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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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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과 닮은 젊은 의사들

의약분업 이후 의료계 주장으로 줄어든 의사 정원, 늘 수 있을까
등록 2020-09-05 01:02 수정 2020-09-05 05:23
전공의·전임의들이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확대, 첩약 급여화 등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집단 휴진을 이어간 9월3일 오전 서울 한 종합병원에서 응급환자가 이동식 침대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전공의·전임의들이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확대, 첩약 급여화 등의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집단 휴진을 이어간 9월3일 오전 서울 한 종합병원에서 응급환자가 이동식 침대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이 기사는 9월3일 저녁 상황까지 반영하였습니다. 9월4일 오전 정부여당과 의료계가 극적으로 합의했지만, 전공의들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정부여당과 의료계가 밀실 협의로 공공의료 개혁을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와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는 대정부 투쟁의 구심점은 젊은 의사들이다. 8월26~28일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주도한 2차 총파업에서 개원의 파업 참여율은 10% 아래에 머물렀으나, 8월21일부터 집단행동을 이어오는 인턴·레지던트 등 전공의 1만6천 명의 휴진율은 70~80%에 이른다. 응급실·중환자실 같은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 분야 전공의까지 집단 휴업에 참여하고 있다.

9월1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전국전임의비상대책위원회,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는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정부가 4대 정책(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약 첩약 급여화, 비대면 진료) 추진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논의하겠다는 약속을 ‘명문화’할 때까지 집단행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의대 교수들까지 진료 축소 등 단체행동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의사 집단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생명을 볼모로 한 집단행동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며 파업 철회를 촉구하는 환자와 시민단체의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이 갈등 핵심

의사들이 철회를 촉구하는 4대 정책 가운데 갈등의 핵심은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이다. 정부는 3058명이던 의대 정원을 2022년부터 400명 늘린 3458명으로 하고, 10년간 유지하기로 했다. 해마다 400명씩 모두 4천 명의 의사가 추가로 배출되는 셈이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대규모 의사 파업 이후 ‘의사가 늘어 과잉진료가 우려된다’는 의료계 주장을 받아들인 정부는 3253명이던 의대 정원을 2006년 3058명으로 줄인 바 있다.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확대 정원 400명 중 300명은 대학이 위치한 지역 내 학생을 선발해 전액 장학금을 주는 지역의사선발전형으로 뽑는다. 해당 전형으로 의대에 입학한 이들은 졸업 뒤 의사가 부족한 지역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10년간 근무를 의무화했다. 나머지 정원(100명)은 감염·역학조사관 등 특수 분야 의사와 의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대학에 할당할 방침이다. 정원 확대와 별개로, 2018년 폐교된 전북 남원 서남대 의대 정원(49명)을 활용해 대학원 교육과정인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을 설립할 예정이다. 공공보건의료에 종사할 인력을 국가가 직접 양성해 기관에 배치하는 대신 10년간 근무를 의무화한다. 이런 방안은 모두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돼야 가능하다.

7월 당정이 이런 정책을 발표한 배경은 코로나19 재난 이후 공공의료 강화 여론이 커진데다 지역 간 의료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20년 6월 기준 서울 종로구의 인구 1천 명당 활동 의사는 16.29명이지만 강원도 고성군(0.45명)을 비롯해 250개 시·군·구 가운데 1천 명당 활동 의사가 1명조차 되지 않는 지역은 45곳에 이른다.

그동안 의협은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했기 때문에 의료계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전공의들이 이 정도로 거세게 반발할 줄은 의료계에서도 짐작하지 못한 분위기다.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전임의(펠로) ㄱ씨는 “정책 변화로 직접 영향받는 세대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데 대한 분노가 크다”고 말했다. 지역의사선발전형으로 의사가 된 경우 의료 취약지에서 10년간 일하도록 했지만, 전문의 수련 기간을 제외하면 3~5년 근무에 그치고 열악한 지역 인프라로 인해 늘어난 의사들이 수도권에 몰려 경쟁만 치열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본도 지역 의사 수급난 해결 위한 의대 운영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 1천 명당 임상의사 수는 2.4명(한의사 포함)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3.5명에 크게 못 미친다. 그에 견줘 병상은 인구 1천 명당 12.4개로 OECD 평균(4.5개) 2.8배, 1인당 의사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6.9회로 OECD 평균(6.8회)보다 2.5배 많다. 민간 병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환자 유치 경쟁, 오랫동안 굳어진 시민들의 의료 소비 문화,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일차 의료체계가 부실한 상황 등 여러 요인이 합쳐진 결과다. 상대적으로 적은 의사가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체계를 지탱하는 요인 중 하나는 공교롭게도 과로에 시달리는 전공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20년 2분기 기준 병원급(요양병원 제외) 이상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전문의·일반의·전공의 등은 약 5만5천 명으로 그중 인턴·레지던트는 23%가량을 차지한다. ‘전공의의 수련 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전공의특별법)에 따르면 의사이자 수련의인 전공의는 주 52시간이 아닌 주 최대 88시간 근무가 합법이다. 조용수 전남대 의대 교수(응급의학과)는 “전공의를 갈아 넣어 유지되는 의료체계라 이들만 있어도 필수 의료가 돌아갈 정도”라며 “전공의 시절만 희생하면 장기적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로 그 많은 노동량을 감수하는 건데 의사를 늘린다고 하니 이러한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공의대를 설립하면서 별도의 입학 절차를 만들어 의대 입시 ‘공정성’을 훼손하고 노력하지 않은 누군가가 쉽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불신도 깊어 보인다. 학생 선발 방식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시·도 지사나 시민사회단체 인사의 입김으로 이들의 자녀가 특혜를 볼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임준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센터장은 “기존 의대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공보건의료 분야를 교육하고 지역공공의료를 책임지는 전문가를 양성할 별도의 체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의료취약 지역의 의사 수급난은 시장에서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국가별로 특수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1970년대 일본 47개 지방정부가 출자해 설립한 자치의과대학은 각 지역에서 선발한 학생을 대상으로 지역사회 의료 특성화 교육과 학자금을 지원한다. 졸업 뒤 9년 동안은 출신 지방정부가 지정한 의료기관에서 의무복무를 하는 방식이다. 30대 전문의 ㄴ씨는 “우리나라 의사에게 ‘공공성’은 매우 낯선 개념”이라며 “사람이 사는 곳엔 의료·교육·치안·소방 등이 꼭 필요한데 그중 의료 제공자인 의사만 다수가 자영업자로 살아가는 등 민간 시장에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공공의료 강화하려면 정부안만으로 부족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공공의대 정원 49명은 너무 적어 전체 의료체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이러한 교육기관을 처음 설립함으로써 의사의 공공성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전체 의료체계에서 공공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등을 정부와 사회에 지속적으로 묻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공공의료 강화를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현재 정부안만으로는 정책 목표를 이루기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늘어난 정원을 기존 의대와 민간 병원에 할당할 뿐, 어떻게 하면 지역공공보건의료에 기여하는 의사로 길러낼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 휴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9월3일 의협과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등으로 꾸려진 ‘범의료계 4대악 저지투쟁 특별위원회’는 젊은 의사들의 요구를 중심으로 단일안을 마련해 정부·여당과 협상에 나선다고 밝혔다. 한 사회의 의료체계는 의사들만의 몫이 아니다. 한정된 재원으로 최적의 의료를 적정하게 공급하는 구조를 만드는 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과제다. 앞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등 보건의료단체가 모인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공공의료 강화와 의사 확충은 시민의 요구”라며 “정부는 환자 인질극에 굴복해 의사 증원과 공공의대 정책을 완전히 철회해서는 안 되며, 시민 의견을 들어 더 개혁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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