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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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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답지 않다’ 무고 몰아가는 검찰

성폭력 신고 뒤 검찰 조사 과정에서 무고자 된 K씨… ‘성폭력 무고’ 검찰 인지 비율 높아,
검찰의 눈은 왜 가해자 아닌 피해자를 향하나
등록 2021-07-29 11:23 수정 2021-07-30 02:05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직장 상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고 회사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다 따돌림 등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K씨는 본인이 명확하게 기억하는 두 건의 성폭력(강제추행, 준강간미수)으로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과 관련된 검찰 조사 과정에서 K씨는 갑자기 무고 혐의를 받는 피의자로 전환돼, 재판에 넘겨졌다. K씨가 고소한 강제추행, 준강간미수 수사를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메시지 등을 토대로 K씨가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K씨는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른 범죄보다 불기소·무죄 비율 높은 성폭력

이는 성폭력 무고의 전형적인 사례다. 수사기관이 생각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전형’을 벗어난 피해자에 대해 수사 과정부터 무고 여부에 초점을 맞춰 수사가 진행된다. ‘무고(형법 제156조)’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무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고한 사실이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허위사실이어야한다. 신고의 진실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소극적 증명만으로는 무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통상 ‘성폭력 사건의 무고’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허위로 고소·신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가해자로 몰려 유죄가 되며 다른 범죄에 비해 성폭력 무고 비율이 높다는 그릇된 인식이 있다. 폭행·협박을 요건으로 하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피해자는 성폭력으로 인식했지만 사법시스템에서 인정하는 성폭력과는 괴리가 있어 피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함에도 ‘성폭력 무혐의·무죄는 곧 성폭력 무고’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들의 인식과 사법시스템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강간죄 개정 등 움직임이 있는 상황에서 ‘성폭력 무고’를 모두 악의적인 허위고소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연예인 박유천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한 피해자 역시 무고로 기소돼 국민참여재판을 받았다. 배심원 7명의 만장일치로 무죄가 선고됐다. ‘성폭력 피해 고소인의 입장에서 성폭행으로 인식될 수 있는 충분한 사정이 존재했다’는 이유였다.

2019년 기준 무고 범죄자는 총 7173명으로, 그중 66.1%가 남성이다. 그러나 ‘성폭력 무고’에 대한 별도 통계는 없다. 아직 범죄 유형별 무고 통계를 내지 않고 있어서다. 2019년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폭력 무고의 젠더 분석과 성폭력 범죄 분류의 새로운 범주화’라는 포럼에서 ‘성폭력 무고’ 분석을 시작한 상태인데, 그를 통해 △성폭력 피의자 대비 성폭력 무고 피의자의 비율은 매우 낮으며 △성폭력 무고 고소 사건의 불기소율은 다른 범죄보다 높은데다 △기소되더라도 다른 범죄에 비해 무죄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사건 밝혀질 때까지 무고 수사 중단돼야

무고는 검찰의 인지가 수사·기소로 이어지는 비율이 높다. 그중 성폭력 무고는 다른 범죄의 두 배에 이를 정도로 검찰 인지 비율(27.7%)이 두드러진다. 그 과정에서 엄격한 증명을 통한 기소가 요구되지만 문제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기소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래서 검찰 인지를 통한 기소 건의 무죄 비율도 높게 나타난다. K씨의 경우 직장 상사이고 가해자 집에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검사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토대로 ‘피해자답지 않다’며 K씨를 기소했다.

검찰의 인지는 가해자를 향해야 한다. ‘보복성 무고 고소’에 대해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무고의 무고’로 인지해 기소하거나 법원에서 선고시 양형에 반영해야 한다. 배우 ‘조덕제’의 경우 2015년 피해자가 ‘강제추행치상’으로 신고하자 그해 피해자를 대상으로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는데 검찰이 이를 무고로 인지해 기소 뒤 무고로도 유죄가 확정됐다.

‘무죄 추정의 원칙’ 운운하며 ‘성폭력 무고’에 대한 수사 매뉴얼 변경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는데, 원래 무고는 원사건(여기서는 성폭력 범죄)이 결정돼야 피해자의 신고·고소가 허위인지를 가릴 수 있다. 즉, 모든 무고죄에 적용되는 원칙을 성범죄 사건 무고 건에서 재차 확인한 것이다. 원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무고 수사는 중단돼야 한다. 이는 역으로 무고 피의자가 되는 피해자에 대한 무죄 추정이기도 하다. 또한 성범죄 무고 사건의 검찰 인지 비율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무고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피해자들의 신고·고소를 독려하고 추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방침이다.

성폭력으로 피소당한 가해자의 무고 고소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심각한 ‘2차 가해’로 이어진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에 대한 ‘보복성 고소’를 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실제 고소를 진행하고 피해자의 고소 취하 등을 강요하는데, 이는 가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의 전략으로 자리잡은 상태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음에도 피의자로 전환돼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성폭력 피해자가 신고·고소를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다. ‘보복성 고소’로 무고 피소를 당한 피해자들이 피의자로 전환되면 피해자로서 받을 수 있던 보호(가명 조서, 신뢰관계인 동석 등)를 받지 못하게 된다.

악몽 같은 말 ‘진짜 성폭력 피해자라면…’

2016년 정준영에게 당한 불법촬영 등 피해에 대해 고소했다가 취하했던 피해자는 국민청원을 통해 당시 소 취하를 하게 된 이유로 무고 등 역고소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나 역시 여러 건으로 ‘보복성 고소’를 당했는데 피해를 입고도 피의자로서 보호 장치 없이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의 모멸감과 공포, 불안감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억울하게 성폭력 가해자로 몰린 이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넘쳐나지만, 성폭력 피해를 입었음에도 무고 피의자로 몰렸던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적다.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폭력 무고에 대한 통념과 현실이 배치됨을 인정한 뒤 입법적 보완 등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로 조사받으러 갔으나 무고 피의자로 전환돼 고통을 겪은 K씨는 재판이 끝난 뒤 제대로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진짜 성폭력 피해자라면’이라는 말로 지속해서 피해 사실을 부인당했던 시간이 떠올랐을 것이고 앞으로 남은 싸움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그였지만 회사는 그를 도려냈고, 가해자의 고소로 사법시스템에 억지로 끌려나온 이후 그는 말, 시간, 자리를 모두 잃었다. 아직도 싸움이 남았다. 그가 부디 잘 추스르고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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