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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지위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한국 의사 집단의 정체성이 형성돼온 역사… 윤리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회적 권위는 갈수록 떨어질 것
등록 2020-09-19 01:41 수정 2020-09-20 01:14
8월14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모인 의대생·전공의·개원의 등이 정부와 여당이 발표한 의료정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8월14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모인 의대생·전공의·개원의 등이 정부와 여당이 발표한 의료정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 정부 정책에 반발해 집단 휴진을 이어오던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복귀하면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일단락된 분위기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보건의료 정책의 쟁점에 대해선 근거에 기반을 둔 토론과 숙고, 상호 이해를 통한 합리적인 결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와 별도로, 생명을 볼모로 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윤리적 책임을 외면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한국 의사들은 유달리 비윤리적인 집단인가? 사회가 의사 집단에 거는 기대와 의사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다르다면 어떤 연유에서 그러한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국 의사 집단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돼왔는지 이해해야 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신분이 낮았던 의사는 19세기 중반 국가로부터 독점적 면허를 받는 근대적 의미의 ‘전문직’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이 지위는 서구 사회가 의사들에게 당연하게 부여한 것이 아니다. 미국 의사들의 경우 전문가로서 윤리성을 발휘하는 것이 전문직 지위를 확보하고 집단적 이익을 지키는 전략이었다. 반면 한국 의사들은 내부 규율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자체가 없었다.

미국, 전문직 지위 확보하려 윤리성 발휘

19세기 미국 의료 시장은 정통의학과 동종요법(인체 질병과 유사한 증상을 유발해 치료한다는 유사과학), 접골요법(어긋나거나 부러진 뼈를 이어 맞추는 것) 등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치료를 하는 사람들과 의사들이 경쟁하는 시스템이었다. 의사들은 전문직으로 인정받기 위해 의학지식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내부 규제를 강화해야만 했다.

1848년 미국 의사들은 전미의사협회(AMA)를 결성하고 ‘윤리 강령’을 채택한다. 윤리 강령에 따라 동종요법사와 접골요법사에게 진료를 의뢰하는 동료 의사를 협회에서 내쫓았다. 의학 지식과 윤리 수준을 높여 의사가 진료 행위를 독점하는 것이 시민들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미국 사회를 설득한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 전반 미국 의사들은 의료 제공자로서 독점적 지위를 얻었고, 전문직으로서 새 진료 방식을 생산하고 선택하는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미국 의사들은 동료와 경쟁하기보다 진료 영역별로 수평적 분화와 분업을 도모했다. 동시에 의학 교육기관의 수준을 높여 의사가 되기까지 진입 장벽을 높임으로써 집단 이익을 확보했다. 집단 내부를 규제하겠다는 약속, 일종의 사회계약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얻은 것이다.

의료 기술이 복잡하지 않던 시절에는 의사가 환자 1명을 도맡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복합적인 진료가 필요해지면서, 환자 상태에 맞춰 다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동료에게 진료를 의뢰하는 식으로 협업 체계를 구축했다. 보건의료가 영리화되면서 병원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의사 영향력도 과거보다 많이 쇠퇴하는 추세이나, 미국 병원의 중요한 ‘의뢰인’은 여전히 환자라기보다는 의사라 볼 수 있다. 아무리 시설이 훌륭한 병원이라도 동료 의사에게 의뢰받은 환자를 진료하도록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문의가 많은 대형병원은 환자를 개별적으로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의원 같은 1차 의료기관이 보낸 환자를 진료한다는 의미다.

면허와 투자로 살아남은 자영업자 의사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의사는 서구의 의사들처럼 전문직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지 못했다. ‘같은 이해와 윤리를 지닌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건, 의사들끼리도 서로 경쟁관계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한국 의사들은 개업을 통해 생존하는 자영업자에 가깝다. 환자와 신뢰관계를 구축해 사회에서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흐름이 아닌, 정부 정책에 따라 집단 정체성이 형성돼왔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 학교와 도립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의사는 거의 일본인이었다. 대다수 한국인 의사는 병원 개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치르면 독점적으로 의술을 행할 수 있는 면허제도가 정착됐지만 이것만으로 수입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학교나 병원에서 일자리는 많지 않았고 임금수준도 낮았다. 의사들은 서로 경쟁자로 각자 생존할 수밖에 없었고 동료 간 단결이나 담합,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수평적 분화는 어려웠다.

이런 의사들에게 이익을 담보해준 것은 정부 정책과 의료 기술이다. 한국 정부는 의사 수를 조절해 직종의 희소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줬다. 극빈한 시절 의료보험이 없는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은 고액의 의사 진료비를 부담하기 어려웠다. 의료 수요 공백은 한의사, 약사, 무자격 의사가 채웠고 이들은 의사들의 주요 경쟁 집단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그나마 유지됐던 도립병원 등의 공공병원은 낙후했고 의료의 공공 영역은 좁아졌다. 의사들은 시장에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시간을 들여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 몸값을 높이거나 자본을 들여 병원의 시설과 규모를 키웠다. ‘현대 의학=최신 의료 장비’라는 공식 역시 이 경향을 부추기는 데 기여했다. 의사들에겐 환자와 신뢰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최첨단 기술과 장비를 능숙하게 활용하고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는 한국 의사들이 환자를 잘 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환자와의 신뢰 유지가 한국 의사들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고 지위를 유지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대정부 투쟁에서만 확인되는 단결력

1970년대 말 의료보험 도입은 의료 시장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도 저렴한 가격으로 의료를 이용하면서 한국 의사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은 동시에 또 다른 위기를 맞는다. 오늘날 한국 의료를 특징짓는 대형병원이 등장한 것이다. 의료보험 도입이 그 토대가 됐다. 그러나 1차 동네의원, 2차 지역병원, 3차 대학병원으로 나눠 의료 수요를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의료기관 간 분업과 협력을 끌어낼 ‘의료전달 체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대형병원과 동네의원 사이 이해관계가 조정되지 못한 탓이다.

의사들은 환자 1명을 두고 대형병원과 동네의원이 무한히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국 의사들은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장비를 이용하는 환자 의존형 진료를 한다. 그런데도 의사와 환자의 신뢰관계는 최악에 가깝다. 한국 의사들은 스스로 생존하는 길이 무한한 경쟁 속에 끊임없는 자기 노력과 투자밖에 없음을 본능적으로 체득한다. 이 환경에서 의사들은 보건의료 체계를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겪는다.

2000년 의약분업이 촉발한 진료 거부는 보건의료 체계를 전문직인 의사 집단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좌절이 표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의권(醫權)이 수호되어야 한다’는 구호를 통해, 의사들은 처음으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했다. 많은 의사가 그때의 진료 거부를 실패한 일로 기억하지만 진료 거부라는 방식으로 정부에 대항해 의사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음은 무시할 수 없다. 이 경험은 앞으로도 한국 의사들의 정체성 핵심에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의료전달 체계 도입 실패에서 보듯, 집단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윤리성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단결과 투쟁만으로는 의사의 사회적 권위는 갈수록 떨어지기 쉽다. 달리 말해, 정부라는 외부의 적에 대항할 때만 내부 결속과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의사 집단 스스로 이해관계에 따른 내부 갈등을 인정하고 이를 조정하고 풀어내며 전문직으로서 그 지위를 높이는 데는 무력한 것이다.

의사들의 불안은 합리적인가

2020년 의사들의 집단 진료 거부는 여러 측면에서 20년 전 의약분업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이들은 전공의와 의대생이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공정성을 바라는 90년대생의 투쟁을 엿보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의약분업 사태에서 보여준 한국 의사들의 분노와 무력감, 불안감이 90년대생의 공정성 갈구와 맞물린 것이 아닐까 한다. 의사 증원만을 획일적으로 언급한 ‘공공의료’ 담론은 의사 자신의 노력과 투자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자급화할 수 있다는 의심과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사들 스스로 지닌 불안이 합리적 불안인지, 의사 집단 스스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길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현재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가 지속가능한지도 물어야 한다. 국가가 노동과 사람 등 보건의료 자원에 충분히 투자·지원하지 않은 채 의료 수요 상당 부분을 의사 개인의 투자에 의존하는 구조로는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안전망을 촘촘히 짤 수 없다.

최은경 경북대 의대 의학교육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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