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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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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시 니말맞’의 시대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염려하는 새로운 문법은
등록 2021-10-09 16:50 수정 2021-10-10 01:46
드라마에 클리셰로 등장하던 장면들은 이제 ‘폭력’적으로 보인다. MBC웹페이지 화면 갈무리

드라마에 클리셰로 등장하던 장면들은 이제 ‘폭력’적으로 보인다. MBC웹페이지 화면 갈무리

“뭔 말을 못하겠네.”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의견에 대해 말을 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심하게 반박한 것이 아니더라도 돌아오는 대답은 ‘폭풍’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은 뫄뫄가 틀렸다는 것 아니냐?” “그래서 결국은 뫄뫄를 지지한다는 거냐?”(‘뫄뫄’는 ‘뭐뭐’에 해당하는 인터넷 용어) 등등. 전부가 그렇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한 것임에도 자기가 한 말을 전부에 대한 호불호로 여기는 통에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이 늘었다.

확신과 부합하는 상황이 나타날 때까지

답은 정해져 있다. 불확실성이 증폭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답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답이 애초부터 정해진 사람들이 있다. 확신에 차 있다. 변화하는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며 ‘아닐 수도 있음’에 대한 여지를 두고 견해를 수정하는 작업은 하지 않는다. 내 확신과 부합하는 상황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외칠 뿐이다.

누군가에게 코로나19 방역은 감기에 불과한 코로나19를 빌미로 시민의 삶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정치 방역’에 지나지 않는다. 또 누군가에게 한국의 소위 케이(K)-방역은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모범이다. 심지어 이런 나라에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2년간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 있었고 그에 따라 시민들이 고통받았다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정해진 답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반대편으로 낙인찍히고 매장당한다. 이제는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한 ‘확증편향’이라는 말처럼 어느 한쪽으로 입장이 정해지면 다른 쪽 이야기는 들어볼 필요도 없이 부정된다. 이를 대표하는 말이 ‘반박시 뫄뫄’다. 내 말에 반박하면 그 순간 너는 적이 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내 말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제기한 이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사안에 따라 분리해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를 판단하는 것도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의 효과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적과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급부도 있다. ‘반박시 뫄뫄’에 질려버릴수록 사람들은 토론 자체를 포기한다. 그냥 “네 말이 맞다”고 일찌감치 ‘항복’하고 도망가버린다. 그게 ‘반박시 뫄뫄’의 반대편에서 나온 ‘반박시 니말맞’(‘니 말이 맞다’ 줄임말)이다. 누군가의 말에 대해 이견을 이야기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강도로 비판이 돌아오면 바로 “ㅇㅇ. 니 말이 맞음” 해버리는 것이다. 귀찮은 논쟁에 휩싸이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논쟁에서 치러야 하는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동트는 로맨스> 같은 새로운 서사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트는 로맨스> 화면 갈무리

새로운 시대에는 <동트는 로맨스> 같은 새로운 서사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트는 로맨스> 화면 갈무리

감정을 해치기 위해 돌려주는 말만 발달

물론 ‘반박시 뫄뫄’만큼이나 ‘반박시 니말맞’도 상대에 대해 공격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말이다. 이 말에는 “네 말에 진짜 동의한다”는 뜻이 전혀 없다. 내가 아무리 말해봤자 너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아 논의할 가치도 없으니 관두자는 비꼼과 경멸의 언어다. 너는 피곤하기만 한 상대라는 말이다. 더구나 저 말이 인터넷 밈으로 유행되고 난 다음에는 더 공격적인 비아냥으로 사용된다.

상처받은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치기 위해 돌려주는 말만 귀신같이 발달하고 있다.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주고-받고-돌려주고’가 사람과 사람 관계를 지속시키는 순환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지금 한국 사회는 상처와 복수를 ‘주고-받고-돌려주고’ 하면서 넌덜머리 나는 관계를 재생산시키며 순환하고 있다.

이견이 폭넓게 허용되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견을 아예 말하지 않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석무가 쓴 <다산에게 배운다>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은 “같은 무리와는 함께하면서 다른 무리는 공격하고 징벌하여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무리”를 격렬히 비판했다. 이런 자들은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이지 진심으로 착함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즉 이미 정해진 답을 가지고는 세상을 바르게 하지도 못하거니와 자기 마음을 올바르게 닦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확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확신하는 사람들에 대해 질려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런 확신이 지금 이 증폭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 자신만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은 확신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고 경계한다. 다만 이들은 말했을 때 ‘반박시 뫄뫄’나 ‘반박시 니말맞’이라는 공격을 받는 것이 또 두려워 말하지 않을 뿐이다.

비단 방역이나 정치적인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그렇다. 특히 사랑이나 우정처럼 내밀한 인간 감정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지나친 확신’이 서로의 존재를 배려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돌봄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건 우정이건 어떤 이름에서도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질 것을 요구한다.

단적으로 말해 가수 이승철이 불렀던 불후의 명곡 <희야>의 시대는 갔다. 노래 가사를 보자. 나는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다. 비록 너는 싫다고 말해도 나는 너의 마음을 안다. 너는 네 마음을 부정하지만 나는 너도 모르는 네 마음을 안다. 그러니 너는 부정하는 네 마음을 부정하고 내 말을 듣고 믿어야 한다. “날 좀 바라봐.”

<희야>의 노랫말이 지금은 ‘스토킹’인 것처럼

지금 시대에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무슨 노래인 것 같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 스토킹이라고 답한다. 이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생은 최근 들어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내 20대에 사랑하다 실연당한 사람의 마음을 절절하게 했던 ‘불후의 명곡’의 메시지가 지금은 ‘끔찍한 범죄행위’로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노래와 가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노래는 가만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과 사람 관계에 대한 ‘윤리’가 바뀌었다. 상대방 말을 묻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그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저 노래의 ‘화자’는 이 시대에 더는 윤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라도 말이다. 오히려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 그것이 폭력이라고 이 시대 윤리는 말한다. 이 시대 윤리는 그런 방향으로 정초돼야 한다.

다행인 것은 조금씩 이 확신의 언어들 틈새에서 새로운 서사가 나온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완결된 웹툰 <동트는 로맨스>의 경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자기 성격과 상관없이 다른 이를 염려할 때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등장인물 중에는 소심한 사람도 있고 왁자지껄한 사람도 있고 거친 성격도 있고 달달한 성격도 있다. 그러나 그 성격과 상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 자신이 우정을 나누는 이를 염려할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안다고 확신하지 않으며, 확신한다고 함부로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이 “너는 비록 싫다고 말해도 나는 너의 마음 알아” 하던 시대와 달라진 지점이다.

그것이 연인이건 친구이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현존’을 돌보고 근심하는 일이다. ‘현존’이란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가 여기 그저 있음이며 이 현존이 사랑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현존함을 기뻐하며 동시에 그의 현존이 지속하기를 바라고 염려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 ‘돌보고 염려하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폭력이 되어 그의 현존을 파괴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한다. 지난 한국 사회에서 ‘사랑의 역사’가 바로 그 ‘폭력의 역사’였음을 우리 모두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사랑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서로의 존재를 보호하는 일이 돼버렸다. 확신을 폭력으로 경험하면서 확신에 질려버렸고 확신하는 자를 누구보다 경계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을 경계하는 것만큼이나 아예 윤리적 관계의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비극적이고 비참하다. 거기 별일 없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는 있겠지만 ‘기쁨’은 없기 때문이다.

‘지나친 확신의 언어를 끊으라’는 확신의 언어

이 점에서 나는 확신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염려하는 새로운 문법, 윤리적 관계를 모색하는 서사가 등장하는 것이 매우 반갑고 고맙다. 이미 창작하는 학생들로부터 많이 듣는 것이 이런 관계를 모색하는 서사를 그리고 싶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관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망해버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기 인간과 인간의 유대와 연대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운 연애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에 관한 이야기이며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치는 확신의 세계다. 시민에게 ‘공약’을 통해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하는 말의 세계가 정치다. 따라서 정치인의 언어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 언어의 공간과 정치인 지지자들 말의 장소는 다르다. 사람들은 정치인을 매체를 통해서만 만나지만 지지자들은 삶의 곳곳에서 만난다. 그렇기에 지지자들의 장소는 정치인과는 다른 윤리적 관계의 언어를 요구한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다. 유의미한 숫자의 시민이 지지자들의 확신의 언어에 질려버리고 그것을 폭력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확신의 언어를 냉소하고 경멸한다. 다만 공격받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정치에도 매우 해롭다. 이런 형국이라면 확신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아예 이 자리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안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람과 사람의 새로운 연대와 유대라는 ‘사회’의 가능성은 없다. 삶의 자리에서 ‘사회’가 역동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한다면, 정치인의 가장 큰 역할은 자신은 확신의 언어를 말하되, 지지자들이 지나친 확신의 언어로 다른 시민을 사냥하며 가뜩이나 너덜너덜해진 사회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에 적합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을 ‘리더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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