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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루저’ 사회, 징징대도 괜찮아

[아픈 몸] 건강이 ‘스펙’이라 아픈 몸은 ‘루저’가 되는 사회, ‘질병권’이 필요해
등록 2020-12-27 05:32 수정 2020-12-28 23:42
그림 이영리, 허클베리북스 제공

그림 이영리, 허클베리북스 제공

새해가 와버렸다. 더 강해진 코로나19와 함께. 2021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짐하자니 막막하고 다짐을 안 하자니 불안하다. 2021년에 크게 기대하는 건 없지만 2020년처럼 살고 싶진 않다.
새해맞이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최소로 행동하고 최대 효과를 볼 수 있는 ‘2021년 가성비 실천’을 제안한다. 2021년에 같이 갈 것은 무엇인가. 컵과 그릇 재사용, 전자제품 사후관리(AS)는 기본이다. 무기력한 자아와 몸도 조금만 고치면 꽤 쓸 만하다. 노력만으로 될 수 없는 실천은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아픈 가족과 아픈 몸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2021년 ‘뉴트로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기)’는 시시해 보여도 만만하진 않다. 나와 가족, 일상과 미래, 공간과 환경을 바꾸는 첫 단추다. 일단 사흘만 넘겨보자. _편집자주

10년차 직장인 김지연(가명)씨는 최근 자궁에 통증을 느꼈다. 산부인과를 방문했지만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만 했다. 올해 유달리 일이 몰려 10∼12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는 날이 잦았던 그는, 누적된 피로감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지난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로 여러 피부과를 다니다 지쳐버린 경험이 있었다. 다른 병원을 찾는 대신 일단 쉼을 택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몸이 망가졌다. 1년 동안 퍼스널트레이닝(PT·개인 맞춤 운동지도)을 받으며 체력을 키웠지만 내장질환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조한진희 작가가 기획·제작한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장면. 사진 김덕중, 다른몸들 제공

조한진희 작가가 기획·제작한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장면. 사진 김덕중, 다른몸들 제공

건강이 ‘스펙’인 사회, 아픈 몸은 ‘루저’

지연씨처럼 ‘아픈 몸’을 안고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다. 병원에 입원해 큰 수술을 받을 정도의 질병은 아니더라도,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는 걸 어렵게 하는 통증을 삶의 반려인 양 더불어 산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2019년 직장인 671명에게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3.9%가 “입사 전보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했다. 이들이 겪는 질병은 화병·우울증 등 스트레스성 정신질환(18.9%), 소화불량·위궤양 등 소화기장애(16%), 번아웃증후군(12.6%) 등이다. 원인은 운동량 부족(19%), 상사 괴롭힘·동료 스트레스(15.8%), 사무실 여건·근무환경(13.1%), 업무 강도(13.1%) 등이 꼽혔다.

하지만 ‘아픈 몸’에서 환경·사회적 요인은 대개 소거된다. 대신 “자기관리가 부족하다”거나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말이 뒤따른다. 심지어 난치성 질환을 지닌 이들에게도 이런 시선은 여과 없이 투영된다. 근육을 쥐어짜는 통증과 휴지기가 반복해서 오는 홍수영씨는 “모든 것은 다 내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거나 “병의 증세가 아닌 태도의 문제가 아닌지 검열해보라”는 말을 들은 경험을 털어놨다.(<몸과 말>, 허클베리북스 펴냄)

이처럼 질병의 원인이 오롯이 개인에게 귀결되는 현상은, 한국 사회가 ‘비장애인’을 기본값으로 둔 건강 중심 사회인 탓이 크다. 이런 사회에선 건강이 개인의 노력을 바탕으로 쟁취할 수 있는 일종의 ‘스펙’처럼 여겨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씨는 “과거엔 몸이 아프면 불운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는 ‘건강 판타지’가 있는 지금은 실패자, 즉 ‘루저’로 취급된다”고 말한다. “산재, 환경오염, 열악한 주거환경, 각종 위험물질 등이 관리되지 않고 고용 불안정, 성과주의, 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잖아요. 고혈압, 당뇨, 심혈관계 질환, 디스크, 터널증후군 등 다들 개성처럼 질병을 하나씩 갖고 있고 상당수 질병은 노력해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요. 그런데도 질병의 책임을 개인 생활습관에서 찾는 건 질병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은폐하는 거죠.”

‘완치와 죽음 사이’에 대한 이야기

만성질환자의 사회에선 ‘완치와 죽음 사이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아픈 몸으로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다. 조한진희씨는 이를 ‘질병권’이라고 부른다. ‘도달 가능한 최고의 건강’을 직접적 목표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건강권과는 차이가 있다. 질병을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잘 아플 권리’를 고민한다는 개념이다. “완치되면 좋겠지만, 죽을 때까지 질병을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상당수”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사회 기준의 변화도 함께 고민한다.

질병권을 말할 때, 노동환경 논의는 필수적이다. 모든 사람의 몸이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를 소화하도록 설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성 편두통을 오랜 기간 앓아온 민윤씨는 야근이 잦고 철야근무도 종종 하며 주 6일씩 일해야 했다. 이 직장생활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통증” 때문에 지속하기 힘들었고 결국 그만둬야만 했다.(<편두통, 한없이 예민한 나의 친구>, 궁리 펴냄)

‘주 3∼4일, 하루 4∼5시간’ 정도 근무가 가능한 몸도 양질의 노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조한진희씨는 “예컨대 암처럼 완치 판정을 받아도 계속 (관리해야 하는) 질병을 갖고 있어 하루 5시간 노동만 가능한 몸이 (일터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하다. 강의하며 만난 20~30대 취업준비생들은 중증 질병을 과거에 앓았단 이력 때문에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병력을) 숨긴다”고 말했다.

아픈 몸들에게 제대로 된 노동환경을 보장하는 건 이들을 빈곤층으로 이동시키는 위험요소를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완치 판정을 받은 암환자가 암과의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일자리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암환자가 되는 것도 두려웠지만, 지나고 보니 빈곤이 더 두렵다더라. 아픈 몸은 의료비와 생활비가 더 많이 들 수밖에 없는데 노동권 보장이 안 되니 경제적 기반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조한진희씨)

크론병을 앓는 대학생 안희제씨는 학습권을 말한다. 매일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그에겐 ‘출결점수’가 필수적인 대학 수업을 빠짐없이 수강할 수 있단 보장이 없다. 그는 매 학기 교수에게 수차례 전자우편을 썼다. 국가에 등록된 장애인은 아니지만, 건강한 몸과는 다른 자신의 질병을 알리고 몸 상태에 따라 결석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희제씨는 교수의 재량과 호의에 기대는 대신 “‘질병 결석’이 제도화되길 바란다”고 했다. 대부분 학교에서 만성질환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휴학’인데, 이는 “건강하게 회복해서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아픈 몸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휴학을 권하기보다 아파도 잘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되물었다.

조한진희 작가가 기획·제작한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장면. 사진 김덕중, 다른몸들 제공

조한진희 작가가 기획·제작한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장면. 사진 김덕중, 다른몸들 제공

‘공적 돌봄’ 기반을 위하여

‘잘’ 아프기 위해서는 돌봄 확장도 필수적이다. 조한진희씨는 공적인 돌봄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시민들의 연대를 동시에 제안한다. 하나는 보건소를 활용한 단기 요양원, 또 다른 하나는 “아픈 몸이 아픈 몸을 돌볼 수 있는” 이른바 ‘건강 두레’다.

‘보건소 단기 요양원’이란 아이디어는 치매·뇌졸중처럼 중증 질환일 때만 장기간 입원하는 현재 요양원 형태가 아니라, 심한 감기몸살에 걸렸거나 수술 직후 회복이 필요한 짧은 기간에 이용할 수 있는 공적인 돌봄 체계를 고민하다 나왔다. ‘건강 두레’는 누군가를 2시간 돌보면, 이후 내가 돌봄이 필요할 때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요청해 쓸 수 있는 일종의 ‘공동 돌봄’ 모임이다.

이런 기반이 마련되면 1인 가구는 물론이고, 맞벌이나 양육 등을 이유로 당장 돌봄을 제공할 가족 구성원이 없는 2∼3인 가구도 안정적 돌봄을 받을 수 있다. 조한진희씨는 “질병과 노화는 누구에게나 오고 아픔도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런 실험은 ‘잘 아플 수 있는 삶’ ‘함께 돌보는 사회’를 만드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아픔을 마음껏 ‘징징대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안희제씨는 <난치의 상상력>에서 ‘찡찡(징징)의 공동체’란 개념을 말한다. 가볍게 “밥 먹자”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아픔을 자꾸 말해보자는 얘기다. 의료적인 조언이나 무작정 쾌유를 빈다는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한다고 질환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를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는 “아픔을 말하는 걸 종종 ‘찡찡대기’로 여기고 사회는 이를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나 의존적인 태도라고 받아들이지만, 바로 이 의존성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발화를 통해 아픈 사람들이 서로 돕고, 더 나아가 아프지 않은 사람과도 연결될 수 있을 때 “더욱 안전하게 함께”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병원에 간다고 해결되지 않는 아픔은 사회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잖아요. ‘찡찡대는’ 말하기가 많아질 때, 질병과 아픔을 공적으로 논의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책감부터 벗어나자

건강정보가 과잉된 사회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노력하면 누구나 건강할 수 있다’는 환상보다 ‘어떻게 아파야 하는지’를 배우는 일 아닐까. 질병과 싸우는 대신 수용하는 법을 찾은 이들의 조언은 이렇다.

“‘내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내 안에 깊게 똬리를 튼 자책감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건강관리를 해도 이를 무색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의 아픔을 사회적으로 해석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조한진희씨)

“내 몸이 내가 살아가는 환경과 사람·음식·약·물 등에 영향받으며 바뀌어가는 ‘열려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이를 토대로 ‘몸’에 대한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해보거나 글을 통해 표현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안희제씨)

지연씨도, 우리도 2021년은 아픈 몸과 불화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길.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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