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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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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3대 60년… 죄, 사면, 또 죄, 석방

부정축재자 처벌부터 비자금 사건을 지나 국정농단까지, 돌고 도는 법 위의 특권
등록 2021-08-14 01:28 수정 2021-08-16 02:39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병철), 한겨레 자료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병철), 한겨레 자료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 상황과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한 고려 차원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 대상에 포함됐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2021년 8월9일 가석방심사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아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재범 가능성이 낮은 모범수형자 810명”에 속한 이유를 설명했다.

‘법 위의 삼성 총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 3대에 걸쳐 60년 넘게 이어지며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했다. 이병철 회장은 크게 두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수사조차 비껴갔다. 아들 이건희는 세 차례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한 번도 구속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만이 형무소 생활을 겪었지만 형기의 60%가량만을 채운 뒤 석방됐다. 법 위에서 특권을 누린 삼성의 시간을 되짚어본다.(이하 직함 생략)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세운 이병철은 무역업으로 돈을 벌었고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만들며 재벌 반열에 올라갔다.1 첫 위기는 1960년 4·19혁명과 함께 찾아왔다. 시민들이 이병철을 비롯한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 정권에 건넨 이병철의 정치자금은 4억2500만환에 달했다(부정축재 처리위원회 발표). 그가 제일제당을 세울 때 들인 자본금은 2천만환이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부정축재자 처벌은 진척되지 않았다. 이병철이 내기로 한 환수액도 24억원에서 8억원으로 줄었다.2

‘5대악’ 사카린 밀수에도 벌금형

삼성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일대 시련을 맞았다. 1966년 이병철이 건설자재라며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품 컨테이너에서 사카린 약 55t이 발견됐다. 밀수는 당시 정부가 발표한 ‘사회 5대악’에 속했다. <동아일보>는 1966년 9월16일 사설에서 “일찍이 밀수범에 대해 사형까지 내렸던 정부가 재벌 밀수에 대해서는 고작 벌과금 추징으로 그치려 한다”고 비판했다. 검찰은 이병철 회장 대신 한국비료 상무이자 삼성가의 차남 이창희를 구속했다. 그는 징역 10년을 구형받았지만 병보석으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병철은 한국비료 주식의 51%와 운영권을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2년 뒤 전자산업을 발전시키겠다며 복귀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삼성 총수는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총 22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줬지만 이병철은 검찰에 기소되지 않았다. 삼성 경영권 승계도 이병철(1987년 사망)에서 이건희로 순조롭게 이뤄졌다.3

문제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5년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 수사가 불거지며 생겼다. 이건희도 다른 재벌 총수처럼 뇌물공여 사건에 연루됐다. 검찰은 1996년 이건희를 불구속 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1997년 10월 김영삼 대통령은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위기는 10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도청 기록이 담긴 테이프가 2005년 7월 언론에 폭로됐다. 안기부의 도청에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학수와 중앙일보 사장 홍석현이 1997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나 나눈 밀담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이회창 당시 15대 대통령 후보 등에게 대선자금을 건네고 검사에게 뇌물을 주는 일도 논의했다.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는 1998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차장에서 삼성으로부터 대선자금 60억원가량을 받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건희, 홍석현 등을 무혐의 처리했다. 이건희 회장은 소환 조사도 하지 않았다.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당사자인 홍석현과 이학수가 녹취록 내용을 전면 부인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건희), 한겨레 이종근 기자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건희), 한겨레 이종근 기자

특검 아들은 삼성에 입사

2007년에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에서 비자금을 관리한다고 내부고발했다. 조준웅 특검팀이 꾸려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증여 △삼성그룹 임직원 명의 차명 의심 계좌 및 조세포탈 △삼성 정관계 로비 △2002년 대선자금 제공 의혹 등을 수사했다. 이건희는 불구속 기소됐지만 배임·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같은 해 12월 이명박 정부는 그를 단독 사면했다. 당시 명분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였다. 대법원은 2009년 5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이 수사를 지휘한 조준웅 특검의 아들은 2010년 1월 중국 삼성전자 매니저(과장)로 경력입사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아들 조씨는 2008년 12월에 어학연수를 한 것 외에는 기업 근무 경력이 없었다.

2014년 5월 이건희가 심장마비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삼성의 경영권 3대 세습 구상이 구체화됐다. 이재용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진행했고, 그럴수록 최순실-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과 얽혔다. 청와대는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돕고, 삼성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지원하는 구도였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검팀은 이재용을 구속 기소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경영권 승계 현안 등을 위한 부정청탁이 없었다는 2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잠시 서울형무소에서 풀려났던 이재용은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받고 다시 법정 구속됐다. 그리고 재수감된 지 207일 만인 8월13일 가석방됐다.

2017년 국정농단 사건(이재용) 당시 삼성 사주들의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7년 국정농단 사건(이재용) 당시 삼성 사주들의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경제는 예민하다”는 60년 전 핑계

“(1억환 이상의 탈세자를 모두 처단하면) 웬만한 사업가는 한 사람도 남아날 수 없으며 정부의 재정집행도 불가능하게 된다. 경제 분야는 정치 면보다도 더욱 예민하기 때문에 대폭적인 정리 처단 등을 하기 어렵다.”4

1960년 11월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부정축재처벌법안에 반대하며 이렇게 밝혔다. 이병철은 33억501만환이 넘는 금액을 조세포탈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2021년,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과 프로포폴 투약 혐의로 다른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이 가석방됐다. 2021년 4월 코로나19 집단감염 상황 등을 이유로 가석방 요건을 형기의 80%에서 60%로 완화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법 위에서 특권을 누리는 삼성 총수의 시간은 60년 지나도록 계속된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참고 문헌
1. <한국 재벌 흑역사(상)>, 이완배 지음, 민중의소리 펴냄, 2018년
2. <삼성독재: 삼성권력 80년, 민주주의를 지배하다>, 이종보 지음, 빨간소금 펴냄, 2017년
3. <삼성그룹의 불법정치자금의 역사와 사법처리 현황>, 참여연대, 2005년
4. ​<동아일보>, 부정축재처벌법안 정부측서 반대표명, 1960년 11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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