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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고시 준비생도 노조원이 될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 기준 못 미치는 정부안… 미국·일본에선 학생도 노조 가입 가능
등록 2020-09-12 01:01 수정 2020-09-14 07:41
권정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왼쪽 넷째)과 조합원들이 2020년 9월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은 위법하다’는 취지의 대법원 선고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한 뒤 팔로 하트를 그려 보이고 있다. 김진수 기자

권정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왼쪽 넷째)과 조합원들이 2020년 9월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은 위법하다’는 취지의 대법원 선고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한 뒤 팔로 하트를 그려 보이고 있다. 김진수 기자

250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법외노조’로 보낸 시간이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10월24일 전체 조합원 6만 명 가운데 해고자 9명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고용노동부에서 팩스로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전교조는 이 조처가 위법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난 다음날인 2020년 9월4일 다시 팩스로 ‘법외노조 통보를 취소한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두 차례 팩스가 오간 기간에 ‘법외노조’ 전교조가 치른 대가는 적지 않다. 사용자인 교육감이 호의를 베풀지 않는 한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도 없고 법외노조화 이전에 맺은 단체협약은 모두 무효가 됐다. 교육청이 조합원인 교사 월급에서 조합비를 원천징수해주지 않아 개별 납부를 받아야 했다. 전교조 상근 교사 34명은 조합 활동을 인정받지 못하는 바람에 근무지이탈죄로 교육감들이 직권면직을 해서 일자리를 잃었다. 웬만한 노동문제가 국회와 행정부에서 정책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죄다 법원으로 달려가는 ‘노동의 사법화 시대’, 대법원 판결이 나고서야 교육청들은 해고자 복직에 나섰다.


행정관청이 노조 자격 판단하지 말아야
대법관 다수의견이 고용부의 전교조 법외노조화 통보 조처가 위법하다고 본 논리는 단순하다. 통보 조처의 법률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용부는 노조가 설립신고증을 받은 뒤 이를 반려할 사유가 발생한 때 “30일의 기간을 정하여 시정을 요구하고 그 기간 내에 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당해 노동조합에 대하여 이 법에 의한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을 통보하여야 한다”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시행령’ 제9조 2항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노조의 법적 지위 박탈은 해당 노조의 이익을 침해하는 중대한 처분이므로 국회가 법률로 규정해야 할 사항인데도 노조법엔 관련 내용이 없고, 이를 하위 규범인 시행령에 위임하는 규정도 없으므로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만든 노조법 시행령 제9조 2항은 “그 자체로 무효”라는 게 다수의견의 논리다.

이로써 광역시도와 고용부 등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받은 관청이 이후 특정 노조가 노조법상 노조가 아니라고 판단하더라도 ‘노동법상 노조 아님’을 통보하지 못하게 됐다. 고용부는 문제의 시행령을 아예 삭제할지, 아니면 법적 시비가 일지 않는 내용으로 대체할지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노동계는 정부가 단결권·강제노동 금지 관련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 중인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을 따르자면 노조의 자격 여부는 행정관청이 아니라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고용부가 새 시행령 마련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소송의 전교조 쪽 대리인을 맡은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보수세력의 전교조 혐오 분위기 속에 대법원이 개의치 않고 법리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향후 어용노조 등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관청이 ‘노조 아님’ 통보를 할 게 아니라 노동위원회나 법원을 통해 노조의 지위를 다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교조가 법외노조로 보낸 2508일의 시간은 정부가 박근혜 정부 때 이뤄진 ‘노조 아님’ 통보를 스스로 취소했으면 훨씬 짧아질 수 있었으나 정부는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론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63번째 국정과제 ‘노동존중 사회 실현’ 항목에서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강제노동에 관한 제29호 및 제105호 협약,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단체교섭권 보호에 관한 제87호 및 제98호 협약 비준 추진”을 약속했다.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제87호 협약의 제2조는 “노동자와 사용자는 어떤 차별이나 사전 허가 없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을 조건으로 단체에 가입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 기구의 결사의자유위원회는 “조합원 자격은 노조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노조 권한을 위축시킬 수 있는 국가의 개입은 자제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권고한 바 있다.


ILO “조합원 자격, 노조 스스로 정해야” 권고

정부는 7월 국제노동기구 8개 핵심협약 가운데 아직 비준하지 않은 4개에서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제105호를 뺀 나머지 3개 협약의 비준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며 이와 관련된 노조법과 교원노조법, 공무원노조법 등의 개정안을 국회에 정부 입법 형태로 냈다. 하지만 이조차 국제노동기구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노동계에서 나온다. 향후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정부안은 교원노조법 제4조 2항에서 교원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교원의 범위를 “교원”과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하였던 사람으로서 노동조합 규약으로 정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현행과 달리 해직자와 퇴직자한테도 조합원 가입 자격을 주는 쪽으로 범위가 넓어진 것이긴 하나 임용고시 준비생 등의 자격은 제한하는 내용이다. 강영구 변호사는 “예비교원과 교원노조에서 상근하며 일하는 노동자도 교원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조합원 가입 범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전교조 자체의 법 개정안을 만들어 조만간 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 등의 나라에선 교원의 노동조건 변화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학생한테도 가입 자격을 준다.


코로나19 빌미로 논의 미루자는 야당
이 밖에 정부 노조법 개정안에서 현직이 아닌 조합원의 노조 활동을 “사용자의 효율적인 사업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만 할 수 있도록 하거나 대표교섭노조 선정을 위한 조합원 수를 산정할 때 이들은 제외하는 등의 내용도 조합원 자격을 이유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제한하는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마저도 야당 쪽에서 코로나19 위기를 빌미로 ‘핵심협약 비준 속도조절론’을 제기하는 상황이어서 본격적인 논의조차 쉽지 않을 전망이다. 노동계는 대선을 코앞에 둔 2021년에는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관련 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올해 정기국회가 문재인 정부에서 이를 논의할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대법원의 시간은 끝나고 이제 ‘국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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