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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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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손녀 셋을 두었다”

이종찬 이사장이 보내온 글
등록 2021-07-26 01:39 수정 2021-07-27 09:57
2021년 2월16일 경기도 남양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린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서 우당 이회영의 친손자이자 이석영의 종손인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뒤로 이석영의 초상화가 보인다. 남양주시 제공

2021년 2월16일 경기도 남양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린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서 우당 이회영의 친손자이자 이석영의 종손인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뒤로 이석영의 초상화가 보인다. 남양주시 제공

후손이 끊겼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 이하 호칭 생략)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생존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석영은 17세기 조선의 문신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후 내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자 걸출한 독립운동가 집안인 ‘경주 이씨 6형제’ 중 둘째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해가 저물어가던 1910년 12월30일 새벽,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여섯 형제는 집안의 재산을 전부 처분한 거금을 챙겨 가족 40여 명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던 신흥무관학교(1911~1920)도 이석영 형제들이 세우고 운영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강제 폐교되기 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지휘관과 전사들을 길러냈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여섯 형제 모두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그리고 일부 형제의 자녀와 사위까지 17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한겨레21>은 2021년 6월18일부터 최근까지 한 달에 걸쳐 이석영의 증손녀 김용애(86), 최광희(82)와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85)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인터뷰하고 관련 사진과 호적 자료 등을 열람했다. 이종찬은 석영·회영 집안의 추모·기념 사업을 도맡아온, 생존 후손 중 맨 웃어른이다.
짧게 잡아도 해방 전후인 1945년쯤, 더 위로는 거의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일에 대한 이들의 기억 일부는 헷갈리고 불분명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일관됐다. 이종찬은 7월20일 김용애·최광희와 만나 옛 기억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로 맞춰보고 사진 자료를 검증한 뒤 이들이 이석영의 혈육이자 자신의 7촌 조카(재종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_편집자주

이석영 선생은 절손된 것이 아니라 손녀 셋을 두었다

우리 집에서 영석(穎石) 이석영(李石榮)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하신 분으로 알려졌다. 그분은 엄청난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도 말년 중국 상하이에서 80세(만 79살) 무의탁 노인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그분은 두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미스터리처럼 사라지고 절손(絶孫)됐다.

큰 아드님은 이규준(李圭駿)으로 1896년생이시다. 1910년 망명 당시 15세(만 14살), 내 가친과 동갑내기였다. 다만 가친의 생일이 먼저라 형님이라 부르며 지냈다. 규준과 내 가친은 그 이듬해 신흥무관학교 2기로 같이 졸업했다. 그리고 이어 독립군으로 참여했다. 1919년 기미년 독립선언 이후 할아버지 형제들은 중국 베이징으로 이거했을 때 규준과 가친은 신흥학우단(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모임)을 중심으로 조직된 다물단(多勿團)의 전사로 나섰다. 다물단은 의열단과 마찬가지로 신채호 선생이 입안한 선언과 강령으로 모인 의열투쟁 조직이다. 차이가 있다면 다물단은 좀 더 아나키즘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중앙의 사령관이 있어서 전체 조직을 관장하는 그런 체계가 아니라 자유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념과 같이 뜻있는 동지들이 자유의사로 모인 강력한 대일항쟁조직이다. 그러므로 조직의 모양이나 활동 방책이 다양하다.

1926년 베이징에 거물 밀정이 있었다. 한말 벼슬도 했고, 의친왕의 스승이기도 한 그분은 한문의 대가였다. 그의 출중한 문장력 때문인가 중국의 돤치루이 정부의 시종무관부(侍從武官府) 부관으로도 재직해, 베이징 사회에서 가장 잘나가는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분은 일제에 협조해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해 국내에 보내는 작업을 비밀리 수행했다. 그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분으로 여러 분이 꼽혔는데 유명한 박용만(朴容萬) 선생도 한 분이셨다.

사실 우당 이회영을 그분이 회유의 목표로 두고 접근해 교유했다. 그러던 차 김창숙(金昌淑)을 회유하려다가 그만 마각이 드러났다. 김창숙은 즉각 다물단에 이를 제보해 고등 밀정은 이규준과 그의 동지들의 손에 처단됐다. 이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이 수배령을 내려 규준과 내 부친 모두는 상하이로 피신했다.

규준은 행동가였다. 내 가친은 “일을 저지른 것은 항상 규준이고 나는 그 뒷바라지만 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인지 우당 이회영의 명을 받아 1920년 9월 국내로 들어와 1921년 1월부터 6월까지 충남 홍성군의 김용대(金容大)·최기(崔璂) 등에게 독립자금을 요구하다 체포돼 징역 2년형을 받아 복역했다. 그 후 다시 북경으로 와서 활동하였다.

1927년 나의 부모님도 상해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였다. 그때 규준은 나의 모친을 찾아와 16세 처녀인 딸, 온숙(溫淑)을 맡기고 내외가 급히 석가장(石家庄, 湖北省 省都)으로 간다고 떠났다. 그 후 나의 부친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규준 내외는 석가장에서 일본 정보기관의 함정에 빠져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우리 부모님이 온숙을 친딸처럼 길러 1929년 최경섭(崔景燮·1904~1962)이라는 전도가 유망한 청년과 짝을 맞춰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온숙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자녀도 8남매나 두고 해방 이후 귀국하였다. 매형 최경섭은 영어가 유창하여 군정시대 부천에 미군 부대 공사를 도맡아 나의 삼촌 이규창(李圭昌)과 같이 사업을 하였다. 온숙 누나는 우리 친누나처럼 왕래하였다. 그 집의 조카들 가운데 나보다 연상인 분이 있는데, 6.25(한국전쟁) 당시 경복중학교 학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용군에 끌려가 생사가 불명했다. 6.25를 기점으로 온숙누나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우리 집에선, 전쟁 격동기에 불행을 당한 것 아닌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이처럼 모든 후손 이를테면 이석영 할아버지의 두 아들, 규준과 규서도 독립운동 선상에서 희생되었고, 규준의 딸 온수도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다. 국가보훈처에서 자체심사를 거쳐 1991년 이석영에게 애족장, 2008년 이규준에게 애족장을 수여, 결정하고도 직계 후손이 없어서 미루다가 내가 대리하여 수상하였다.

나는 우당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2020년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하여 우당상과 영석상을 제정하였다. 우당상은 독립운동과 우리나라 사회를 위해 몸소 행동으로 헌신하신 어른들을 위하여 우당상을 수여하기로 했다. 제1회 수상자는 성공회 대주교 김성수, 제2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에게 수여했다. 영석상은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기업으로서 사회에 규감이 되는 사회적기업에 수여하기로 했다. 제1회는 풀무원에 수여했고 제2회는 중국에 진출하여 모범적인 사료 사업을 확장하면서 소위 ESG식 경영을 한 선구자적인 대표적 기업 ㈜애글리치에 수여했다. 이런 사업을 전개하게 되자 국가보훈처에서 2021년 8월을 이석영의 달로 정하여 다시 그분의 치적을 선양하였다.

이에 끝나지 않았다. 이석영 일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남양주(시장 조광한)시에서 화도읍에 생가도 찾아냈고, 고맙게도 이석영이 거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 공로를 기리고자 이석영 광장도 만들고, 그 광장에 <리멤버 1910>이란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했다. 뿐인 아니라 이석영 뉴미디어도서관도 마련했고 청년들의 창업을 돕는 <이석영 신흥상회>라는 이름 아래 창업센터도 만들었다. 이석영의 정신 <돈은 값지게 써야 한다>는 정신을 이어받은 사업들이다.

그런데 최근 절손되었다는 이석영 가족문에 새로운 손녀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분들이 갖고 온 사진 자료를 보고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후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다. 앞으로 이를 공식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국가보훈처에서도 절손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선 내가 제기한 의문점을 풀어야 할 것이다.

1. “1928년 경 규준이 온숙을 우리 집에 맡기고 내외분이 석가장으로 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이 사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이분들의 호적상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단지 족보에 「이규준 자 주성(周聲) 병오년(1906년) 5월14일생, 종사 광복운동, 무진년(1928년) 7월16일 졸」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배(配) 청주한씨 부 기동 (淸州韓氏 父基東)」 본관이 청주한씨인 부인인데 아버지 성함은 한기동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부인은 별세한 날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내외분이 동시에 사망한 것은 아니다. 1928년 행방불명이 됐는데 규준은 별세했고, 그의 부인은 살아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번에 손녀들이 갖고 온 사진을 보니 한씨부인은 딸들과 가족사진을 찍었다. 1980년대까지 살아 있으셨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생모가 살아계셨는데 왜 상해 시절 우리 집에 맡긴 큰딸 온숙과 전혀 연락이 없었을까? 그런데 해방 이후 가족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온숙도 상해 시절 결혼하여 살 때까지 어머니와 연락이 없었는데 아마 해방 이후 우리 집에는 알리지 않은 채 어머니를 찾은 것 아닐까?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 이유는 무엇일까?

2. 규준의 둘째 딸 숙온(淑溫·1914~1994)은 1934년 김현수(金顯洙)와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김용애(金容愛·1935~)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또 셋째딸 우숙(又淑·1915~) 은 1936년에 중국에서 중국 장교와 결혼하여 현재 대만에 살고 있다고 했다.

1928년에 규준이 우리 부모님에게 큰딸을 맡기고 석가장으로 간다고 떠날 때 둘째 딸 숙온과 셋째 달 우숙도 있었을 터인데 왜 큰딸 온숙만 나의 부모님에게 맡겼을까? 그러면 당시 14세, 13세 두 딸은 어떻게 처리하고 석가장으로 갔을까? 왜 온숙은 나의 부모님에게 “사실 나는 여동생 둘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3. 규준이 1928년 사후, 숙온과 우숙 두 딸은 누가 양육했을까? 생모(한평우)가 키웠다면 왜 우리 집과 연락을 단절했을까?

이런 의문점이 말끔하게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분들이 갖고 온 제적증명을 보면 이숙온은 「부 이종각(李鍾珏), 모 한씨」로 되어 있다. 이종각은 누구인가? 이런 모든 점을 해소하려면 자세한 가족들의 역사기록과 아마 DNA검사까지 해야 풀리지 않을까?

이제 규준이 돌아가신 시기도 근 100년이 되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은 것으로 일견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 후손들은 그 베일을 하나씩 벗겨서 정리하지 않으면 미스터리로 계속 남는다. 이석영 할아버지가 후손 없이 돌아가셨다는 기록은 가슴 아프게 남아있게 된다. 비록 손녀이지만 대를 잇는 작업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종찬 우당 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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