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이 드디어 꼴찌 신세를 면했습니다. 뉴스 신뢰도 얘깁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매년 세계 주요 국가의 디지털뉴스 이용 실태와 인식을 조사해서 ‘디지털뉴스 리포트’를 발간합니다. 한국은 이 보고서의 조사 대상에 처음 포함된 2016년부터 뉴스 신뢰도 부문에서 계속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2020년 “대부분의 뉴스를 거의 항상 신뢰할 수 있다”는 문장에 동의한 한국인은 21%에 불과했습니다.
2021년은 달랐습니다. 6월23일 ‘디지털뉴스 리포트 2021’이 공개됐습니다. 신뢰도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46개국 가운데 공동 38위를 기록했습니다. 여전히 하위권이긴 하지만 엄청난 선방(?)입니다. 뉴스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이들의 비율은 32%로, 전체 평균(44%)보다 한참 모자라지만 조사 시작 이후 처음으로 30% 선을 넘었습니다.
언론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반가운 소식일까요? 조사에 참여한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분석에 따르면, 신뢰도가 크게 오른 건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종 감염병 확산 국면에서 시민들이 정보를 얻기 위해 뉴스에 의존한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줬다는 겁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뉴스 신뢰도가 높아진 것을 보면 타당한 분석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언론이 노력하거나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게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언론이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순위가 다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위가 조금 올랐다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이번 기회에 신뢰도라는 지표의 한계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신뢰도가 언론계 중대 관심사가 됐습니다. ‘신뢰도 꼴찌’ 낙인은 언론의 실패를 비판하거나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 활용되는 전가의 보도였습니다. 신뢰도를 경영진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로 활용하거나, 신뢰도 향상을 조직의 핵심 목표로 삼는 언론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신뢰도가 높은 언론은 좋은 언론, 신뢰도가 낮은 언론은 나쁜 언론이라 규정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한국 시민이 다른 나라 시민보다 언론을 더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이 다른 나라 언론보다 더 나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2021년 신뢰도 최하위는 미국(29%)이 차지했습니다. 과연 미국 언론이 세계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계 최고 수준의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를 재평가해야 할까요?
사실 신뢰도를 언론의 품질이나 성과를 측정·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언론의 신뢰도 상승이나 하락은 언론사가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의 복합적 작용 속에 발생하는 현상이니까요(뉴스 신뢰가 어떤 변인에 따라 형성되고 결정되는지는 학술적으로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뉴스 신뢰도는 공적 영역 전반에 대한 신뢰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신뢰도 1위 국가는 핀란드(65%)였습니다. 조사 때마다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가 항상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정부, 의회, 법원, 검찰 등 공적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국가들입니다.
신뢰라는 사회자본이 잘 갖춰진 사회는 대체로 언론을 함께 신뢰하고,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언론도 함께 불신합니다. 물론 언론을 향한 불신의 일차적 책임이 언론에 있음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오로지 언론 탓만 할 순 없다는 얘깁니다. 한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정치와 사법 등 모든 형태의 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은 점이 미치는 영향도 따져봐야 합니다.
언론이 아무리 좋은 보도를 하더라도 신뢰 여부를 판단하는 시민들이 올바른 기준과 시각으로 언론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뉴스 신뢰도는 나아질 수 없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작용하는 뉴스는 본래 소비를 모두 마친 뒤에도 품질을 판단하기 까다로운 상품입니다. 좋은 뉴스보다는 선정적 뉴스가 노출되기 쉽게 설계된 포털 환경에선 이용자가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기 더욱 어렵습니다.
신뢰 여부를 평가하는 주체로서 신뢰하기 어려운 시민들도 있습니다. 이념적 편가르기에 매몰돼 진영 논리로 뉴스를 평가하는 시민들입니다. <뉴스타파>는 2019년 7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했다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적잖은 후원자가 <뉴스타파>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윤 전 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뉴스타파>에 사과와 칭송의 댓글이 쏟아졌습니다. 집 나간 신뢰가 정파적 이해관계 하나만으로 돌아온, 웃지 못할 해프닝이지요.
탈진실의 시대에는 객관적 사실조차 자신의 확증편향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는 시민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이 동의하는 사실과 관점을 전하는 뉴스만 믿는 세상입니다.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이 거짓말한다며 “우리는 유튜브만 믿어! 유튜브가 진실이야!”라고 외치는 시민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유튜브 채널은 과연 믿을 만한 품질의 미디어일까요?
‘디지털뉴스 리포트’ 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에서 양심적 언론으로 평가받는 <아사히신문>(45%)은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47%)보다 신뢰도가 낮습니다. 우경화된 일본 시민사회가 왜곡된 시각에서 언론을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뉴스 신뢰도가 추락하는 배경에도 언론을 싸잡아 ‘리버럴 편향’으로 보는 우파 시민이나 ‘기득권 편향’으로 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의 오해가 버티고 있습니다.
신뢰 추락을 방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언론 전반에 광범위한 불신 현상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언론은 사회에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킵니다. 사회 전체의 공적 인프라를 제고하는 차원에서 조사 결과를 분석하고 언론 전반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뢰도 담론은 다소 과잉된 측면이 있습니다. 신뢰도 순위나 수치 등락에 목맬 필요는 없습니다. 조사 결과를 신줏단지 모시듯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뢰도는 언론의 ‘성적표’가 아닙니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소통과 협력을 위해 함께 분발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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