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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29년형’도 n번방은 무시했다

대법원은 ‘양형기준’ 높였으나 주요 가해자만 처벌될 우려도
등록 2020-09-26 00:41 수정 2020-09-28 01:53
2020년 7월 김영란 양형위원회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0년 7월 김영란 양형위원회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9월15일,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날 하루 동안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에 대한 온라인 기사는 160건가량 쏟아졌다. 대부분 아동 성착취물 제작 ‘최대 29년3개월 징역형’ ‘무기징역까지 가능’ 등의 제목을 달았다. 그동안 없던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이 마련됐다는 것보다 ‘박사’ 조주빈, ‘갓갓’ 문형욱 등 성착취범이 최대 29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겠다는 전망에 누리꾼의 시선이 집중됐다. 누리꾼은 새로운 양형기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제목에 ‘29년’을 부각한 기사 중, 댓글이 많이 달린 5개를 선정해 ‘민심’을 살펴봤다.

누리꾼들 “처벌이 약하다”

<연합뉴스> ‘성착취물 제작 최대 징역 29년3개월… 청소년 성폭행보다 엄격(종합)’, MBC ‘아동 성착취물 제작, 최대 징역 29년3개월’, <한겨레> ‘n번방 범죄 뿌리 뽑게… 징역 최고 29년’, JTBC ‘아동성착취물 제작, 최대 29년형 처해진다… 양형기준안 확정’, <서울신문> ‘성착취물 제작, 최대 29년 징역…조주빈 적용 안 되는 이유(종합)’ 등 5개 기사엔 댓글 총 1309개가 달렸다. 댓글에서 많이 언급된 단어는 ‘법’ 279번, ‘최소’ 190회, ‘최대’ 181회 순이었다. 댓글에 ‘법’을 언급한 누리꾼은 ‘가해자를 위한 법안이다’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가해자가 되는 게 덜 억울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최소·최대’ 두 단어가 언급된 댓글은 “최대 형량이 아닌, 최소 형량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뒤이어 ‘형량’ 134회, ‘처벌’ 95회 언급됐다. 누리꾼은 “29년이라는 형량과 처벌도 (디지털성착취범에게는) 약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과 관련된 기사인데도, 61회나 언급된 의외의 인물이 있다. 아동 성범죄자인 ‘조두순’이다. 11월 출소를 앞둔 조두순의 형량이 12년인데, 디지털성범죄 가해자의 형량이 더 높을 수 있냐는 의견이었다. ‘판사’(59회)도 눈에 띄게 언급되는 대상이었다.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에게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한 것처럼 디지털성범죄에 관대한 재판부에 대한 분노다. “가해자가 결혼해서, 어려서, 초범이라서, 반성문을 써서, 어릴 때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서 등의 이유로 작량감경할 게 분명한 판사”라는 댓글도 보였다.

불법촬영물과 성희롱 발언이 오가는 텔레그램 대화방에선 가해자들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참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화방A(참여자 982명), 대화방B(참여자 1117명), 대화방C(참여자 1794명)를 살폈다(2020년 9월19일 기준). 권고안이 발표된 뒤 5일 동안 2~3시간 간격으로 모니터링했지만(자정부터 오전 9시까지 제외), 양형기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이는 없었다. 되레 여전히 텔레그램에서 불법촬영물을 공유해달라는 가해자를 목격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하기 전, 가해자들이 양형기준이 ‘29년3개월’까지 될 것이란 뉴스에 겁먹고 방에서 나가거나,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권고안이 마련된 자체에 불만을 토로할 거라고 짐작했으나, 오산이었다. 그들의 안중엔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 권고안은 없었다.

버젓이 불법촬영물 구하려는 가해자들

새롭게 마련한 양형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먼저 판사들의 ‘작량감경’이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 중 아동 성착취물 제작 부분은 최대 형량이 29년3개월이지만 기본 형량이 최소 5년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판사의 재량에 따라 형량은 천차만별일 것이 예상된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서 피해자를 지원하는 원민경 변호사는 “양형기준안이 있어도 범죄의 특성을 판사가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재판이 달라진다”며 재판부의 변화를 촉구했다.

우려되는 또 한 가지는 n번방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사’ 조주빈, ‘갓갓’ 문형욱 등 주요 가해자만 ‘보여주기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국민은 디지털성착취 가해자 몇 명이 아니라, 그 방에 입장했던 ‘모두’의 엄벌을 원한다. 디지털성범죄는 누구나 ‘불법촬영’ 걱정 없이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라졌다’ 말할 수 있다. 주목받는 가해자 몇 명만 강력 처벌한다고 끝날 범죄가 아님은, 건재한 텔레그램 대화방들, 검거되지 않은 ‘성착취물’ 관전자 수가 증명한다.

서울·인천·경기 지역 23개 노선 730개 지하철역 중 불법촬영 위협에 ‘양호’한 역은 ‘양평역’ 단 한 곳이다(2020년 6월 기준). 2019년 경찰청과 KT 빅데이터 분석 전문가 등이 협업해 개발한 생활안전지도 ‘지하철 디지털성범죄 위험도’를 보면, 불법촬영 범죄가 얼마나 시민의 일상을 위협하는지 한눈에 보인다. 위험도는 양호-주의-의심-위험-고위험 5단계로, 불법촬영 범죄 발생 건수뿐 아니라 지하철역별·출구별 유동인구 수, 혼잡도 등을 종합해서 고려한다. 성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하철 2호선의 경우 주의 1곳, 의심 19곳, 위험 30곳, 고위험 1곳이다. 일상에서 더 강력한 법의 보호가 필요함을 체감하고 있다.

이의 제기는 양형위원회로

이번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은 처음 설정되는 만큼 향후 여러 공방을 거치며 더 다듬어질 것이다. 양형위원회는 앞으로 있을 의견조회, 공청회 행정예고 등의 절차를 걸쳐 12월 최종의결을 할 예정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104차 회의 의결안)에 대한 의견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10월21일까지 예고사항에 대한 의견(찬반 여부와 그 이유)과 이름(단체인 경우 단체명과 그 대표자 이름)을 적어 양형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하면 된다.

추적단 불꽃

*의견 제출할 곳
[우편번호 06590]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219(서초동) 대법원 동관 235호
수신자: 양형위원회 위원장
전화: 02-3840-1926, 팩스: 02-3476-8042
전자우편: sentencing@scourt.go.kr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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