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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택시운전 판단도 인공지능이 한다

등록 2020-11-22 12:11 수정 2020-11-24 22:44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허겁지겁 택시를 탔다. 아니 ‘불렀다’. 시간을 아끼는 데는 택시앱이 도움이 되니까. 순식간에 택시가 잡히고 뒷좌석에 앉아 급한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차 안에서 통화해 죄송하다고 하자 기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고마운 날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 고마우신지요?” “교대하러 차고지로 가야 하는데, 방향이 맞는 콜이더라고요.” “차고지 방향이 아닌 콜은 안 받으면 되잖아요?” “우리 회사가 ○○○에 인수됐기 때문에 콜이 뜨면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럼, 그 콜이 적절한 경로인지는 누가 판단하나요?” “그 판단은 인공지능이 해서 저에게 주죠. 그래서 저는 거부할 수 없어요.”

마을버스 기사님의 실행지

기사님 설명은 이랬다. 교통 상황과 경로를 계산해 A에서 B로 가는 데 30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택시 운전사가 30분 안에 그 일을 해낼 수는 없다. 계산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운전이 미숙하거나 성격이 느긋한 운전사는 40분이 걸릴 수도 있고, 또 가는 길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 계산에 그런 고려는 들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운전 능력 기준이 상위권 기사에게 맞춰졌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운전을 매우 잘하지만, 저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장이 시키면 욕이라도 하겠는데, 이건 기계한테 감정노동 당하는 기분이 들죠.”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의 책 <국가처럼 보기>에 ‘실행지’(實行智)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제 현실에서 얻어진 지혜로, 이런 지혜는 단순화할 수도 수치화할 수도 일반화할 수도 없다. 쉬운 예로, 마을버스 기사를 생각해보자. 마을버스를 모는 일엔 운전을 잘하거나 체력이 좋다는 조건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일요일이면 교회 근처에 세우는 차가 많아 정체된다거나, 멀리서 할머니가 뛰어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거나, 그런 종류의 지식이 우리 동네 마을버스를 멀쩡하게 운행하게 한다. 그런데 마을버스 기사님들의 성과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효율성 높은 사람에게 임금을 더 주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 과정에서 실행지는 사라져버린다.

“어느 길로 가기 원하세요?”

스콧은 ‘좋은 의도에서’ 국가가 기획한 프로젝트들이 왜 실패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런 개념을 썼다. 이런 기획의 바탕에 있는 과학·기술 진보에 대한 믿음을 비판하며, 그는 이에 맞서는 방법이 ‘정치’라고 했다. 왜 기술에 맞서는 것으로 ‘정치’를 말하는지, 나는 2020년 인공지능 시대, 택시 기사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정치란 인간이 가진 자발성의 영역이다. 정치는 ‘최선의 효율’을 찾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롭게 실행하며 의사소통으로 합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름길을 아는 기사님을 만나 30분 거리를 10분 만에 갔다는 무용담(?)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 택시를 타면 기사님마다 “어느 길로 가기를 원하세요?”라고 묻는다. “더 잘 아실 텐데, 기사님이 가고 싶은 길로 가세요”라고 말하면 “그럼 내비게이션대로 가겠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게 비단 택시 운전사들만의 일일까. 몇 년 전, 한 영리한 기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저는 어쩌다 이 길을 운전하지만, 손님은 이 시간, 이 길을 저보다 더 많이 다녔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가야 더 빨리 가는지 저에게 알려주시죠.” 그분은 웃으며 나의 실행지를 공유했다. 그분이 인공지능에 감정노동 당하고 있지는 않겠지?

김보경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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