 한가운데서 끊어, 당겼던 힘만큼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느낌.

이때 가장 쉬운 일은 무력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내 방관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그래도 여성 보좌관으로서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전자는 개인적 감정에 따른 판단, 후자는 그래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판단이다. 주말 내내 당헌·당규를 다시 읽었다. ‘선거 앞두고 그렇게까지 징계할 필요 있었냐’는 익숙한 반발 앞에 눈이 흐릿해지는 걸 다잡고 싶었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합의 기준에 따라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이 필요했다(지극히 당연한 것도 지속적인 반발에는 이렇게 흔들린다). 그리고 이를 신뢰해주는 몇몇 선배·동료 보좌관들과 당헌·당규에서 고쳐야 할 것, 개선해야 할 제도를 토론해 정리했다. 마음에 떠다니는 이런 말들을 속으로 삭이면서.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내 몫의 책임을 찾아갑니다. 정작 피해자와 공동체에 해를 입힌 당신은 본인의 안위만 챙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진짜 공동체의 윤리를 저버리는 것은 누구입니까.”

모두가 물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으로 당이 그렇게 고통을 겪었는데, 왜 이런 사건이 여전히 반복되느냐고. 당과 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그동안 무수히 사과했다. 반성할 때 뼈를 하도 여러 번 깎아서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사건에서 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또 반복됐을까.

성폭력의 원인은 권력관계에 따른 구조적 차별에 있다고 한다. 위계관계에서의 폭력이 상대와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갑질로, 어떤 때는 성폭력으로 드러난다. 이때의 ‘구조’는 권력을 가진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음으로써 반성도 내 몫의 책임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더 민주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거지, 구조라는 말에 책임자들이 숨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껏 당 차원의 무수한 사과는 내 몫을 뺀 ‘구조’에 탓을 돌리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사과는 무성했으나 구체성은 앙상했다. 겉으론 비장했고 속으론 안온했다. 그러니 변화가 만들어질 리 없다.

불안정노동자는 모두 성폭력에 취약한 고위험군

국회 보좌진은 모두 별정직공무원이고 국가공무원법상 별정직공무원은 채용조건·임용절차·근무상한연령이 모두 하위 법령에 위임돼 있다. 그 말은 업무내용, 근무조건 등의 사항이 모두 철저하게 인사권자에게 귀속됐다는 뜻이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시간 규정이나 해고사유 제한 등의 노동권도 모두 적용이 제외된다. ‘노동자 기본권을 지켜라’라는 상임위 질의서를 정작 나는 밤 12시에 쓸 때 적잖이 ‘현타’가 온다. 이런 이유로 보좌진은 ‘업무’의 법상·규율상 정해진 근거가 없고, 정치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업무내용이 달라지며, 이 때문에 인수인계도 매뉴얼로 전승되기 어렵다. 그러니 정치지도자가 행사하는 ‘위력’ 범위는 커지고 보좌진의 방어권은 형해화할 수밖에 없다. 보좌진은 법을 만들지만 정작 보좌진의 지위는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이 보좌진의 자리에 불안정노동자 누구라도 갖다놓으면 비슷한 처지가 된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운영했던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특별조사단’의 운영 결과를 보면 여성 응답자 2478명 중 과반수(57.5%, 1429명)가 ‘성희롱·성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단체·협회 등 문화예술계 종사자 응답자 3718명 중 고용형태가 프리랜서인 경우는 70.6%(2624명)로 가장 많았다. 불안정노동자는 그 자체로 성희롱·성폭력에 취약한 고위험군이라는 얘기다. 직무 특성상 노동의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그런 고위험군일수록 노동자 방어권을 두세 겹으로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관계가 그나마 보정된다.

국회는 피감기관과 기업을 상대로 성희롱 고충처리 실태, 여성임원 비율 확대 등 시정 요구는 잘하지만 정작 국회 자체는 내부를 정화할 한 겹의 보호장치도 없었다. 적어도 2018년까지는 그랬다.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과 국회 미투 사건이 있은 뒤로 국회에서 무수한 토론회와 대책회의가 열렸다. 민주당에서는 젠더폭력신고상담센터를 설치했고, 주요 당직자를 대상으로 성인지 교육을 강화했다. 국회 내에는 인권침해·차별, 성희롱·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 등의 상담과 조사 업무를 하는 국회인권센터가 2022년 1월 개소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최소한의 형식 요건만 갖춘 정도다.

공동체적 해결은 2차 가해의 엄단에서

구조적 성폭력을 직시하며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어야 할까. 사건의 시작은 가해자-피해자 양자 간의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사건의 해결은 이제부터 공동체의 일이다. <정부기관 등 성폭력 사건 매뉴얼>에 비춰보면, 공동체의 구체적인 역할은 이러하다.

① 조사는 지체 없이 착수되고 정해진 기한 내에 마무리되도록 해야 한다. ② 성희롱·성폭력 여부의 판단과 이에 따른 징계 양정이 가해 행위에 상응하게 결론지어져야 한다. ③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 ④ 궁극적으로 피해자에게 안전한 근무환경이 조성되도록 일정 기간 모니터링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①②단계도 어렵게 될까 말까다. 당내에서 겪은 무수한 사건에서 사건 처리의 최종적 결과로 피해자가 일터로 복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2차 가해는 어쩌면 1차 가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사건이 보도됐을 때 “여자들 무서워서 여성 보좌관 못 쓰겠다”거나 “여기자들과 약속 다 취소했다”는 남성 의원·보좌관들의 비아냥과 조롱을 똑똑히 기억한다. 특히 평판이 중요한 정치 영역에서 2차 가해는 피해자를 공동체에서 고립시키고 노동권을 박탈한다.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조사에 착수하는 즉시, 소속 구성원에게 2차 피해 예방교육을 하고, 2차 피해를 인지하면 당은 2차 피해 확산 방지를 위해 해당인에게 경고 공문을 보내야 가해 행위가 특정되면서 시정될 동력이 생긴다. 또 지속적인 2차 피해가 발생할 경우, 1차 사건에 준해 직권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옆의 다른 사람이 쿡 찔러 자제시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분위기가 몇 번 경험되면 공동체 문화가 바뀔 것이다. 피해자가 자력구제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진보다. 2차 가해 행위의 엄단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해결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정치공동체가 져야 하는 법 이상의 책임

이제는 좀 달라질 수 있으려면, 공동체 내 구조적 차별을 견고하게 만든 각자 몫의 실행을 해야 한다. 나와 선배·동료 보좌관들은 피해자에게 무언의 용기가 되고 당이 민주적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당 시스템 정비안을 만들었다. 또 후배 보좌진과 토론 자리를 만들어 보좌진 입장에서 가장 문턱 낮은 권리구제 기관의 형태를 고민했다. 대안이 반영되고 일상의 당 문화로 정착될 때까지 우리는 지켜보고 관철시킬 것이다.

자, 그럼 당내에서 우리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은? 백번의 텅빈 사과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안을 내놓자. 그리고 이 위계적 구조를 바꿔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참에 지지 않고, 무력에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피해자가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두 겹 세 겹의 안전망이 되자.

이보라 국회 보좌관

*‘법 만드는 법’은 국회 10년차 보좌관인 이보라씨가 국민 생활에 밀착한 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이보라씨는 국회여성정책연구모임 대표와 경찰청 사이버성폭력 수사자문단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보다 항상 늦게 도착하는 법이 조금의 쓸모라도 더 가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게 업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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