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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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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지금 법으론 차별을 구제할 수 없다

10여 년간 침묵하던 인권위도 국회에 평등법 제정 촉구
등록 2020-09-12 00:33 수정 2020-09-14 07:39
2020년 6월30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왼쪽)이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20년 6월30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왼쪽)이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한국 사회의 해묵은 과제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물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출범하면서 우리 국민의 인권 증진과 보호를 위한 중대한 계기를 마련했으나, 정작 인권 보호를 공고하게 견인하는 인권기본법이나 차별금지법의 부재는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시민사회와 인권위의 노력 끝에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차별금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지만, 법안에 성소수자가 포함된 것을 문제 삼은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후 국회에선 13년 동안 여섯 번 법안이 발의됐으나 같은 이유로 번번이 폐기되거나 철회되기를 반복했다. 20대 국회에선 아예 법안 발의조차 없었다. 

성인 88.5%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최근에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21대 국회가 열린 뒤, 6월29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 등 10명이 다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인권위도 6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차별금지법 내용을 포괄하는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을 제정하라고 국회에 의견을 표명하며, 어느 때보다 법 제정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여론조사도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권위가 4월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성인 1천 명에게 실시한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8.5%가 ‘한국 사회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다. 5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성인 1500명에게 실시한 조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의 87.7%가 ‘성별, 장애, 인종,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에 동의했다. 국민이 차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이를 인권 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가늠할 만한 조사 결과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21대 국회의원들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이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방송(KBS)이 6월 국회의원 전원에게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전체 300명 중 94명만 응답했고, 법 제정에 대한 찬성은 69명, 반대는 25명이었다. 전체 3분의 2 넘는 국회의원이 답변조차 거부했고, 익명 조사라고 밝혀도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라며 의견 표명조차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향후 국회에서 논의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예견되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에 차별금지법안을 처음 소개한 곳은 인권위였다. 인권위는 내부에 별도 전담팀을 꾸려 수년간 노력한 끝에 법안을 마련하고, 시민사회는 물론 차별금지법에 보수적 견해를 보이던 정부 각 부처와 수십 차례 회의해 가까스로 마련한 차별금지법안을 정부와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법 제정이 무산된 2007년 이후 표류하는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인권위의 후속 조처와 행보는 지지부진했다. 2008년 이후 시작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이르는 보수정권 집권기 9년여 동안 파행적 운영을 거듭했던 인권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추스르기에도 바빴으며, 이에 따라 차별금지법 제정 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라는 시민사회의 줄기찬 요청에 침묵으로 일관한 곳이 바로 인권위였다.

차별금지법안 처음 소개한 인권위

이젠 정치 환경이 바뀜에 따라, 인권위는 더는 ‘남 탓’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권위법에는 인권위가 모든 사람의 인권의식을 깨우치고, 인권의식 향상에 필요한 인권교육과 홍보활동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 따라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교육과 홍보도 인권위에 주어진 임무라고 볼 수 있다. 교육과 홍보 대상에는 일반 국민뿐 아니라 당연히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권도 포함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일부 국민에게 무작정 당위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바탕을 둔 설명과 설득이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교회에서의 설교나 길거리 전도 등 종교 집회에서 하는 발언은 현재 차별금지법안 적용 대상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세간의 모든 일을 사사건건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필수 영역이지만 그동안 자의적인 차별이 생겨온 고용이나 교육, 재화·용역 제공, 행정서비스 등 4개 영역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국회에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재차 권고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입법을 위한 세세한 부분까지 인권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홍보 활동에도 전념해야 한다. 다행히도 현재 인권위 홈페이지에는 평등법 제정 안내 배너가 떠 있고, 법 소개를 비롯해 의문 사항에 대한 답변까지 상세하게 게시돼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처음 권고한 뒤 10여 년간 침묵해온 인권위가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공청회와 토론회를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 만시지탄이기는 하나 고무적인 행보로 보인다.

8월13일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스님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들이 서울 영등포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2차 오체투지를 진행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8월13일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스님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들이 서울 영등포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2차 오체투지를 진행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신종’ 인권 문제 대처 위한 포괄적 차별금지

국가가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구제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수행해온 주요 기능이었지만, 차별금지 사안까지 국가가 인권 문제 차원에서 적극 개입하는 건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여성이나 장애인, 아동과 노인 문제 등 전통 복지 영역에서, 또는 개별 영역의 차별금지법을 통해 어느 정도 국가 차원의 해결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수많은 영역에서 생기는 차별이 중요한 인권 문제로 부각되는 세계적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신종’ 인권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차별을 금지하는 기본 법제가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사회 환경에서 차별 행위가 점점 복잡해지고 영역과 사유를 뛰어넘어 여러 형태의 차별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그 모든 사유와 영역을 포괄해서 아우르는 법 제정이 필수적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제를 포괄적 차별금지법제로 통합한 세계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대표적인 국외 사례를 보면, 2006년 성차별금지법 등 개별 법을 ‘평등법’으로 통합한 영국, 포괄적 법률을 둔 독일(일반평등대우법), 뉴질랜드(인권법), 캐나다(인권법) 입법례 등 차별 관련 법률이 제정된 초기에는 성별 등 일부 사유에만 한정됐으나, 점차 차별을 포괄적이게 다루는 방향으로 확장해왔으며, 같은 맥락에서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는 포괄적인 법률과 개별법을 함께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남녀고용평등, 연령차별금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운영했다. 이처럼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은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기에 전체 차별 영역을 아우를 수 없다. 예를 들어 남녀고용평등법·연령차별금지법 등은 ‘고용’ 영역만 다루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라는 특정 사유에 적용된다. 따라서 현재 시행하는 개별법이나 그 법률의 개정만으로는 다양한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모든 차별을 다루기 위해 계속해서 개별법을 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정의당 차별금지법안과 인권위 평등법안에서는 각각 23개와 21개의 사유를 적시하는데, 그것도 예시일 뿐 향후 더 많은 사유가 추가될 수 있다. 오히려 포괄적인 법률이 있는 가운데, 필요한 경우 특정 영역이나 사유를 다루는 개별 법률로 보완하는 것이 통상의 입법 체계에 맞는 방식이다. 개인의 정체성에는 성별·나이·장애 등 다양한 속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에, 이것이 중첩돼 생기는 차별 문제를 통합해 다루면서 통일된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서도 포괄적인 법률이 훨씬 더 적합하다.

유사한 맥락에서 차별금지법을 집행하고 차별 문제를 구제하는 차별시정기구도 포괄적인 기능을 갖춘 기구로 통일하는 게 효율적일 것이다. 개별법에 의한 차별시정기구가 시행하는 구제 조치의 통일성이 어긋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단일한 차별시정기구로 통일해 구제 조치의 일관성을 담보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인권기본법도 없이 조직법인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차별 개념이 정의되고 인권위에 차별 시정·구제 기능이 일부 부여됐으나, 차별금지법이 없는 상태에서 평등의 가치를 확산하고 효과적인 차별 구제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인권위 기능을 재조정해야 하고 그 역할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질 수 있는 맥락이다.

차별시정기구도 통합·단일화 필요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적시하면서 ‘평등’이 우리 헌법의 핵심 원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현재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의 내용은 단순 명료하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 추구하는 평등 원칙을 구체화해 현실에 맞게 집행하자는 법이다. 그러나 기존에 해왔던 것처럼 당위성만 강조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는 건 또 다른 저항에 부딪히며 시행착오에 그칠 수도 있다. 먼저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을 통해 법을 제정하기 위한 힘을 모아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우리 사회를 더욱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영선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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