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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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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는 연금 지급 창구인가

보훈정책 결정의 중심축을 군에서 민간으로 옮기고 국가보훈위 격상시켜
사회통합적 보훈정책을 관장해야
등록 2021-07-27 14:20 수정 2021-07-28 01:20
서울 용산구 효창원 안에 ‘삼의사 묘역’과 나란히 조성된 안중근 의사의 가묘. 1945년 11월 환국한 직후 가장 먼저 순국지사들의 유해 봉환을 추진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듬해 6월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를 모신 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 대비해 미리 허묘를 만들어뒀다.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110년이 넘도록 장례식은커녕 유해조차 돌아오지 못한 채 넋으로 떠돌고 있다. 한겨레 자료

서울 용산구 효창원 안에 ‘삼의사 묘역’과 나란히 조성된 안중근 의사의 가묘. 1945년 11월 환국한 직후 가장 먼저 순국지사들의 유해 봉환을 추진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듬해 6월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를 모신 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 대비해 미리 허묘를 만들어뒀다.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110년이 넘도록 장례식은커녕 유해조차 돌아오지 못한 채 넋으로 떠돌고 있다. 한겨레 자료

후손이 끊겼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 이하 호칭 생략)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생존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석영은 17세기 조선의 문신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후 내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자 걸출한 독립운동가 집안인 ‘경주 이씨 6형제’ 중 둘째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해가 저물어가던 1910년 12월30일 새벽,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여섯 형제는 집안의 재산을 전부 처분한 거금을 챙겨 가족 40여 명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던 신흥무관학교(1911~1920)도 이석영 형제들이 세우고 운영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강제 폐교되기 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지휘관과 전사들을 길러냈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여섯 형제 모두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그리고 일부 형제의 자녀와 사위까지 17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한겨레21>은 2021년 6월18일부터 최근까지 한 달에 걸쳐 이석영의 증손녀 김용애(86), 최광희(82)와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85)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인터뷰하고 관련 사진과 호적 자료 등을 열람했다. 이종찬은 석영·회영 집안의 추모·기념 사업을 도맡아온, 생존 후손 중 맨 웃어른이다.
짧게 잡아도 해방 전후인 1945년쯤, 더 위로는 거의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일에 대한 이들의 기억 일부는 헷갈리고 불분명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일관됐다. 이종찬은 7월20일 김용애·최광희와 만나 옛 기억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로 맞춰보고 사진 자료를 검증한 뒤 이들이 이석영의 혈육이자 자신의 5촌 조카(당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_편집자주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부상해 나치의 포로가 됐다. 그러나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 끝에 영국 런던에서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던 샤를 드골에게 갔고, 다시 국내에 잠입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미테랑은 우리나라의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재향군인부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역사상 무려 14년이라는 최장수 대통령을 지냈다.

장준하(1918~1975)는 일본 유학 중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돼 중국 전선에 배속됐으나 1944년 탈출해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그 뒤에는 중국 충칭에서 백범 김구가 이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 합류한다. 광복군 중위 장준하는 해방 뒤 임정 일원으로 환국해 친일세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당시 지식인의 필독서이던 <사상계> <돌베개> 등을 통해 문필 활동을 하면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청년들의 지도자요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줄곧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대결하던 장준하는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 산행 중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미테랑과 장준하의 상반된 인생의 끝이 우리나라 보훈제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군인과 경찰로 시작된 보훈에 관한 법

해방과 더불어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해야 했을 보훈사업은 순국 뒤 망명지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모셔오는 일이어야 했다. 백범은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이동녕, 차리석 등 임정 요인들을 서울 효창원에 모셔왔지만, 그 자신이 친일파 군인에 암살당해 효창원에 안장되는 비극을 맞았다. 아마도 백범은 효창원을 독립투사 전용 국립묘지로 조성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백범의 구상과 달리 우리나라 국립묘지의 시작은 군인을 안장하기 위한 것으로 출발한다. 1949년 육군본부는 북한과의 국지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안장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조성해 오늘에 이른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국립묘지 내 친일파 이장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의 출발이다.

이승만은 본인이 독립운동했지만, 독립운동 동지들에 대한 보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보훈에 관한 첫 번째 법률은 1950년 4월 제정된 ‘군사원호법’이다. 이 법률은 공비 토벌에 희생된 군인과 경찰, 그 유가족에 대한 원호가 주목적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제정된 ‘경찰원호법’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를 보훈 대상으로 포함한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때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군사원호보상법과 군사원호청설치법을 잇달아 제정해 기존 상이군경과 전몰군경유족에 더해 애국지사, 4·19혁명 유공자와 그 유족, 월남 귀순자, 재일학도의용군, 반공포로 상이자까지 대상 범위를 넓히고 독자적인 주무 부처도 설치했다. 이때 설치된 군사원호청은 원호처를 거쳐 국가보훈처로 개칭돼 오늘에 이른다.

1961년부터 애국지사 지원이, 그리고 1964년부터 국립묘지에 애국지사 안장이 시작됐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보훈정책은 군인과 경찰에 집중됐다. 단적인 예로 역대 보훈처장(군사원호청, 원호처 시절 포함) 31명 중 예비역 장군 출신이 18명으로 압도적이다. 또한 역대 보훈처장은 그 직위를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보훈처장 자리는 잠시 거쳐가거나 공직 은퇴 직전에 쉬어가는 자리로 인식되는 일이 많았다. 이는 보훈처의 위상 약화와 전문성 결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군에서 민간으로 옮기고

우리나라는 지난 약 100년 동안 식민지와 해방, 해방 뒤 친일파 미청산, 좌우 대립, 내전과 국제전 성격의 한국전쟁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상처를 압축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와의 교전으로 희생당한 군경과 민간인들에 대한 치료와 보상이라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보훈정책을 펼칠 수 있는 서구와는 확연히 대조되는 지점이다. 한마디로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민주화운동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경찰을 동시에 보훈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대단히 민감하고도 조심스러운 영역이 바로 보훈정책이다.

그런데 보훈처는 상대적으로 약한 부처의 위상, 수장의 전문성 결여, 사업 영역의 복잡성과 민감성으로 인해 보훈 대상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창구 구실에 과도하게 치우쳤고, 이는 적극적으로 행정을 펼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보훈정책의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훈정책 결정의 중심축을 군에서 민간으로 옮기고 현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가보훈위원회를 프랑스의 참전기념고위위원회(Haut Conseil de la Mémoire Combattante)와 같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관련 부처 장관과 관련 단체, 인사들로 구성하는 가칭 ‘대통령 소속 국가보훈위원회’로 격상시켜 일관성 있고 사회통합적인 보훈정책을 관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방부 정신전력문화정책, 교육부 민주시민 교육, 보훈처 선양정책은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공무원 연수교육 방향을 총괄할 것이다.

2021년 6월8일 애국지사 임우철 선생이 작고하셨다. 향년 101. 이제 생존하는 애국지사는 국내 16명, 국외 3명 등 총 19명뿐이다. 그분들도 고령 탓에 대부분 거동은 물론 간단한 대화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마 차기 대통령 임기 중에는 생존한 분들 모두의 타계 소식을 접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독립운동가 부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독립운동가 부재의 시대를 대비해 우리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영상을, 나아가 그분들의 생각을 얼마큼 남겨놓았고 또한 얼마나 제대로 후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어느 만화가의 비아냥을 접하면서 비분강개가 아닌 그 무엇을 우리는 준비하고 있을까.

대비해야 할 ‘독립운동가 부재의 시대’

프랑스 보훈정책은 치료와 보상 등 희생자에 대한 물리적 치유와 더불어 기억의 보호를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특히 프랑스 보훈부는 청소년 역사교육에서 교육부와 협력해 관련 교육기재 제작과 초중고교 유적지 견학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보훈정책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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