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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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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일자리,이름 붙이긴 쉬워도

상생형 지역 일자리 사업 4년… 단순한 일자리 창출, 정부지원금 받기, 투자 유치에 머무르지 말아야 할 실험
등록 2021-10-05 03:59 수정 2021-10-06 01:48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25일 경북 구미 구미코 전시장에서 열린 ‘상생형 구미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서 (왼쪽부터) 신학철 LG화학 대표이사, 장세용 구미시장, 이철우 경북도지사, 김동의 한국노총 구미지부 의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25일 경북 구미 구미코 전시장에서 열린 ‘상생형 구미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서 (왼쪽부터) 신학철 LG화학 대표이사, 장세용 구미시장, 이철우 경북도지사, 김동의 한국노총 구미지부 의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역 곳곳 일자리에 제 이름을 단다. 정체성을 새긴다. 광주형, 밀양형, 군산형, 횡성형, 부산형 상생 일자리가 있다. 구미형, 대구형, 신안형은 노동자·기업·주민·지역 정부가 일자리 협약을 체결했다. 울산형, 김천형, 논산형, 대전대덕구형 등은 정부 컨설팅을 받는다. 모양은 제각각이다. 지역 정부와 대기업이 자본을 분담해 회사를 만든다.(광주형) 중소기업이 조합을 이뤄 전기차 공장을 짓거나(횡성형), 전기차 클러스터를 구성해 합류하는 기업 사이에 엇비슷하게 노동조건을 맞춘다.(군산형) 상생형 지역 일자리라는 하나의 종이므로 다른 종과 구분되는 공통의 특질은 있다. 적정한 노동조건과 공정한 원·하청 생태계를 약속해야 한다. 지역 노·사·민·정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러면 정부의 각종 특별대우(지원금, 세제감면, 입지 혜택, 복지 지원 등)를 받는다. 법(국가균형발전특별법)까지 개정했다.

“과거와 같을 수 없어 해야 할” “일의 미래”

상생형 지역 일자리(상생형 일자리) 사업이 시작된 지 4년이 넘었다. 노·사·민·정 대타협을 통해 적정임금을 보장하며 기업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다며 ‘광주형 일자리’를 콕 짚어 2017년 문재인 대통령 공약에 포함했다. 광주형 일자리는 자동차 캐스퍼를 만들고 대통령은 예약 주문했다. 힘, 주었건만 별달리 눈에 안 띈다. 익히 알아온 지역의 일자리 창출 정도로 보인다. 상생형 일자리 참여자마저 그 성격을 ‘일자리 창출’로 주로 여긴다.(김윤호·김기덕, ‘지역상생형 일자리 모델과 노동조합의 과제’) 효율적이며 적절한 재정 지원인가, 기업에 대한 지나친 양보 아닌가, 노동조건의 후퇴일 여지는 없는가, 지역이 일자리 이름에 제 정체성을 심을 만한 역량이 있는가. 대개 부정적 질문과 함께 이름 불린다. 아직 의구심이 더 크다.

혼란을 더듬기에 앞서 왜 부딪히고 있는지, 대체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 건지부터 되새겨야 마땅하다. 군산형 일자리를 다듬은 김현철 군산대 교수는 “과거와 같을 수 없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광주형 일자리 틀을 정리한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과거와 같을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먼저 고민해야 했던 지역에서, 일과 그것을 둘러싼 관계를 다시 정리해보겠다고 나섰다. 당연했던 과거의 문장 몇 개를 뒤집는데, 지금 당장은 몇몇 지역의 실험 정도다. 어쩌면 일과 산업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룰 것으로 짐작한다.

뒤바뀌는 자본과 노동의 자리

당연했던 문장: ‘노동은 자본 투자의 부산물(혹은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자본 투자의 비용과 효율 사이에서 일자리의 자리는 정해진다. 저렴한 입지와 각종 지원을 바라보며 기업이 지역에서 생산하고, 생산하려니 일자리는 만들어진다. 이런 기업 유치, 공식이 무너지고 있는 건 지역이 먼저 체감했다. 전기·전자·섬유 공장의 국외 이전, 조선업 구조조정,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 축소를 겪었다. 노동자, 즉 사람은 산업별 경기와 자본의 이동을 따라 실직하거나 움직였다. 부산물이라니, 사람이 수동태인 건 당연했다.

뒤집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일자리와 사람을 최우선으로 두고 이를 위해 자본을 동원할 수는 없는가. “‘일자리를 위한 투자’ 나아가 ‘노동을 위한 자본의 동원’”이다.(박명준, ‘광주형 일자리의 의의, 쟁점과 과제’) ‘적정 임금, 적정 노동시간, 노사책임 경영, 원·하청 관계 개선 같은 요소를 재정지원의 대가로 투자 기업에 요구한다. 지역에 단단히 뿌리박은 중소기업 협동조합(횡성형)이나 중견기업 클러스터(군산형)를 중요한 유치 기업의 목록에 넣는다’는 건, 그런 의미다.

‘얼마의 자본을 유치해, 몇 명을 고용했다’로 정리하곤 하는 성과는 (중요하긴 해도) 지역 상생형 일자리를 설명하는 핵심일 수 없다. “광주형 지역 일자리 모형은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진행하던 기초자치단체의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변질됐다”(한국고용정보원, ‘중장기 인력수급 변동 요인’)는 비판은 새겨들을 만하다. 어떤 일자리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적절하고 지속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삶이 얼마만큼 더 안정적으로 나아졌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물론 생산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자본과 노동의 자리, 양적 지표와 사람의 자리는 좀더 유연하게 뒤바뀔 수 있다. 성장이 지역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라면 한층 더 그렇다.

‘적정’은 끊임없는 타협 속에 있다

당연했던 문장: ‘일자리의 적정 조건은 기본적으로 시장 원리, 간혹 노동자와 사용자의 힘겨루기 속에 만들어진다’.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조율하고 협의하며 일자리의 조건을 만드는 조합주의 혹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기억이 거의 없다. 외환위기 직후 ‘노사정 대타협’ 정도가 있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으로 서로를 향한 불신만 더했다. 양보하고 타협할 여지는 더 좁아졌다. 지역 수준에서라면? 이를 국가 차원의 조합주의와 대비해 ‘중위 조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기의식을 지역사회 주체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전국 수준에 비해 높은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좀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지역상생형 일자리 모델과 노동조합의 과제’)

이를테면 연간 3500만원(광주형 일자리 임금)은 반값 임금인가, 적정 임금인가. 소수의 고임금 일자리와 다수의 저임금 일자리가 뒤섞인 현실에서 적정한 기준을 정할 수 없다. 적정의 의미는 각 지역, 산업, 상황, 시점, 노동자 처지에 따라 다르다.

당장 임금 수준보다 중요한 것은 결정 방법이다. “기업은 이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노동자의 몫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 소비자이자 일자리의 영향에 놓인 지역 주민도 논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조건도 물론 중요하다.”(박명준 연구위원)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정해진 조건 속에서 올해의 적정, 내년의 적정, 내후년의 적정을 찾아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시장 원리 또는 중앙정부의 결정, 혹은 갈등이 전부이던 문제해결 방식에 지역 단위 민주주의가 더해지도록 상생형 일자리는 디자인됐다.

○○형 일자리, 이름을 구하는 건 쉬워도 지속하고 전형으로 퍼트리기는 쉽지 않다. 일자리와 성장, 문제해결 방식의 오랜 관행을 거스른다. 되새기지 않으면 쉽게 오해한다. 오해하고 나면 익숙한 데로 돌아선다. 정부지원금 받기, 투자 유치, 지역 일자리 창출 정도로 여긴다. 익숙한 데로 돌아서면 실망한다. 애초 이상은 좌절된다. 그래도 지역, 당연했던 과거의 문장에 배반당하고 낱낱이 반성한 이들이 모인 곳에서 상생형 일자리가 좌충우돌 제 모습을 찾으려 애쓴다. 관성을 이길 고통의 기억이 생생한 것만은 씁쓸하나 희망차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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