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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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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정책만으로 사람을 살릴 수 없을 때

의도는 좋으나 작동하지 않는 정책들… 진단·실험·근거에 바탕을 둔 ‘의료 시술’ 같은 정책 필요
등록 2021-08-15 12:21 수정 2021-08-16 14:35

저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치료하는 ‘사회 의사’가 되고 싶어 진료실을 나와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됐지요. 제가 이런 선택을 한 시기에 있었던 일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의과대학 졸업반이던 저는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유방암 클리닉 실습생이었습니다. 온종일 여성의 가슴을 들여다보고 진찰하는 것은 청년에겐 무척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 일이 익숙해질 무렵,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강남 환자들은 유방암을 조기 발견하지만, 지방 환자들은 암이 많이 진행된 뒤에야 병원에 왔습니다.

“선생님예… 이거 암 아니지예”

그러던 어느 날, 오랜 농사일로 피부가 그을리고 꽤 늙어 보이는 할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막상 차트를 확인해보니 실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이분이 감당하고 살아온 무거운 삶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진찰해보니 유방은 물론 겨드랑이에도 암세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경험이 일천한 제가 보기에도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망설이는데, 이분이 모기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선생님예… 이거 암 아니지예…”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모든 소견과 방사선사진은 말기 유방암이라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여기 강남의 중년 여성들은 정기적인 암검진으로 손톱보다 작은 암도 발견하는데, 왜 이제야 병원에 오셨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이 원망스러워 자리를 피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환자로 인해 눈물을 흘린 첫 사건이었습니다.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만으로 눈물이 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더 아프고, 더 많이 죽어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더 공부해보니 이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건강불평등은 의학 영역을 넘어 사회경제학적 문제라는 것도 알았지요. 의과대학 졸업 뒤, 저는 진로를 바꿔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진료실에서 경험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 하위 20%의 여성은 상위 20%보다 유방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두 배 이상 높습니다.(Kim, Lee, and Moon , 2008) 모든 질병의 결과는 기대수명으로 귀속됩니다. 그래서 소득수준과 기대수명의 관계는 건강불평등에서 가장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림1은 2018년 1인당 국민소득과 기대수명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천달러 이하인 저개발국가 국민은 평균 60년(50~70년)을 삽니다. 반면 2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은 평균 80년(70~90년)을 살지요. 20년 넘는 차이입니다. 산업화가 시작된 1800년 무렵 서유럽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35살 정도이고,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이 약 46살인 것을 생각하면, 인류는 대단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진보는 나라별로 차이가 큽니다.

유방암 사망 확률 소득 하위 20%가 두 배 이상 높아

나라 간 차이에 비하면 작지만, 같은 나라 안에서도 격차는 상당합니다. 그림2는 미국과 노르웨이의 소득 상위 25% 계층과 하위 25% 계층에서 만 40살 남녀의 기대수명을 보여줍니다. 왼쪽은 남성, 오른쪽은 여성입니다. 미국은 2014년 기준 상위 계층 40살 남자의 기대수명이 87살입니다. 반면 하위 계층은 이보다 10년이 짧은 77살입니다. 여성도 상위 계층 89살, 하위 계층 84살로 5년쯤 차이 납니다. 복지 천국이자 평등한 사회라고 불리는 노르웨이도 비슷합니다. 남자는 상위 계층 기대수명이 85살, 하위 계층이 77살로 8년 차이, 여자는 상위 계층이 88살, 하위 계층이 81살로 7년 차이가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격차가 점차 커지는 추세입니다.

서울대 의과대학 강영호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소득 상위 20% 계층과 하위 20% 계층의 기대수명 격차가 상당합니다.(그림3) 남자는 2017년 기준 상위 계층의 기대수명이 83살, 하위 계층이 75살로 8년 차이, 여자는 상위 계층이 88살, 하위 계층이 83살로 5년 차이입니다. 소득수준별 격차는 미국, 노르웨이, 한국이 모두 비슷합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남자의 경우 격차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대부분 저소득층 남성의 흡연율이 감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사회경제학적 지위와 기대수명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말기암환자, 만성질환자, 알코올중독자, 혹은 병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환자는 평균적으로 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사회의 약자인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갑자기 직장을 잃은 분들, 결혼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 북한이탈주민 등은 더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약자를 돕기 위한 정책이 늘 성공을 거두는 게 아닙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 첫 번째 장은 우리나라 국가 조기 암검진의 효과를 평가한 내용입니다.(Kim and Lee, , 2017)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40살 이상 모든 국민에게 2년마다 국가가 암검진을 제공합니다. 처음엔 국가 암검진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저를 경제학 공부로 이끈 그 촌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죠.

사망률 낮추지 못한 1조원짜리 국가 암검진

분석 결과, 실제 국가 암검진을 받은 사람들은 위암과 유방암을 더 많이 또 일찍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암검진은 사망률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암의 조기 발견을 도왔는데 암검진의 궁극적 목적인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니 의아했습니다. 그 이유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박사과정의 마지막 해를 보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 국민이 국가 암검진 외에 다른 경로로도 쉽게 암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 접근성이 높은 한국에선 속쓰림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 방문해 내시경을 받는다든지, 민간 암검진으로 암을 조기에 발견합니다.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6개월 안에 이런 경로로 모두 암을 발견합니다. 결국 국가 암검진으로 암을 약간 더 빨리 발견한다고 해서 사망률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건 아니었던 셈이죠.

둘째 이유는, 국가 암검진 혜택이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 암검진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받은 사람보다 흡연이나 과음 등으로 (암종에 따라) 2~13배나 암으로 죽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암검진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 검진에 참여하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정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검진에 연간 1조원 넘게 씁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입니다. 민간부문에서 이미 암검진을 적절하게 제공하고 있다면 정부가 정책 실패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초등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높이기 위해 성적장학금을 준 뒤 이를 평가했습니다.(Berry, Kim, and Son, 2021) 118개 학교에서 학생 7400명을 대상으로 했죠. 학부모 월 평균소득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원을 학기 초에 상금으로 걸고, 기말고사 성적에 따라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엄밀한 평가를 위해 학교를 무작위로 세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집단 학교의 학생들은 사업 지역 학생 7400명 중 상위 15%에 들면 상금을 주는 ‘일반 성적장학금’을 제시했습니다. 성적장학금의 문제는 학기 초 성적이 낮은 학생은 받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집단 학생들에게는 ‘상대 성적장학금’을 제시했습니다. 학생을 학기 초 성적이 비슷한 100명씩 묶습니다. 이 100명 가운데 학기 말에 15등 안에 들면 상금을 주는 것입니다. 하위권 학생들도 성적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마지막 집단은 성적장학금 기회를 주지 않은 비교군입니다.

장학금 주었는데 성적이 떨어지는 이유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이, 특별히 ‘일반 성적장학금’ 집단에서 오히려 떨어진 거죠. 그림4에서 가로축은 학기 초 성적의 백분위 등수, 세로축은 학기말 고사 성적입니다(평균을 0점, 분산을 1로 표준화). 초록 실선은 ‘일반 성적장학금’ 집단, 빨간 점선은 ‘상대 성적장학금’ 집단, 초록 점선은 대조군의 성과입니다. 검은색 세로선은 장학금 지급 기준인 상위 15%입니다. 세 선 모두 우상향하는 것은 학기 초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기말고사 성적도 높은 것을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상위권의 소수를 제외하고 초록 실선은 초록 점선보다 항상 아래에 위치합니다. 이는 ‘일반 성적장학금’ 학생의 성적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교군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려 0.31 표준편차만큼 줄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상대 성적장학금’과 대조군은 큰 차이가 없었고, 아주 하위권에서는 조금 오르기도 햇습니다.

성적장학금이 오히려 성적을 떨어뜨리다니 어찌 된 일일까요? 이는 ‘상위 15%가 되어 장학금을 받으라’는 메시지가 하위권 학생들을 좌절시켰기 때문입니다. ‘일반 성적장학금’ 집단에서 하위 85% 학생들은 공부하려는 의지, 자존감, 성실성 등이 모두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상위 15% 학생에게서는 이런 현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연구는 선한 의지로 학생을 위하는 장학금일지라도 학생들을 좌절시켜 오히려 학업 성취를 떨어뜨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경제학 공부가 어느덧 20년차가 됐습니다. 저는 중진 경제학자가 됐습니다. 이 세월은 뜨거운 마음만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도울 수 없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의도는 좋으나 작동하지 않는 정책이 너무도 많습니다.

당위, 직관 넘어 사회실험으로 효과 입증해야

이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책이 그 설계 단계인 타당성 조사와 시범사업에서부터 그 효과를 충분히 입증한 뒤 도입돼야 합니다. 가령 정부가 성적장학금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면, 제가 했던 것과 같이 먼저 소규모로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멉니다. 수많은 정책이 당위와 직관, 빈약한 증거 아래 도입됩니다.

지난 몇 년간 자주 논의된 기본소득은 우리나라 사회시스템의 근간을 바꿀 만한 정책입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에서 잘 작동할지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도 있죠. 기본소득을 정말 도입하려면 먼저 우리 실정에 맞게 각론을 세심하게 설계하고, 핀란드가 했던 것처럼 사회실험을 통해 그 효과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고 판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책은 의료 시술처럼 이루어져야 합니다. 엄밀한 연구로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의사가 질병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의학적 근거에 따라 처방하고 치료하는 과정 같은 정책이 진짜 사람을 살리는 정책입니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 및 공공정책학 교수·Lab2050 연구위원장
참고문헌
·Kim, Chul-Woung, Sang-Yi Lee, and Ok-Ryun Moon. "Inequalities in cancer incidence and mortality across income groups and policy implications in South Korea." Public health 122.3 (2008): 229-236.
·Chetty, Raj, et al. "The association between income and life expectancy in the United States, 2001-2014." Jama 315.16 (2016): 1750-1766.
·Kinge, Jonas Minet, et al. "Association of household income with life expectancy and cause-specific mortality in Norway, 2005-2015." Jama 321.19 (2019): 1916-1925.
·Khang, Young-Ho, et al. "Trends in inequality in life expectancy at birth between 2004 and 2017 and projections for 2030 in Korea: multiyear cross-sectional differences by income from national health insurance data." BMJ open 9.7 (2019): e030683.
·Kim, Hyuncheol Bryant, and Sun-mi Lee. "When public health intervention is not successful: Cost sharing, crowd-out, and selection in Korea's National Cancer Screening Program." Journal of health economics 53 (2017): 100-116.
·Berry, James, Hyuncheol Kim, and Hyuk Son. "When student incentives don’t work: Evidence from a field experiment in Mala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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