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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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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이 돌아오는 한강을 기다리며 [샛강지킴이 염형철]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염형철 대표
등록 2021-03-20 02:28 수정 2021-03-25 13:17

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특별한 잡지를 네 번째 만듭니다. 2020년 코로나 뉴노멀(제1315·1316호), <한겨레21>이 사랑한 작가 21명(제1326·1327호),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제1340호)에 이어 2021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조금씩 바꾸고 있는 ‘체인저스 21명’을 펴냅니다. 지속가능한 세계, 평등한 세계, 자유로운 세계, 더불어 사는 세계를 꿈꾸며 체인저스들은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때론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서 분노하지만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 작은 변화의 흐름에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한 이들은, 작지만 값진 승리를 향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도 동행해볼까요? _편집자주

지난 3월5일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염형철(53) 대표를 만난 곳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샛강생태공원 방문자센터(샛강센터)였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사진도 찍을 겸 샛강으로 나가서 함께 걸었다. 봄 햇살이 따스하고 시야도 깨끗한 오후였다. “보여줄 것이 있다”는 염 대표를 따라가 보니 샛강 북쪽 제방에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염 대표는 “양지가 바르고 바람이 적어 서울에서 가장 먼저 매화를 피우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생태교란종을 걷어내며

과거 서울 한강에는 여의도 샛강 말고도 잠실 북쪽 샛강(새내=신천), 난지도 북쪽 샛강이 흘렀다. 그러나 한강 개발로 잠실 샛강은 한강 본류가 됐고 난지도 샛강은 육지가 돼서 사라졌다. 여의도 샛강만 살아남았다. 여의도 샛강은 강가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 자연생태 지역이지만, 대부분 시민에겐 올림픽대로 여의도 구간 옆 녹지로 인식된다. 이름은 생태공원이지만, 법률 용어로는 하천부지다.

새 일을 샛강에서 시작했다.

“샛강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23만 평(75만8천㎡)의 거대한 자연인데 방치돼 있다. 와본 사람도 많지 않다. 2018년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창립 뒤 여기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서울시에 제안했다. 2019년 3월 샛강센터에서 사무실 한 칸을 얻어 활동을 시작했다. 2020년 4월엔 서울시와 ‘샛강생태공원 운영 활성화’ 위탁계약을 했다.”

샛강에서 무슨 활동을 하는가.

“그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샛강 숲을 덮고 있던 가시박이나 환삼덩굴 등 생태교란종을 걷어낸 일이다. 2년 동안 꾸준히 걷어내니 갈대나 억새, 달뿌리풀 등이 등장해 샛강 풍경을 바꿔놓았다. 처음 걷어냈을 때는 생태교란종이 거세게 버텼는데, 계속 걷어내니까 기세가 꺾였다. 아마도 “여긴 살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웃음)”

다른 활동은 뭐가 있는가.

“샛강공원 남쪽을 가로지르는 올림픽대로 주변 3.5㎞에 사철나무를 6500그루 심었다. 사철나무는 오염에 강하고 사계절 잎이 유지돼 먼지와 소음 제거에 뛰어나다. 샛강 숲길(샛숲길)도 새로 열었다. 원래 샛강엔 1.5㎞ 길이의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길을 더 자연스럽게 바꾸고 2㎞ 정도 새로 숲길을 냈다. 숲길에 표지판을 세우고 벤치와 통나무의자, 나무다리를 놨다.”

염 대표는 2018년 8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을 만들었다. 23년 동안 환경운동가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협동조합 대표로 변신한 것이다. 소재는 ‘한강’이지만, ‘사회적협동조합’의 활동 방식은 시민단체와 다르다.

왜 사회적협동조합인가.

“기업처럼 사업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업 이익의 배당이 없고, 이사장 임기도 두 번까지만 허용된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 스스로 공유재산을 관리하는 모델을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아직 우리 사회에 없는, 친환경 하천을 복원하는 모델을 만들고 싶다. 현재는 건설업자들이 하천 복원을 한다며 하천을 망치고 있다. 정부의 하천 복원 관련 법률과 규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들을 개선하고 싶다. 그래서 조경 전문가를 영입하는 등 조경업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1983년 청주 세광중학교 3학년 때 청주 중앙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폼을 잡아봤다. 맨 오른쪽. 염형철 제공

1983년 청주 세광중학교 3학년 때 청주 중앙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폼을 잡아봤다. 맨 오른쪽. 염형철 제공

시민 스스로 공유재산을 관리하는 모델

재정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현재 조합원 400여 명을 확보했고, 일부는 정기후원금도 내고 있다. 또 샛강을 관리하는 비용으로 서울시가 1년에 1억2천만원을 지원한다. 3년 동안 15건 이상 연구용역을 수주했고, 기업 20여 곳에서 후원도 받았다. 이렇게 해서 2018년 7천만원, 2019년 4억원, 2020년 8억원을 벌었다. 돈은 아니지만, 3년 동안 시민 3500여 명이 자원활동도 했다.”

사회적협동조합의 문제점은 없나.

“4대강 사업이나 가덕도 신공항 등 중요 환경 이슈가 터졌을 때 대응하기 어렵다. 역량도 부족하고 조직 목적에도 맞지 않는다.”

염 대표는 2019년부터 또 다른 사회적협동조합인 ‘동행’에서 이사장도 맡고 있다. 동행은 공익활동가(시민운동가)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다. 2021년 2월까지 전국 300여 개 시민단체에서 시민운동가 2100여 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동행은 2013년 만들어졌는데, 한동안 지지부진하다가 2020년 700여 명이 가입하는 등 최근 불이 붙었다.

동행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10년 녹색교통의 40대 활동가가 야근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시민단체들이 모금하고 여기저기서 모았는데도 겨우 700만원을 마련해 가족에게 전달했다. 그 활동가는 4대 보험에도 제대로 가입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민운동가의 삶과 죽음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들게 됐고, 환경운동연합이 앞장을 섰다.”

지지부진했다는데, 어떻게 활성화했나.

“2018년에도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가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런데 이번엔 동행이 조금 무리해서 가족에게 3천만원을 전달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시민운동가의 가입이 늘었다. 비슷한 시기에 공기업 노조들이 ‘공공상생연대기금’을 만들었는데, 동행이 여기에 사업을 제안해 당선됐다. 이 기금에서 모두 15억원의 종잣돈을 대출받았다. 이것이 큰 힘이 됐다.”

어떤 지원을 하는가.

“5년 동안 생활자금으로 50여 명에게 3억원, 학자금으로 80여 명에게 6천만원을 빌려줬다. 그동안 대출금을 갚지 못한 활동가가 거의 없었다. 활동가들의 재충전을 위해 1인당 70만원 정도의 여행 경비를 무상 지원하고, 고급 건강검진에도 동행이 35만원, 녹색병원이 100만원을 지원한다.”

재정이 큰 문제일 것 같다.

“전체 자산이 30억원, 순자산이 20억원 정도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턱없다. 2021년에는 전년(700명)보다 더 많은 활동가가 가입할 것 같다. 조합비나 기금 대출로는 한계가 있어서 공제회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공제회가 되면 보험업을 할 수 있고, 정부 출자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시민운동가가 경험과 역량을 갖추는 데 5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그 5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동행은 그 기간에 작은 버팀목이 돼주려고 한다. 탐욕이 넘치는 사회에서 공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은 귀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늘리고 키우는 것이 동행의 미래다.”

1990년 4월15일 총학생회장 시절 충북대 우리마당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 염형철 제공

1990년 4월15일 총학생회장 시절 충북대 우리마당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 염형철 제공

여주 이포보에 올라간 그 사람

염 대표는 2018년 2월까지 가장 치열한 환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막으려 27m 높이의 경기도 여주 이포보 기둥에 올라가 42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공개 경고장을 보내, 한강 신곡보 개방·철거 논의를 물 위로 끌어올렸다. 현재는 4대강 사업 등 물 관련 정책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국가물관리위원회의 간사 위원이다.

사무총장을 마치자마자 환경운동연합을 떠났다.

“1995년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청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과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사무국 책임자로만 14년을 일했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환경운동을 계속하는 선택은 일찍 접었다. 선배가 남아 있으면 후배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만둔 뒤 환경운동연합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고, 아이들 사정도 있어 먼 곳으로 이사했다. 환경운동연합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거대한 역류였다. 주로 물·하천 운동을 해온 염 대표의 삶도 4대강 사업 앞에서 막혀버렸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4대강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얻어낸 것은 금강·영산강 보 5개의 처리 방안 ‘결정’뿐이다. 이 처리 방안이 언제 실행될지도 알 수 없다. 한강과 낙동강의 보 11개는 논의도 시작하지 못했다.

4대강 사업은 무엇이었나.

“2000년 동강댐 건설이 백지화하면서 물·하천 정책이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11개 댐 건설 계획이 취소됐고, 수질 대책과 하천 복원 계획이 나왔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은 물·하천 정책을 단숨에 30년 전으로 돌려놨다. 4대강 사업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회복시키지 못했다. 4대강 사업에 막혀 수돗물, 수질, 하천 복원 논의가 안 된다. 하굿둑이나 새만금 문제 해결은 꿈도 못 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4대강 사업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당장 4대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방정부들이 소하천에서 벌이는 정비 사업 방식을 개선하고, 강에서 시민 활동을 활성화해야 한다. 지금은 작은 변화들을 통해 큰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왜 4대강을 회복시키지 못했나.

“임기 초기엔 원자력발전소 문제와 함께 4대강을 주요 의제로 삼았다. 그러나 진정성이나 치열함이 부족했다. 정부가 결정해야 할 4대강 보 처리를 국가물관리위원회에 떠넘겼다. 심지어 위원회를 4대강 사업에 의견을 내지 않았던 분들로 구성해 보 처리 결정을 어렵게 했다. 금강 세종보와 영산강 죽산보의 해체를 결정하는 일도 어려웠다. 이 정부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래도 다음 정부에선 해체하지 않을까?”

1996년 속리산 문장대 용화온천 개발 공사에 투입된 포클레인의 무한궤도 위에 올라가 공사를 중지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염형철 제공

1996년 속리산 문장대 용화온천 개발 공사에 투입된 포클레인의 무한궤도 위에 올라가 공사를 중지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염형철 제공

개발 시대에 훼손된 흐름을 되살리려

염 대표의 환경운동에서 4대강 사업만큼이나 컸던 일은 ‘서울 한강 복원’이었다. 2009년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시절에 시작해 현재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개발 시대에 훼손된 서울 한강의 흐름을 되살리려는 사업이다. 핵심은 한강 하류 김포의 신곡수중보를 개방·철거하는 일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 1단계 개방을 결정했으나, 박 전 시장이 떠난 뒤 사실상 중단됐다.

왜 한강 복원인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 이후 하천에 관심이 커졌다. 그 영향으로 후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한강 르네상스 사업을 추진했다. 강을 살리는 사업이 아니라 전시성 건설 사업이었다. 그래서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동시에 환경단체의 대안도 제시하고 싶었다. 강물이 흐르고 백사장이 펼쳐지고 여름에 강수욕할 수 있는 건강한 강을 제안했다.”

현재 어떤 상황인가.

“박 전 시장이 당선되면서 뭔가 될 것 같았는데, 10년이 지나도록 큰 진전이 없었다. 돌아보면 박 전 시장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웠다.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가 필요했다. 환경단체도 시민들을 설득했어야 하는데 시장만 압박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중앙 사무총장이 되면서 고삐를 놓친 점이 아쉽다.”

서울 한강 복원은 물 건너갔나.

“이미 많은 연구와 논의를 했다. 다만 실행하려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제 한강 복원은 수달의 어깨에 달려 있다. (웃음) 2020년 8월부터 수달 모니터링을 했는데, 서울 한강의 대부분 지천에서 수달이 발견됐다. 아직 본류에선 수달이 발견되지 않는다. 한강 본류의 환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달이 돌아오는’ 한강을 내세웠다. 수달이 돌아오려면 한강을 재자연화해야 한다.”

염 대표는 1968년 지리산 자락인 전남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 대장마을에서 태어나 순천시 서면 대구리 상대구실에서 자랐다. 시골에 살 때는 학교 다녀와서 소에게 풀을 먹이고 나무하러 다녔다. 가난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형이 자리잡은 충북 청주로 이사했다. 형이 하는 중국 음식점에서 배달일을 도우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2020년 여름 서울 여의도 샛강에서 생태 교란종인 가시박을 걷어내고 있다. 염형철 제공

2020년 여름 서울 여의도 샛강에서 생태 교란종인 가시박을 걷어내고 있다. 염형철 제공

1993년 우연히 환경운동을 시작하다

1987년 충북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너무 열심히 시위하다가 얼굴과 머리만 네댓 번을 다쳐 모두 40바늘 이상 꿰맸다. 이 덕인지 1990년 충북대 총학생회장, 충북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 됐다. 그러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90년 12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수감돼 2년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을 만나 운동가 삶의 태도를 배웠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환경운동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낯선 의제였다. 그러나 한때 지독한 학생운동가였던 염 대표는 우연히 환경운동으로 옮겨갔다.

어떻게 환경운동을 시작했나.

“1992년 감방에서 나오니 선배들이 2개의 길을 제안했다. 하나는 진보정당 운동, 둘은 청년단체 운동이었다. 나는 청년단체 사무국장을 맡아 어린이 방과후 교실, 어머니 한글 교실 같은 것을 운영했다. 1993년 우연히 ‘환경반’을 만들었고, 1995년 본격적인 환경단체 ‘푸른환경을 지키는 청주시민모임’(푸른청주시민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청년단체에 `환경반’을 맡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활동 성과가 있었나.

“1995년 무심천 지키기, 1995~1996년 속리산 문장대 용화온천 개발 반대,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 생수 공장 난립 반대 등 운동이 성과를 거뒀다.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 제안해, 1996년 환경운동연합과 푸른청주시민모임이 통합하는 방식으로 청주환경운동연합을 출범시켰다.”

염 대표는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지난 10여 년 세월이 증명하는 것은, 4대강이나 서울 한강의 재자연화가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생긴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외면하고 살 수도 없다.

녹색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촛불 시민혁명 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고, 환경단체 출신으로 김은경·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잇따라 나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정권을 잡는다고, 장관이 된다고 상황을 쉽게 바꿀 수는 없다. 물론 때가 되면 녹색운동이 녹색정치로 발전할 것으로 본다. 그건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 샛강에서 길게 보고 집요하게 일하려고 한다. 한 20년 정도 열심히 하면 샛강을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좋은 사람들을 길러내면 그들이 4대강을 살리고 정부에서 하천 정책도 바꾸지 않을까? 그런 꿈을 꾼다.”

2010년 7월 환경운동가 박평수, 장동빈과 함께 경기도 여주시 이포보 기둥에 올라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42일 동안 시위를 벌였다. 가운데. 염형철 제공

2010년 7월 환경운동가 박평수, 장동빈과 함께 경기도 여주시 이포보 기둥에 올라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42일 동안 시위를 벌였다. 가운데. 염형철 제공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355호 - 체인저스 21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582/

염형철을 바꾼 것

한강 걷기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임기를 마무리하던 2018년 1월, 한강을 걷기로 했다. 다른 이들처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도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하구인 경기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까지 약 550㎞. 길은 연결된 곳도 있고, 끊어진 곳도 있었다.
한겨울 한강은 황량했다. 바싹 말라붙은 풀과 나무들은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길 없는 곳에서조차 발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바람도 거침없이 불었다. 해가 뜨면 걷기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겨울철이라 문을 연 민박이 없어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읍에서 읍으로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하루에 30여㎞씩 걸었다.
걷는 중엔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걷는 데 집중해야 했다. 얼음 위나 사라진 옛 산길을 더듬어 걸어야 했다. 발가락에 잡혔던 물집은 어느덧 굳은살이 됐다. 이렇게 생긴 굳은살로 새로운 삶을 지탱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신령스러웠던 태백 검룡소, 깎아지른 뼝대(절벽)를 둘러친 영월 동강, 4대강 사업으로 황폐해진 여주 남한강, 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던 서울 반포, 살을 에는 듯이 칼바람이 매서웠던 김포, 서해로 흘러드는 유장한 조강. 강은 물이 흐르는 길만은 아니었다. 강엔 사람들의 삶이 흘렀다.
한강길 1400리를 걸으면서 누구를 비판하는 삶 대신, 사람들과 어울려 강을 가꾸는 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강을 지키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에필로그

염형철 대표를 보면 타고난 운동가라는 느낌을 받는다. 아이디어와 열정, 실행력, 집요함, 사교성이 넘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 대학에 가서야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늦게 만들어진 그릇이 단단한 것인가.
그는 22~24살 사이 2년 동안 지낸 교도소 생활을 “알차게 보냈다”고 말했다. 마치 함석헌 선생이 교도소를 ‘학교’라고 말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히 그는 초기에 수감된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 전 의원을 만나 많이 배웠다고 했다. 노 전 의원은 “운동가는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갖춰야 하고 대안도 가져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스승’을 제대로 만난 셈이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 개량주의자, 타협주의자라고 했다. 소수파인 민중민주(PD) 계열로 총학생회장을 한 경험이 영향을 줬다. 사실 이런 태도는 모든 운동가나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변화엔 시간이 필요하다. 샛강에서 20년 정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사회의 발전 수준을 고려하면 어떤 분야에서든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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