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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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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답] 누구에게나 국영수가 필요할까

내가 받을 교육을 내가 선택하는 건 꽤 근사한 일
등록 2020-09-21 12:52 수정 2020-09-23 01:46
코로나19 방역의 한가운데서 9월3일 입학한 영국 미들섹스 지역의 학생들. 연합뉴스

코로나19 방역의 한가운데서 9월3일 입학한 영국 미들섹스 지역의 학생들. 연합뉴스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선택할 수 없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누구나 전자를 택할 거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힘을 가졌다. 그 힘은 권력·지위·돈·인맥 같은 외적 자본일 수도 있고 결단력, 자기 이해, 자유나 초월처럼 내적 마음 상태일 수도 있겠다. 교육과 관련해서, 선택하는 권력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역시 가장 힘이 없는 자는 학생이다.

학생이었을 때를 돌아보면, 내가 선택한 것은 거의 없었다. 물론 소소한 것들, 이를테면 중간고사 끝난 날 뭘 할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뭘 먹을지 같은 것은 내가 결정했다. 그러나 내 삶에서 훨씬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것을 따랐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할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정한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는 16개 과목을 공부했고 대입학력고사에서 그걸 다 시험 봤다. 3년 내내 도시락 두 개를 싸 들고 학교에 가서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왔다. 물론 과목 중에는 ‘선택’과목이란 게 있었고, 늦게까지 남은 것도 ‘자율’학습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인지를 안다.

중학교, 수학·영어보다 시간 많이 쓴 미술

영국에도 중학교까지는 국가교육과정에 따라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이 정해져 있다. 영어, 영문학, 수학, 과학(생물·화학·물리), 미술, 디자인, 컴퓨터, 지리, 역사, 음악, 체육, 외국어, 시민, 종교, 인간관계와 성교육 같은 과목이다. 중학교 마지막 2년 동안은 본격적으로 GCSE(중등교육일반자격증) 시험 준비를 한다. 영어, 영문학, 수학, 과학은 필수과목이고 그 외 과목은 학생들이 선택한다. 우리 아이들이 다닌 중학교에는 국가교육과정에 있는 과목 외에 영화학, 댄스, 텍스타일, 3D디자인, 드라마, 그래픽, 사진, ‘건강과 돌봄’, ‘환대와 요식’ 과목이 개설돼 있었다. 학생이 이 중에서 어떤 과목을 선택했는지를 보면 그의 관심을 대강 알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역사, 지리, 미술, 영화학을 골랐다.

큰아이 애린이 제일 심혈을 기울인 과목은 미술이었다. 2년 동안 다양한 매체로 작품을 만들고, 작가 연구나 작품 구상 과정을 기록해서 포트폴리오를 채워나갔다. 미술 과목에 쓴 시간이 수학이나 영어에 쓴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을 거다. 작은아이 린아는 영화학을 선택했다. 나중에는 과제로 시나리오도 썼다. 호러물인데 상징과 이미지를 영리하게 써서 기괴한 플롯을 만들었다. 자기가 선택한 과목을 이렇게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이 방향을 계속 추구할지 말지에 대해 감을 잡는다. 애린은 계속 미술을 하기로 했고, 린아는 영화감독이 되려면 천재여야 한다며 그 길을 접은 것 같다. 선택해봐야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뭔지 구체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다. 선택하는 자유가 있어야 탐색할 기회도 얻는다. 여기까지 중학교에서 배운다.

11학년을 마치면(만 16살, 우리나라로 치면 고1) 중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뒤 진로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일반계고등학교에 가서 A레벨 시험을 보고 대학에 가거나, 직업계고등학교에 가서 자격증을 따고 취업하거나, 아니면 직업 현장에서 도제훈련을 받는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18살이 될 때까지 2년 동안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여기까지가 ‘의무교육’이다. 어떤 경로로 무엇을 배울지는, 중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대략 알게 된다. GCSE로 무슨 과목을 선택했는지만 봐도 가늠할 수 있다.

필수과목 없는 고등학교

고등학교에는 필수과목이 없다. A레벨로 자기가 선택한 과목만 2년 동안 공부한다. 그것도 세 과목만 하면 된다. (욕심내면 네 과목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린 곧 세 과목도 벅차다는 것을 알았다.) 선택할 수 있는 A레벨 교과목은 100개가 넘는다는데, 일반적인 과목은 이렇다. 철학, 역사, 영어, 영문학, 수학, 고등수학, 생물, 화학, 물리, 지리, 정치, 심리, 종교, 법, 경제, 사회학, 고대사, 고대문명, 비즈니스, 미디어, 영화,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미술, 디자인, 텍스타일, 댄스, 드라마와 무대 연구,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음악, 사진, 체육,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같은 외국어 과목들.

큰아이가 처음 고등학교에 갔을 때 고른 과목은 영문학, 수학, 미술이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그때는 수학을 차마 놓지 못했던 것 같다. 영어와 수학을 잘해두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엄마의 욕심도 한몫했다.) 몇 주 지난 뒤, 수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다. 잘한 일이었다. 철학과 문학이 주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안목은 이 아이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임이 틀림없다.

애린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1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 해 휴식하는 것을 ‘갭이어’(Gap Year)라고 한다. 갭이어를 보내는 청년들은 보통 여행을 떠난다. 애린은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면서, 대학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물론 지지해줬다. 대학은 충분히 생각해보고 가고 싶은 때 가면 된다고 말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직 그 말은 안 나온다.) 올해 받은 A레벨 성적은 그때 쓰면 된다. 내가 받을 교육과 내 삶의 일정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다.

고교학점제, 많은 ‘필수’를 걷어내자

한국 교육도 그동안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2025년부터는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한다고 한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진로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 이수하고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할 경우 졸업을 인정받는 제도”(교육부 누리집)다. 반가운 일이다. 정말 그 취지대로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필요한 역량을 키우고, 잠자는 교실을 깨우면” 좋겠다. 그러려면 기존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큰 결단과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할 거다.

나는 고교학점제가 잘 작동하려면 학생에게 요구해온 많은 ‘필수’를 덜어내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콩쥐에게 자갈밭 갈고 깨진 독에 물 채운 뒤 잔치에 가라고 하는 모양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잔치는 못 가고, 부지런한 콩쥐들은 계속 일하고, 좌절한 콩쥐들은 계속 잠잘 가능성이 크다. 2025년 전면 시행이라니 아직 시간이 있다. 학생들이 자기 교육의 결정권을 갖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그러려면 어떤 조건을 마련해줘야 하는지 많은 이가 함께 상상해보면 좋겠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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