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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가해자 ‘그럴 만한 사람’이란 없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의 성폭력 사건으로 또 드러난 ‘가해자 신화’의 위험
등록 2021-01-29 17:57 수정 2021-01-30 02:08
배복주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장이 2021년 1월25일 국회에서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배복주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장이 2021년 1월25일 국회에서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2020년 10월 취임한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해 2021년 1월25일 직위해제됐다. 장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구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피해자다움’만큼이나 ‘가해자다움’도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직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여러 번 컨설팅한 경험이 있는 권수현 여성학자도 ‘가해자다움’에 대한 신화가 성폭력의 현실과 맥락을 은폐한다고 말한다. _편집자

성폭력 고정관념은 주로 ‘피해자=좋은 사람’ ’가해자=나쁜 사람’이라는 문법으로 숱한 변이를 거듭해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다. 가해자 범주에는 반사회적 인성의 소유자, 괴물, 악마, 범죄자, 기타 등등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상상 또는 신념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일련의 신념 체계로 현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신화’(myth)라고 할 수 있다.

은폐되는 성폭력 현실·정황

가해자 신화는 무엇을 은폐하는가. 첫째, 성폭력을 일부 나쁜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예외적 사건으로 간주하게 함으로써 성폭력의 일상성, 누구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젊은 여성, 지위 또는 고용이 불안정한 여성은 항상 성적 침해 속에 구직 활동과 노동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숱한 통계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노동 현장에서 성적 침해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 특히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남성, 또는 그러한 순간에 있는 남성이다.

그 영향력이란 지방자치단체장이 가진 제왕적 권력일 수도 있고, 사회적 신망이나 존경심과 같은 상징 권력일 수도 있고, 여성을 잠재적 유혹자로 간주하는 성의 이중규범 같은 담론 권력일 수도 있고, 고용상의 이익 또는 사소한 부탁 등 피해자에게 휘두르는 크고 작은 이익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성적 측면에서 가해자 프로파일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럴 만한 위치’, 또는 ‘그럴 만한 순간’에 있는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둘째, 가해자는 특정한 생태계에서 출현하는데, ‘가해자=나쁜 사람’이라는 신화는 성폭력을 일부 나쁜 사람이 저지르는 ‘사건’(case)으로 개인화/개별화해 가해자가 출현한 ‘정황’(context)을 은폐한다. 지자체장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조직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확인된다. ①우월적 지위에 부여된 권력이 업무 범위를 넘어서 일종의 신분적, 계급적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점, ②상급자에 대한 ‘모시기 노동’이 관행으로 자리잡혔다는 점, 그리고 ③성폭력이 ‘모시기 노동’의 성별화된 양상과 관련됐다는 점이다. 남성은 주로 ‘음주, 담배, 등산, (상급자의 전원주택 짓기에 동원돼 벽돌을 나르는) 벽돌 모시기’에, 여성은 심기를 살피거나 달래주거나 응원해주는 ‘우쭈쭈 모시기’에 동원된다.

이런 조직의 구조적 특징은 정규직, 관리자 직급의 성비 불균형이다. 조직의 권한과 자원을 40~50대 남성이 독점하며, 그것이 이런 관행의 핵심 원인이다. 성폭력을 나쁜 사람이 저지르는 예외적 사건으로 간주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황이 무엇인지 질문할 수 없게 되고, 조직의 대응이 가해자를 응징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구조적 문제 해결이 요원해진다.

가해자 된 피해자 장혜영 의원

“성추행 건으로 당대표직을 물러나게 했다.” 지금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인터넷에 가장 흔하게 도는 가해자 옹호론 또는 관용론 중 하나다. 이 문장에서 생략된 주어인 장혜영 의원은 김종철 대표를 ‘사퇴시킨 행위자’로 설정됐다. 문제의 초점을 ‘성추행’이 아니라 ‘사퇴’로 이동시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집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 이는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미투 운동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피해자의 가해자화’ 현상에서 가해자는 불쌍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약자로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그래서 밥줄을 지켜줘야 하는) 가장’ ‘미투를 당한 존재’ ‘꽃뱀한테 물린 희생자’다. 이 담론의 효과는 대중의 동정·관용·위로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비난과 책임 추궁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향하게 한다.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대중의 상식, 즉 성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그때그때 정황상 가장 대중적으로 ‘먹힐 만한 것’을 이용한다.

조직 구성원 대부분이 ‘가해자=나쁜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가해자가 그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거나 측은지심을 품게 된다. 또한 이 고정관념은 일종의 ‘가해자 구하기’ 기획 도구로 활용돼, 가해자가 나쁜 사람 범주에 속하지 않기에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논리에 동원된다. ‘가해자=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잡힌 조직에서, 가해자는 그 생각을 상식으로 공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뒷배가 되어줄 것을 알기에 성폭력을 하거나, 성폭력이 드러난 뒤 2차 가해를 한다. 가해자와 구성원 사이에 집단적 공모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절한 노동환경이란 무엇인가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구제’란 흔히 피해자의 노동권 회복으로 지칭되곤 한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조직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피해자에게 회복할 노동권이나 노동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여성에게 적대적인 조직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피해 구제란 궁극적으로 피해자에게 적절한 노동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조직의 책임은 가해자 처벌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가 추가 피해를 겪지 않도록 조직 질서를 바로 세우고, 조직의 성폭력 문제 해결 역량을 높이고, 이후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탐색해 실행해야 한다.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는 ‘적절한 노동환경’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것을 창출하기 위한 혁신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미투 운동 이후 공동체적 사건 처리의 핵심 과제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집단적 공모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사람’(가해자)은 ‘그런 곳’(가해자 신화가 상식화한 곳)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권수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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