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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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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불량국가’ 낙인이 코 앞에

ILO 핵심협약 비준 압박하는 한-EU FTA,
위반 판단되면 FTA 사상 첫 노동 위반 사례
등록 2020-11-21 01:20 수정 2020-11-21 10:26
2020년 11월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연 ‘ILO 핵심협약 비준 준비를 위한 입법 공청회’에서 진술인으로 참석한 이승욱 이화여대 교수(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호규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 이승욱 교수, 김희성 강원대 교수, 장정우 한국경총 노동정책본부장, 이태희 중소기업중앙회 스마트일자리본부장. 공동취재사진

2020년 11월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연 ‘ILO 핵심협약 비준 준비를 위한 입법 공청회’에서 진술인으로 참석한 이승욱 이화여대 교수(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호규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 이승욱 교수, 김희성 강원대 교수, 장정우 한국경총 노동정책본부장, 이태희 중소기업중앙회 스마트일자리본부장. 공동취재사진

“한국과 유럽연합(EU)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할 의무를 부과하는 조항이 2011년 7월1일부터 발효됐다. 그 관점에서 한국의 담당 기관이 이 사안과 관련해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유럽연합 쪽의 표현은 단호했다. 10월8∼9일 열린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전문가 패널 마지막 화상회의 자리에서다. 이날 회의는 2019년 12월 분쟁 절차를 개시한 유럽연합 쪽 전문가 로랑스 부아송 드 샤주르네 교수(스위스 제네바대)와 한국 쪽 전문가인 이재민 서울대 교수, 제 3국 의장 자격의 질 머리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대 교수 등 전문가 3명이 던지는 질문에 한국과 유럽연합 양쪽 정부 대표들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회의 내용은 고용노동부와 유럽연합이 11월18일 누리집에 동시에 올리는 방식으로 공개됐다.

EU “한국 정부 선량한 관리자 의무 안 해”

같은 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도 ‘ILO 핵심협약 비준 준비를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환노위는 11월30일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을 비롯해 교원노조법, 공무원노조법 등 핵심협약 비준과 직결된 법 개정안 심사에 나선다. 환노위 여당 간사인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쪽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9일까지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당 반발이 만만찮아 상임위원회 통과 과정에서 난관이 예상된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공청회 때 “노사정이 모두 반대하는 노조법 개정이 말이 되느냐. 이렇게는 통과 못 시킨다. 회사가 무너지고 경제가 위태로운 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국민 대다수 생각”이라고 말했다.

핵심협약은 ILO 190개 협약 중에서도 노동권 보장의 가장 기본이 되는 8개로, 우리나라는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 관련 제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와 제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의 원칙 적용), 강제노동 관련 제29호(강제 또는 의무노동)와 제105호(강제노동 폐지) 등 4개를 비준하지 않아 국제적 비판의 대상이 돼왔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때와 2006·2008년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 때도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급기야 유럽연합은 한국과 맺은 FTA가 2011년 발효된 뒤에도 한국 쪽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것은 협정 위반이라며 2019년 12월 분쟁 해결 절차인 전문가 패널 소집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10월9일 마지막으로 열린 한-유럽연합 FTA 전문가 패널 화상회의 자리에서도 양쪽은 쟁점마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다. 우선 유럽연합 쪽은 한국이 ILO 회원국으로서 결사의 자유 원칙을 존중하고 증진하며 실현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기구 가입 때부터 부담하며, FTA 제13장(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 4조 3항은 이를 한국과 유럽연합 사이에 법적 구속력 있는 의무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ILO 핵심협약 중 제87·98호 등의 비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ILO 쪽에서 반복해서 지적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국내 법제도 정비를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반면 한국은 “(유럽연합 주장의 토대가 되는 ILO 헌장과 1998년 기본권 선언은) 어떠한 독자적 법적 의무도 부과하지 않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다며 법적 의무는 아니라고 맞섰다. 이를 이유로 FTA 위반이라는 유럽연합 해석은 과도하다는 주장이다.

핵심협약 법안 “12월9일 통과 목표”라지만

한국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관련 문제가 결국 양쪽 무역 관련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FTA 위반이 될 수 없다며 유럽연합 쪽을 공략했다. FTA 제13장에 “노동 및 환경 문제의 무역 관련 측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양 당사자에 의해 채택되거나 유지되는 조치에 적용된다”고 적혀 있는데, 유럽연합 쪽이 무역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럽연합은 “위반을 입증하기 위해 해당 조치가 양 당사자 간 ‘무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줄 의무가 (유럽연합에) 없다”고 반박했다.

마지막 심리가 끝남에 따라 전문가 패널들은 한국의 FTA 위반 여부 판단이 담긴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심리 뒤 45일 안에 내게 돼 있어 규정상으론 11월23일까지 나와야 한다. 하지만 더 늦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결정 주도권은 3국 의장 질 머리 교수가 쥐었다. 패널들은 위반 여부와 함께 한국 쪽에 권고 또는조언을 할 수 있다. 권고를 받으면 양쪽 국장급 정부 관계자가 참여한 ‘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가 그 이행을 점검한다.

위반에 따른 권고 판정이 나올 경우 그 후폭풍은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은 세계 FTA 역사상 국제노동 기준을 위반한 첫 번째 국가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다. 권고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유럽연합 쪽 보복이 뒤따를 수 있다. 한-유럽연합 FTA는 이 경우 특별한 제재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화상 심리 때 “피소국이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무역 양허 중단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면서도 “국제법에 따라 기타 적절한 대응책을 채택할 가능성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개별 회원국 차원의 제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승욱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는 국회 공청회에 진술인으로 나와 “향후 통상관계에서 상당한 리스크(위험요인)로 작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세 혜택 철회 등 무역제재와 벌과금 부과가 함께 규정된 한-미 FTA, 벌과금 부과가 규정된 한-캐나다 FTA에도 동일한 기준이 노동 관련 장의 내용으로 돼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캐나다도 노동분쟁 해결 절차를 발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교역 상대국에 노동권 준수를 요구하겠다고 말하는 한편 모든 통상거래에서 강하고 집행 가능한 노동 규정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일 뜻을 밝혔다.

미국, 캐나다와도 통상 분쟁 가능성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분쟁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ILO 헌장과 98년 선언에 근거한 ‘결사의 자유 원리’의 법적 성격과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전세계 FTA 상당수가 이 국제문서를 인용해 당사국 의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나올 전문가 패널의 판단은 이후 유사한 조항에 대한 분쟁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이 국제노동 기준을 지키는 선량한 국제사회 일원이 될지, 아니면 불량국가로 낙인찍힐지를 판가름할 두 개의 큰 파도가 2020년 12월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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