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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유는 팔지만 출산은 안 되는?

등록 2021-09-14 09:12 수정 2021-09-19 06:57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2021년 5월 “불가리스, 코로나19 억제 효과”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되자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남양유업 본사 대강당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2021년 5월 “불가리스, 코로나19 억제 효과”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되자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남양유업 본사 대강당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①분유·우유 등 유아식을 바탕으로 성장한 ㄱ사의 누리집엔 “모성의 숭고함과 가치를 어느 기업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임신과 출산, 육아를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사내 모성보호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회사는 임신기 휴직, 영유아 교육비 지원 등 사내 복지제도를 운용한다. ②ㄱ사는 1971년부터 50년 넘게 ‘임신육아교실’을 운영하며 출산을 장려해오고 있다. ③ㄱ사의 여성 직원 비율은 30% 이상이다. ④ㄱ사는 2019년 세종시가 주최한 여성일자리 박람회에서 여성친화 우수기업에 선정됐다.

그리고 ①ㄴ사는 2015년 육아휴직을 신청한 여성 팀장 ㄷ씨를 통보 없이 보직해임했다. 육아휴직 뒤 복직한 ㄷ씨는 택배실과 탕비실 사이에 배치된 자리에서 단순 업무를 해야 했다. ㄷ씨가 노동위원회에 인사발령 구제신청을 하자, 회사는 ㄷ씨를 경기도 고양시 물류창고로 발령 냈다. 이후 1년도 안 돼 출퇴근하는 데 5시간이 걸리는 천안 물류창고로 보냈다. ②ㄴ사의 회장이 ㄷ씨가 퇴사하도록 압박하라며 다른 직원에게 “빡세게 일을 시키라고, 아주 강한 압박을 해서 못 견디게”라고 말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③ㄴ사는 2013년에도 결혼·출산 등을 이유로 여성 직원에게 퇴사를 강요한 혐의로 회장이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④ㄴ사의 여성 직원 698명 중 약 절반인 388명은 급여가 낮은 판매·판촉직이다. 2021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생산직 내에서도 남성이 연 5419만원 받을 때 여성은 4155만원을 받는다. 임원 9명 중 여성은 비상근 1명뿐이다.

ㄱ사는 임신기에도 휴직 제도를 운용하는 여성친화 기업처럼 보인다. ㄴ사는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했다. 놀랍게도, ㄱ사와 ㄴ사는 같은 회사다. 남양유업. ‘여성친화 기업’과 ‘여성 노동권 침해 기업’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2013년 대리점 갑질, 2019년 온라인에서 경쟁사 비난, 2021년 “불가리스, 코로나19 억제 효과” 발언 등으로 논란을 빚었던 남양유업에서 이번엔 ‘육아휴직 보복갑질’이 나왔다. 무려 홍원식 회장의 녹취록이다. 녹취록엔 “위법하는 건 아니지만 한계선상을 걸어라 그 얘기야” 같은 법망은 피해가면서 육아휴직자의 퇴사를 압박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남양유업은 “육아휴직을 사유로 어떠한 부당한 대우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녹취록에 대해서는 “시기나 출처, 대화의 상대방이 특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쳤다.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차별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 새로울 게 없지만(“임신 기간 중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51.3%,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출산율이 높아야 매출이 늘어나는 회사조차도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모순에 의아하다. 분유는 팔아야 하지만 직원은 출산하면 안 되고, 아이는 낳되 휴직하면 안 되고.

ㄷ씨가 낸 부당인사발령 구제신청에 대해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인사발령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기각했다. 중앙노동위원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행정법원은 부당인사발령 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ㄷ씨의 손을 들어줬지만, 서울고법은 ㄷ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ㄷ씨 사안은 현재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9조를 다시 새긴다.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육아휴직을 마친 후에는 휴직 전과 같은 업무 또는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에 복귀시켜야 한다.”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장수경 <한겨레>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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