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너머n] 성착취범 ‘징역 29년’ 반토막 낼 ‘작량감경’

대법원 권고안 나왔지만, 판사 재량으로 형량 반으로 깎을 수 있는 무기
등록 2020-09-19 02:47 수정 2020-09-21 01:26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9월15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제작하면 최대 징역 29년3개월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양형기준이 부재해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판결이 이어졌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양형기준만 확정한다고 판사들이 제대로 판결을 내릴 것인가. 그 답을 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법정형 하한을 재판부 ‘재량’으로 2분의 1로 깎을 수 있는 판사들의 무기, 바로 ‘작량감경’이다.

‘짐작하여 헤아리는’ 작량

판사의 재량으로 법정형을 감경해주는 제도는 한국과 일본에만 존재한다. 한국의 형법 제53조는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짐작하여 헤아려)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일본에서는 형법 제66조에 ‘범죄의 정상이 민량할(가엽게 살필) 바가 있는 것은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법률에 정해진 감경 사유가 없더라도 그 형이 범죄에 비해 과중해 보이면 판사의 재량에 맡기는 작량감경이 보장된다. 현실에서 작량감경은 재벌이나 권력자를 위해 기능하고, 성범죄 가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

작량감경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려면 어떻게 형이 정해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법정형-처단형-선고형’ 단계를 밟아 형은 정해진다. 법정형은 법조문에 나와 있다. 처단형은 법률이나 재판상 가중하거나 감경해 구체화된 형벌의 범위를 말한다. 선고형은 그 처단형 범위 내에서 최종적으로 피고인에게 선고하는 형이다. 작량감경은 그중 ‘재판상 감경’을 의미한다. 법률상 기준에 따라 감경한 뒤에도 참작 사유가 있다고 재판부가 판단하면 다시 작량(재량)으로 감경할 수 있다. 문제는 작량감경과 관련된 기준이 없으며, 판결문에도 그 이유를 제대로 적지 않는 것이다.

아동청소년법 제11조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을 예로 들어보자. 이 범죄의 법정형은 법조문에 명시된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다. 재판부가 유기징역을 선택하면 처단형은 ‘징역 5~30년’(유기징역 상한은 징역 30년)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작량감경을 하면 처단형은 그 절반인 ‘징역 2년6개월~15년’으로 낮아진다. 작량감경을 할 경우 재판부는 대부분 하한인 ‘징역 2년6개월’에 가까운 형을 선고한다. 그러면 징역 3년 이하가 되기 때문에 집행유예 요건에 맞아 징역형을 선고받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다.

실제 양형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14~ 2018년 단일범죄로 성착취물 제작을 한 범죄자 중 15명이 기소됐고, 이 중 단 3명이 실형(평균 2년6개월)을 받았다. 12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바로 작량감경이 적용된 결과였다. 물론 이는 이번 양형기준안이 반영되기 전의 일이다. 양형기준안이 새로 의결되면 기본 형량 범위가 5~9년으로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법정형은 그대로인 상태다. 이미 기소돼 재판 중인 사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 봐야 한다.

재판 중인 사건에 어떤 영향 미칠까

도대체 판사들은 작량감경을 어떻게 적용해왔던 것일까. ‘갓갓’ 문형욱 공범 등 디지털성범죄자들의 판결문을 뜯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ㄱ씨는 문형욱(갓갓)의 공범으로 아청법 제11조 1항(성착취물 제작·배포 등)을 포함해 수 개의 범죄를 저질러 기소됐다. 해당 범죄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판사가 유기징역을 선택하고 ‘경합범 가중’을 통해 ‘징역 5~45년’이 됐다. 그러나 이후 작량감경을 선택해 최종 처단형은 그 절반인 ‘징역 2년6개월~22년6개월’이 됐다. 양형기준이 설정되지 않은 때라 최종 선고형은 징역 3년이 됐다. 양형 이유로는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장차 치료받아 왜곡된 성적 충동을 고치겠다는 피고인의 다짐 △피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이 선도를 다짐하며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 등을 들었다.

ㄴ씨 역시 문형욱의 공범으로 아청법 제11조 1항(성착취물 제작·배포 등)과 아동복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됐다. 역시 ‘경합범 가중’을 통해 ‘징역 5~45년’이 됐다가 작량감경으로 최종 처단형은 ‘징역 2년6개월~22년6개월’이 됐고, 선고형은 징역 3년이 됐다. 양형 이유는 △범죄 전력이 없는 초범이며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의 내용 등을 살펴볼 때 피고인이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ㄷ씨는 아청법 제11조 1항(성착취물 제작·배포 등), 아청법 제7조 3항(강제추행) 등으로 기소됐으며 둘 중 더 높은 형인 아청법 제11조 1항으로 처벌하는 상상적 경합을 거친 뒤 작량감경이 적용돼 최종 처단형은 ‘징역 2년6개월~15년’, 선고형은 징역 2년6개월로 결정됐다. 양형 이유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고도비만 등 외모 콤플렉스로 인하여 주로 인터넷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던 중 경솔한 판단으로 사건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등이 꼽혔다.

집행유예 적용 않거나 법정형 하한 높이거나

작량감경 기준은 판사마다 다르며, 판결문에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판사 마음’에 달린 것이다. 디지털성범죄에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의 판결이 이어지는 것은 이 작량감경 때문이다. 따라서 양형기준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또 ‘판사 마음’을 내세워 감형하는 관행이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양형기준안 확정 외에도 작량감경 폐지를 주장하거나, 작량감경 뒤 집행유예를 적용하는 관행을 원천적으로 막자면서 법정형 하한을 징역 7년 정도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경우 작량감경을 해도 징역 3년6개월이라서 집행유예 요건인 징역 3년을 웃돌아 무조건 실형을 선고해야 한다. 양형위원회에서 판사에게 설문조사했을 때 디지털성범죄 중 성착취물 제작에 대해 응답자의 30% 이상이 기본 영역으로 이번 양형기준안보다 훨씬 낮은 ‘징역 3년’을 선택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판사들은 디지털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하고 이해도도 떨어진다는 의미다.

일반인 대상으로 재판 모니터링을 교육할 때 판결문에 작량감경이 포함돼 있는지, 작량감경을 했을 때 그 이유를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적시하는지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했으니 그들이 정상참작을 통해 감경한 이유가 제대로 판결문에 쓰여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한결같다. 판사 재량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이제 한국 판사들이 쥔 강력한 무기인 작량감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돼야 한다. 입법 미비, 양형기준 미설정, 수사과정 문제 등 외부로만 책임을 돌리는 판사들이 자발적으로 변화하길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기란 다룰 능력이 있는 이에게 맡겨야 한다. 한국 판사들은 무기의 주인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