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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사회학] 코로나19 이전, 그 지옥이 천국이었다

재난 이후 과거를 낭만화하는 ‘레트로토피아’, ‘이후의 이전’을 극복해야 ‘이후의 이후’가 온다
등록 2020-11-22 11:13 수정 2020-11-24 01:47
2020년 3월 코로나19로 대학교 개강이 미뤄진 가운데 인근 카페에서 온라인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0년 3월 코로나19로 대학교 개강이 미뤄진 가운데 인근 카페에서 온라인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한겨레 김혜윤 기자

재난이 시작되고 지속하는 시기에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건 이전의 삶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숨 쉬며 살던 삶, 친구들과 술집에서 만나 침 튀겨가며 얘기하고, 시간 나면 여기저기 여행하며 낯선 사람과 어울리던 그런 삶이 무엇보다 그립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전 일상이 그토록 소중한 줄 몰랐다며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인간의 역량이란 결국 ‘유연함’

한 대학 강사의 말이 상징적이다. 그는 코로나19 이전 강의실이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학생들 참여를 이끌어내기가 참 힘들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이유였겠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을 때 절망감이 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주어진 업무만 소극적으로 하는 냉소적인 존재가 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역량 문제로 여기며 소진될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 그는 강의실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처음 해보는 온라인 강의인지라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다른 강사들의 경험을 참조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와 비대면-비접촉 강의는 생소한 것이었다. 당연히 혼란이 일어났고, 열심히 할수록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자신은 소진돼갔다. “그때는 거기가 지옥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지옥이 되고 보니 그 지옥은 천국입니다.”

재난을 당한 뒤, 이후의 삶을 특징짓는 건 혼란과 고통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인간은 이전에 자신이 겪은 것에 바탕을 두고 다음 경험을 구성하거나 거기에 대처한다. 이렇게 경험을 연속적으로 해가며 비슷한 일들을 한 유형으로 묶는다. 어떤 유형을 발견하면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가 훨씬 쉽다. 이전 경험에 근거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인간의 역량이란 결국 ‘유연함’이라고 했다.

이 유연함이 작동하려면 유형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사람을 만날 때, 이전에 자신이 만난 어떤 유형의 사람과 비슷한지 먼저 탐색한다. 그다음 그를 어떤 유형으로 분류할지 판단한다. 만일 그가 이전에 자신이 경험한 유형이라면 문제는 쉽다. 유형이 발견되면 그것을 묶어 ‘상위 유형’으로 만들어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를 만든다. 유형의 체계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이 대처 가능할 때, 인간은 일종의 ‘자율주행’ 모드로 세상을 살아간다.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혹여라도 그렇지 않고 전혀 새로운 일을 만나면 새 유형을 생성하고 전체 유형을 조정한다. 후자의 작업은 아주 힘들다. 한 유형을 새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체 유형 체계를 조정해야 한다. 사실 이 점 때문에 관성적으로 다른 유형을 조심성 없이 이전 유형으로 판단했다가 사달이 벌어지곤 한다. 그래도 이 전체 유형 체계의 조정은 있는 것을 고쳐 쓰는 것이기에 완전히 ‘맨바닥에 헤딩’하는 일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코로나19 이전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19년 국립도서관 안에 있는 카페의 평온한 모습. 한겨레 자료

한국 사회는 코로나19 이전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19년 국립도서관 안에 있는 카페의 평온한 모습. 한겨레 자료

유형 체계를 무력화하는 재난

재난이 사고인 이유는 기껏 경험을 통해 만들어놓은 이 유형과 유형 체계를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전 유형에 끼워넣으려 해도 끼워지지 않는 것이 사건이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라도 참조하려 한다. 급한 일이 있으면 인터넷을 검색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특히 전문가의 소견을 듣고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지 참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재난이 사건인 이유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아가 전문가들 역시 이전에 겪지 않은 일이라 일시적으로 참조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일시적이지만 참조점이 붕괴해버린다. 모두가 각자 판단하고 알아서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맨바닥에 헤딩’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시 하나하나 새롭게 경험해야 하고 새롭게 생각하고 유형을 발견하고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 생각과 행동에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그 각각의 판단과 행동에 각자 책임져야 한다. 이는 엄청난 부담이 된다. 사람들의 삶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 된다. 따라서 과부하를 견디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일일이 신중하게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다. ‘배째라’가 나오고 ‘운명론’이 등장한다. ‘어쩌라고’라며 무책임해지거나 ‘운명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외면한다. 사유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삶의 위축은 당연히 이전 삶을 그리워하게 한다. 삶이 위축되고 나서야 비로소 과거의 삶이 자유로운 ‘활동적 삶’이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앞에 나온 강사의 말대로라면, 과거에 내가 지옥이라 여겼던 것도 지금과 비교하면 천국이라 생각하게 된다. 과거는 낭만화하고 이전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그리움)가 생겨난다. 상실에만 초점을 맞출 때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이전 삶을 낭만화해 그리워하고 나아가 이상화하는 것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라고 했다.

레트로토피아는 이전으로 돌아가면 마치 새 삶을 시작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비정상’의 예외적 순간이 끝나고 이전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정상’이 될 것 같다. 상실한 것의 소중함을 이제는 알기에 이전에 자신이 얼마나 관성적으로 살았는지 반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알차게 살아가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이 재난이 끝나기만 하면 잃어버린 ‘삶’이 회복될 것처럼 말이다.

재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레트로토피아가 만드는 환각이다. 지금의 재난이 종식된다고 해도 이전 삶으로 단순히 회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강의실을 예로 들어보자.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전면적으로 등교해 강의실에서 학생을 만났을 때, 그 강의실은 과연 이전의 그곳일 수 있을까? 마치 코로나19 발생 이후 비대면/비접촉 온라인수업이 없었다는 듯, 과거의 그 강의실처럼 대면/접촉을 하며 이전처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이미 학생들 몸이 비대면 강의실에 익숙해졌다. 대면 수업이 요구하는 집중하고 긴장하는 몸 대신, 자신이 시간과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사용하는 비대면 상호작용을 편안해하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자유를 더 효율적으로 쓰는 방향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긴장하고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몸으로 전환하며 새 상호작용에 적응한다.

이들이 이렇게 바뀐 몸으로 다시 강의실에 왔을 때, 이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면/접촉을 중심에 둔 상호작용으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자신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배치하지 못하는 시공간에 짜증을 내고, 비대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하고 ‘예의’를 갖춰야 해서 힘들 것이다. 그 결과, 대면 강의실과 비대면 강의실의 격차는 곱절로 벌어질 것이다. 재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 상황을 가리킨다.

레트로토피아적 사고는 ‘상실된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반면 레트로토피아는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전 삶의 추함이나 모순은 외면한다. 이후 삶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이 과연 사고로 갑자기 나타난 재난인 것인가? 아니면 이 어려움은 이미 이전 삶에 배태됐다가 사건이 조명탄이 되어 비로소 드러난 것인가? 재난이란 혹시 외면하고 있던 이전 삶의 모순이 응축됐다가 한번에 터져나온 사건은 아닌가?

사고 그리고 또 하나의 단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단절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상실로서 단절이다. 재난이 일어나 과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걸 갑자기 상실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상실이 발생한 원인이 바로 이전 삶에 있었음을 깨닫고 이전 삶과 단절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절이 사고로 발생했다면, 두 번째 단절은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래야 우리는 이전 삶으로 퇴행하는 게 아니라 ‘이후의 이후’로 이행할 수 있다.

내가 ‘이후의 이후’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두 시공간이 동시에 극복돼야 한다. 하나는 상실된 채 살아가는 이 혼란스러운 이후의 삶, 그리고 또 하나는 이후의 삶을 배태한 이전의 삶이다. ‘이후의 이후’란 ‘이후’만이 아니라 ‘이후의 이전’을 극복하고 앞으로 밀고 나가는 이행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전 삶’을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삶’에서 드러난 ‘이전 삶’의 암흑을 직시하며 미래로 날아가는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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